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감(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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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에 국가와 왕실의 주요 의례·행사 및 국정 현안의 주관 등을 위하여 설치한 임시 관청.

개설

도감은 왕실에서 혼례, 책봉, 장례, 궁중 잔치, 궁궐 건축, 사신 영접, 존호 부여, 공신 책봉 등 주요한 의례나 행사가 있을 때 이를 관장할 목적으로 설치한 임시 관청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일생과 관련된 의례나 왕이 추진하는 행사가 다양했던 만큼 도감의 종류도 매우 많았다. 도감의 종류로는 태실도감(胎室都監)·책례도감(冊禮都監)·가례도감(嘉禮都監)·국장도감(國葬都監)·산릉도감(山陵都監)·진연도감(進宴都監)·영접도감(迎接都監)·부묘도감(祔廟都監)·추숭도감(追崇都監)·존호도감(尊號都監) 등이 있다. 도감의 종류가 다양한 것은 그만큼 왕실에서 주관하는 의례와 행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외에 공신도감(功臣都監)·녹훈도감(錄勳都監)·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노비추쇄도감(奴婢推刷都監)·영건도감(營建都監) 등 공신의 책봉, 성곽과 궁궐의 조성 등 국가의 주요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도감이 설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 ‘도감(都監)’을 검색어로 검색하면 5,955건의 사례가 나오며, 『고종실록』에는 653건, 『순종실록』에는 11건이 나온다. 그만큼 조선시대에는 도감의 설치가 빈번했다.

도감에서 왕에게 아뢰어야 할 일을 정리한 ‘도감사목(都監事目)’에 의거하면, 도감은 호조와 예조·중추부·사역원 등에 설치했다. 주요 의식이나 행사가 끝난 후에는 왕이 도감의 도제조(都提調)·제조(提調)·도청(都廳)·낭청(郎廳) 등에게 안구마(鞍具馬)·숙마(熟馬) 등을 상으로 주었다.

도감은 조선시대에 와서 성행하지만, 고려시대에도 국가의 주요 현안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고려시대에는 961년(고려 광종 12)에 궁궐도감이 처음 설치된 이후 정포도감(正布都監)·급전도감(給田都監)·교정도감(敎定都監)·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식목도감(式目都監) 등이 시대적 요청이나 정권의 정책 방향 의도에 따라 설치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시대에는 국가에서 필요한 중요 정책의 추진이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임시 관청인 도감을 설치하였다. 조선 왕실에서는 고려의 전통을 계승한 바탕 위에서 보다 체계적이고 연속성이 있는 도감을 설치하였다. 즉 국왕 혼례식, 세자의 책봉, 장례식, 진연, 존호 부여와 같은 정기적인 의례 이외에 궁중 잔치, 궁궐 건축, 사신 영접, 공신 책봉, 노비 추쇄 등 필요한 의례나 행사가 있는 경우 이를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하여 도감을 구성하였다. 의례나 행사가 상당히 유동적이었기 때문에 전임 관원을 배치하지 않고 겸직 관리를 두게 하였으며, 행사가 끝나면 도감은 해체되었다.

국가의 현안 해결을 위해 도감을 설치한 경우도 많았다. 태종대에 청계천 준설을 위해 개천도감(開川都監) 또는 개거도감(開渠都監)을, 세조대에 불경 간행을 위해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한 사례와, 효종대 노비 추쇄를 위해 노비추쇄도감(奴婢推刷都監)을 설치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행사 후에는 의례를 주관한 도감이 중심이 되어 행사의 전 과정을 의궤(儀軌)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참고하게 하였다.

조직 및 역할

고려시대 도감에 소속한 관원과 그 품계는 도감의 성격에 따라 달랐지만 주로 겸직이나 임시직의 성격을 띠었다. 관직으로는 별감(別監), 사(使), 판사(判事), 판관(判官), 부사(副使), 녹사(錄事), 중감(重監), 제조가 있었고, 실무를 추진하는 하급직으로는 기사(記事), 기관(記官), 서자(書者), 산사(算士) 등이 있었다. 태조대에는 도감의 인원 구성을 고려의 전통에 따랐다. 『태조실록』에 “개국공신도감(開國功臣都監)에 판관(判官) 2인과 녹사(錄事) 2인을 두었다.”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태조실록』 1년 윤12월 13일).

조선시대에도 도감의 소속 관원은 모두 겸임직이었다. 왕실의 의례나 행사가 부정기적으로 치러지는 만큼, 전임 관원을 두지 않고 주요 행사에 관원을 차출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도감의 총책임자는 도제조, 부책임자는 제조였으며, 이하 도청, 낭청, 감독관에 해당하는 감조관(監造官) 등을 임명하여 각자의 품계에 따라 겸직하게 하였다. 실무 이속(吏屬)으로는 산원, 녹사, 서리, 서사, 고직, 수직군사 등이 배치되었으며, 화원들은 행사 모습을 담은 반차도(班次圖) 제작에 참여했다.

