황혁(黃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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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1년(명종6)∼1612년(광해군4) = 62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자는 회지(晦之), 호는 독석(獨石)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병조 판서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황정욱(黃廷彧)이고, 어머니 순창조씨(淳昌趙氏)는 의정부 사인조전(趙詮)의 딸이다. 영의정홍서봉(洪瑞鳳)과 선조의 제5왕자 순화군(順和君)이두(李)의 장인이다. 명재상 황희(黃喜)의 7대손이고, 고봉(高峯)기대승(奇大升)의 문인이다.

선조시대 활동

1570년(선조3) 사마시에 진사로 합격하였고, 1580년(선조13) 30세에 별시(別試)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별시에서 황혁이 시험 시간이 끝나도 시권(試券)을 제출하지 못하자, 고시관이 그에게 시간을 더 줘서 재주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주자고 선조에게 건의하여, 겨우 시권을 낼 수 있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9) 성균관 전적, 예조 좌랑과 형조 좌랑, 봉상시 첨정을 역임하였다. 1584년(선조17)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고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계갑일록(癸甲日錄)』) 1585년(선조18)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전라우도를 염찰하다가, 나주(羅州) · 담양(潭陽) 등지에서 횡행하던 도적 김국보(金國寶) 등을 잡았다. 이어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와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를 거쳐, 직산현감(稷山縣監)과 고양군수(高陽郡守)를 지냈다. 장악원 정으로 있을 때, 아버지 황정욱이 주청사(奏請使)로 명(明)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에 성공하여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에 책훈되고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에 책봉되었다. 그도 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품되어 판결사에 임명되었다. 호조 참의, 승정원 동부승지, 우승지(右承旨)를 차례로 맡았다.

율곡(栗谷)이이(李珥)와 송강(松江)정철(鄭澈) 등 서인을 지지하였는데, 1589년(선조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일어나자, 당시 대간(臺諫)이던 황혁은 동인들을 탄핵하고, 정여립을 천거한 병조 판서홍여순(洪汝淳)까지 논핵하려 하다가 동료들에게 제지당하였다. 1591년(선조24) 좌의정정철이 광해군(光海君)이혼(李琿)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하다가, 신성군(信珹君)이후(李珝)를 세자로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서북 변경 강계(江界)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자, 그도 그 일당으로 몰려 관작을 삭탈당하고 문외(門外)로 출송(黜送)되었다.

임진왜란 때 회령의 변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선조는 좌의정유성룡(柳成龍)과 도승지이항복(李恒福)의 의견을 받아들여, 여러 왕자(王子)들을 각 도에 나누어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모으게 하였다. 임해군(臨海君)이진(李津)은 장인인 김귀영(金貴榮)과 함께 함경도로, 순화군은 한준(韓準)과 함께 강원도로 갔다.(『기재사초(寄齋史草)』 하권) 이어 선조는 황정욱을 호소사(號召使)로 임명하고 아들 황혁과 함께 강원도로 가서 순화군을 수행하게 하였다. 황혁은 전 가족을 데리고 아버지 황정욱과 순화군 일행을 따라서 강원도의 여기저기를 다녔다. 5월 서울을 점령한 일본군이 북상하자, 황혁 일행은 일본군을 피해 함경도 마천령(摩天嶺)을 넘어, 7월에 회령(會寧)으로 가서 임해군 일행과 합류하였다. 왕자 일행은 회령에서 머무르면서, 민간에서 물건을 노략질하고 부녀자를 유린하였으며 수령들을 핍박하였으므로, 함경도에서 민심을 크게 잃었다.

회령부의 아전 국경인(鞠景仁)은 명천(明川) 사람 정말수(鄭末守) 등과 도모하여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내통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두 왕자와 황정욱, 황혁, 김귀영 등 수십 명을 잡아서 함경도 안변(安邊)에 주둔한 일본군에게 넘겼다. 국경인 일당은 나중에 의병장 정문부(鄭文孚)와 신세준(申世俊)에 의해 토벌되었다.(『학봉집(鶴峯集)』 권4) 황혁과 황정욱 부자는 두 왕자와 함께 안변의 토굴(土窟)에 감금되었는데, 가토는 황혁과 황정욱에게, 선조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글을 쓰도록 강요하였다. 황혁이 거절하자, 가토는 그의 8세 밖에 안된 어린 맏손자를 그의 눈 앞에서 죽이고 그의 목숨도 위협하였으나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1593년(선조26) 봄에 가토는 두 왕자 일행을 끌고 서울로 돌아와서 주둔하였는데, 창의사(倡義使)김천일(金千鎰)이 군교(軍校)를 보내어 두 왕자와의 만남을 청하였다. 그러자 두 왕자가 황혁에게 붓을 쥐어주고 가토의 말을 제발 받아 적으라고 애걸하였다. 어쩔 수 없이 황혁은 가토가 시키는 대로 행조(行朝)에 항복을 권유하는 글을 썼지만, 따로 진짜 글을 만들어 그 글이 자기의 뜻이 아니라고 쓰고 왜적의 자세한 정세를 아울러 기록하여 몰래 납서(蠟書)를 보냈다. 두 왕자도 별도로 서신을 만들어 함께 행조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황혁의 진짜 글은 반대파 동인들의 방해로 인하여 선조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그해 4월,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친(和親)이 일단 성립되어, 일본군은 조선의 남쪽으로 철수하면서 두 왕자를 조선에 송환하기로 하였다. 그해 7월에 황혁 부자는 두 왕자와 함께 부산에서 석방되어 행재소로 송환되었다. 황혁 · 황정욱 부자가 해주(海州)의 행재소에서 선조를 알현하자, 삼사(三司)에서는 번갈아 글을 올려 그들의 죄를 논하였으므로, 황정욱은 길주(吉州), 황혁은 이산(理山)으로 유배되었다. 1597년(선조30) 황정욱은 유배지에서 석방되었으나, 황혁은 신천(信川)으로 이배(移配)되었다.

