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권(試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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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시험의 답안지.

개설

과거의 제술시험에서 응시자가 제출한 답안지였다. 응시자의 인적 사항, 글제와 응시자가 지은 글, 성적, 등수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사용 전의 답안지는 시지(試紙)·명지(名紙)·명저(名楮) 등으로 일컬었고 답안을 작성한 답안지는 시권(試券)·권자(卷子) 등으로 일컬었다.

내용과 특징

시권은 응시자가 작성한 답안으로 당락의 준거가 되는 문서였다. 국가에서는 시험의 공정한 운영을 위하여 시험 전 과정에 걸쳐 시권을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현전하는 시권에는 그 과정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우선 시지는 종이의 재질이나 크기를 제한하여 지나치게 고급스럽거나 큰 종이를 쓸 수 없도록 하였다(『숙종실록』 10년 8월 9일). 조선시대 시지는 응시자들이 직접 장만하였는데, 가급적 고급지를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규격은 시기에 따라 달랐는데, 1717년(숙종 43)에 정한 기준을 보면 생원진사시의 경우 포백척으로 세로 1척 4촌, 가로 4척 5촌가량이 되도록 하였다. 정시·알성시의 시지인 정초지(正草紙)의 규격은 세로 2척 6촌 5분, 가로 1척 9촌이었다.

응시자들은 시지의 오른쪽에 자신의 인적 사항을 기재하고, 시험에 앞서 응시자로 등록하는 녹명(錄名) 때 신원을 증명하는 사조단자(四祖單子), 보단자(保單子)와 함께 제출하였다. 사조단자는 아버지·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외할아버지의 이름, 벼슬, 본관 등을 적은 것이며, 보단자는 신분 보증인의 보증서였다. 녹명관은 시지의 규격과 지질을 확인하고 응시자의 신원을 확인한 후 시지의 인적 사항을 적은 부분을 봉하고 그 위에 관인을 찍어 다시 돌려주었다. 이처럼 봉한 부분을 피봉(皮封)·비봉(秘封)·봉명(封名)이라고 하였다.

피봉을 만드는 법은 시험 종류에 따라 달랐다. 도련지를 사용하는 식년시, 증광시, 별시문과와 생원진사시는 시권의 오른쪽에 자신과 사조(四祖)의 인적 사항을 기재하고 세로로 3~4번을 접었으나 정시·알성시 등 정초지를 사용하는 시험은 오른쪽 하단에 자신과 부친의 인적 사항만 기재하고, 위로 접어 올려 봉하였다.

인적 사항을 기재하거나 피봉을 봉할 때에도 정해진 격식을 따라야 했다. 가령 생원진사시의 경우 관품(官品)을 쓰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성균관 시험은 관료라도 생원·진사와 같은 유생의 직명을 써야 했다. 이를 어기면 위격(違格)이라고 하여 합격이 취소되었다. 또 효종대부터는 피봉의 넓이를 대쪽처럼 좁게 만들도록 하였으며, 지나치게 넓은 경우에는 합격이 취소될 수 있었다(『효종실록』 2년 3월 28일).

시험이 끝나고 답안을 제출하면 답안을 10장씩 묶는 작축(作軸)의 과정을 거쳐 답안마다 제출순서를 가리키는 자표(字標)를 매겼다. 자표는 숫자와 축의 자호를 합한 것으로 1천(一天)·2천(二天)·3천(三天)과 같은 순으로 기재하였다.

그 뒤에는 채점을 위하여 답안과 피봉을 분리하는 할봉(割封)의 과정이 따랐다. 할봉은 문과에서는 조선초부터 시행하였으나 생원진사시는 1651년(효종 2)부터 시행하였다. 반면 문과 중에서도 정시·알성시·성균관 시험 등 정초지를 사용하는 시험은 처음부터 할봉을 하지 않았다. 할봉은 1873년(고종 10)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생원진사시는 할봉을 하면 바로 채점을 시작하지만 문과 시험의 경우 다시 답안의 사본을 작성하는 역서(易書)라는 과정을 거쳤다. 역서를 거친 답안은 본 시권을 ‘본초(本草)’, 사본을 ‘주초(朱草)’라고 하였는데, 채점은 주초로 진행하였다. 현존하는 시권은 응시자가 작성한 시권으로 본초에 해당되었다. 역서는 1835년(헌종 원년)에 폐지되었다.

작축·할봉·역서가 끝나면 비로소 시관들이 채점에 들어갔다. 성적은 일상(一上)에서 삼하(三下)까지의 9등급과 그 아래의 차상(次上)·차중(次中)·차하(次下)·원갱(圓更)·갱(更) 또는 무권갱(無圈更)·외(外) 등 여러 등급으로 기재하였다. 삼하일(三下一)·점삼하(點三下)·점차하(點次下)처럼 더 세분화한 경우도 있었다. 채점이 끝나면 합격 답안을 결정하고 본초를 찾아 등수를 기재하였다. 등수는 일지일(一之一)과 같이 기록하는데, 이것은 곧 1등의 제1인이라는 뜻이었다.

채점과 합격자 선정이 모두 끝나면 따로 보관한 피봉과 답안을 다시 합치는 감합(勘合)의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피봉을 열어 합격자의 인적 사항을 확인하였다. 할봉을 하지 않는 정시·알성시 등은 작축 후 바로 채점에 들어가는데 합격자를 결정한 후에 피봉을 열어 작성자를 확인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문과전시나 생원진사시 회시처럼 최종 합격자를 결정하는 시험에서는 각각의 표식을 붙였는데, 문과전시에는 붉은색의 종이인 홍첨(紅籤)을 생원진사시 회시에는 노란색의 종이인 황첨(黃籤)을 붙였다.

합격자를 발표하면 합격자에게만 자신의 시권을 돌려주었다. 나머지 불합격 답안은 낙폭지(落幅紙)라고 하여 시관(試官)이나 호조 등의 관서에 보내 재활용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과거등록(科擧謄錄)』
  • 박현순, 『조선후기의 과거』, 소명출판, 2014.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2000.
  • 조좌호, 『한국과거제도사연구』, 범우사, 1996.
  •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증보판-』, 지식산업사, 1989.
  • 김경용, 「조선조 과거제도 강서시권 연구」, 『장서각』 15,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 김동석, 「조선시대시권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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