광해군 때 <김직재(金直哉) 옥사(獄事)>

1611년(광해군3) 황혁은 김직재(金直哉)와 함께 순화군의 양자 진릉군(晉陵君)이태경(李泰慶)을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무고를 당하였다. 이는 봉산군수(鳳山郡守)신율(申慄)이 그가 체포한 도적 유팽석(柳彭錫) 등을 사주하여 황혁과 김직재를 고발한 것이었다. 황혁의 아버지 황정욱은 신율의 조부인 신점(申點)과 오래된 원한[舊怨]이 있었고, 대북파 이이첨(李爾瞻)과는 선조 때 대립 관계에 있었다. 이이첨은 광해군 즉위 후에 권력을 잡자 친척인 신율과 결탁하여 옥사(獄事)를 거짓으로 날조해서 황혁에게 죄를 씌웠던 것이다. 이이첨 · 신율 일당은 황혁과 그 자손들에게 자복(自服)을 강제로 받아내려고, 집안사람들을 모두 옥에 가두고 혹독하게 심문하는 바람에 죽은 자들이 수십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집안 사람은 물론하고 황혁과 원한이 있던 이웃 사람들도 거짓 증언을 하지 않았다.(『도곡집(陶谷集)』 권11) 황혁은 1612년(광해군4) 4월 13일 세 번째 형신(刑訊)에서 결국 피투성이가 되어 형틀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향년 62세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권1)

저서로는 『독석집(獨石集)』 · 『기축록(己丑錄)』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황혁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모습은 준수하였는데, 특히 구레나룻 수염이 멋졌다. 황혁의 성품은 질탕(佚宕)하여 예절에 구속 받지 않았고, 문사(文詞)가 호방하여 시류(時流)를 압도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호탕하고 정직하여 간악한 사람들을 몹시 미워하였으므로,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많았다. 1585년(선조18) 그가 전라우도에 암행어사로 나갔을 때 동인의 사관은 “젊어서는 매양 술에 취해 기방(妓坊)에만 드나들었고, 벼슬길에 올라서는 권문(權門)에 들락거렸으므로, 앞뒤로 몸가짐에 볼 만한 점이 없었다. 형조의 낭관이 되어서는 속포(贖布)를 받아서 모두 창기(娼妓)에게 탕진했다. 고을의 수령으로 나가서는 주지육림(酒池肉林)에 파묻혀서 고을 백성들의 소송을 아예 판결하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의 광폭한 성격을 어른이 되어서도 아직도 고치지 못하고 거리낌 없이 행동하였기 때문에 진신(縉紳)들이 그를 더럽게 본 지 이미 오래 되었다.”라고 하여 그의 비행을 논하기도 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지는 경기도 파주(坡州) 교하(交河) 북쪽 금승리(金蠅里)의 선영에 있는데, 도곡(陶谷)이의현(李宜顯)이 지은 비명이 남아 있다.(『도곡집』 권11)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복관되어 좌찬성에 추증되고 장천군(長川郡)에 추봉(追封)되었다.(『조천기(朝天記)』 상권) 첫째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호조 좌랑윤엄(尹儼)의 딸로, 자녀는 1남 2녀를 낳았고, 둘째부인 풍양조씨(豐壤趙氏)는 의정부 사인조정기(趙廷機)의 딸로, 1남 2녀를 낳았다. 장남 황곤후(黃坤厚)는 요절하였고, 차남 황곤건(黃坤健)은 아버지 황혁과 함께 감옥에서 죽었다. 장녀는 윤천구(尹天衢)의 처, 차녀는 영의정홍서봉(洪瑞鳳)의 처, 4녀는 군수신희업(辛喜業)의 처이고, 3녀가 순화군부인(順和君夫人)이다. 황곤후의 장남은 <임진왜란> 때에 할아버지 앞에서 가토의 칼에 죽었고, 차남 황상(黃裳)은 22세의 나이로 할아버지와 함께 감옥에서 죽었다. 황혁은 아비 없이 키운 두 손자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보다 더 괴로워했다고 한다. 증손자 황이징(黃爾徵)은 황상의 아들로 현감을 지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도곡집(陶谷集)』
  • 『견한잡록(遣閑雜錄)』
  • 『계갑일록(癸甲日錄)』
  • 『계곡집(谿谷集)』
  • 『고봉집(高峯集)』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기재사초(寄齋史草)』
  • 『기축록(己丑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동각잡기(東閣雜記)』
  • 『상촌집(象村集)』
  • 『서애집(西厓集)』
  • 『속잡록(續雜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수당집(修堂集)』
  • 『순암집(順菴集)』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일사기문(逸史記聞)』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조천기(朝天記)』
  • 『지산집(芝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