도감의 총책임자인 도제조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등 정1품 관직에 있는 인물이 임명되었다. 국장도감이나 산릉도감의 책임자는 도제조 대신에 총호사(總護使)라 칭하였다. 제조는 판서나 참판급에서 임명되었는데, 가례도감의 경우에는 대개 예조 판서와 호조 판서, 병조 판서 3명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영건도감에는 공조 판서가 당연직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도감에서 도청은 의식과 행사를 주관하는 총본부의 역할을 했으며, 몇 개의 방으로 나누어 업무를 분장하였다. 가례도감의 경우에는 일방(一房), 이방(二房), 삼방(三房), 별공작(別工作), 수리소(修理所) 등으로 업무를 나누었다. 일방에서는 교명(敎命)의대(衣襨), 포진(鋪陳), 의주(儀註), 상탁(床卓), 궤(机), 함(函) 등을 담당했으며, 이방에서는 연여(輦轝)와 의장물을, 삼방에서는 옥책과 갑, 금보(金寶), 보통(寶筒) 등과 관련된 것을 맡았다. 별공작에서는 각 방에 추가로 지원할 것을, 수리소에서는 의식 과정에서 보수가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임시 건물을 설치하는 일 등을 맡았다.

국장도감이나 산릉도감은 보다 세밀하게 업무가 분장되었다. 국장도감에서는 도청을 비롯하여 일방, 이방, 삼방, 분전설사(分典設司), 분장흥고(分長興庫), 표석소(表石所), 우주소(虞主所), 별공작으로 나누어 업무를 처리했다. 산릉도감은 도청, 조성소(造成所), 대부석소(大浮石所), 소부석소(小浮石所), 노야소(爐冶所), 보토소(補土所), 수석소(輸石所), 별공작, 분장흥고, 번와소(燔瓦所) 등으로 업무가 나뉘었다.

도감의 주요 역할은 의궤 앞에 기록된 도감사목(都監事目)에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예를 들어 『가례도감의궤』의 앞부분에 기록된 도감사목에는, 도감이 설치되는 장소, 인원의 구성과 배치, 참여 인원의 업무 지침, 물품의 조달 등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도감에서는 왕이나 관련 관청에 문서를 올리거나 보내서 인원의 선발이나 물품 조달, 각종 업무의 분장에 관한 사항들에 대해 묻고 왕의 지침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였다.

의식이 끝나면 도감 관원들에게는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상의 내용을 보면 안구마, 숙마, 아마(兒馬) 등을 면급(面給)하거나 가자(加資)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변천

고려시대 처음 설치된 이래, 도감은 조선시대에 다양한 형태로 설치되어 그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고려시대 도감이 주로 국가의 현안이나 정책 해결을 위한 것이었다면,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통과 의례를 위해 설치한 경우가 많았다.

고려시대에 도감을 설치한 첫 사례는 961년에 궁궐도감을 설치한 것이다. 이어 군사들의 의복을 관장하기 위한 정포도감, 토지의 분급을 주관한 급전도감 등이 설치되었다. 문종은 국자감의 학칙 개정 등 행정 업무를 담당한 식목도감을, 무신 집권기에 최충헌은 권력의 안정을 위하여 인사 행정과 세정(稅政)을 담당한 교정도감을 설치하였다. 공민왕대에는 개혁 정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침탈한 노비와 토지를 가려내기 위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였다. 이 외에 고려시대에 설치된 도감은 연등(煙燈), 전함조성(戰艦造成), 농무(農務), 구급(救急), 전보(典寶), 쇄권(刷券), 습사(習射), 금살(禁殺), 화통(火筒), 무예(武藝)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 도감이 형성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유제(遺制)를 이은 도감, 궁궐이나 성곽의 축조를 위한 도감 등이 다양하게 설치되었다가 점차적으로 유교적 의례를 주관하는 도감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왕실의 일생에서 경하할 만한 의례, 죽음·추숭에 관한 사업을 추진한 도감은 전 시대에 걸쳐 설치되었다. 책례·가례·진찬·진연·진작·영접·국장·산릉·천릉·빈전·혼전·존호·존숭·추숭 도감 등이 대표적이다. 이 외에도 국가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녹훈·노비추쇄 도감 등이 설치되었다. 훈련도감(訓鍊都監)처럼 군사 훈련을 위해 임시로 설치했다가 상설 관청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도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392년(태조 1) 8월 2일 “공신도감을 설치하였다.”는 기록과 “도당(都堂)에서 대장도감(大藏都監)을 폐지하기를 청하였다.”고 한 것이다(『태조실록』 1년 8월 2일). 고려의 전통을 이어 건국 초기부터 공신도감을 설치했음과 함께 대장도감과 같은 고려의 유제는 폐지했음을 알 수 있다. 공신도감은 개국 공신을 포상하기 위하여 설치하였으며,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둔 것(『태조실록』 4년 윤9월 13일)은 서울의 성곽 설치를 주관하기 위해서였다. 초기부터 공·사노비에 대해 따로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한 것은 고려 공민왕 때의 사례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왕실의 장례 의식이나 혼례 의식과 관련하여 빈전도감이나 혼전도감, 가례도감이 가장 빈번하게 구성된다. 이것은 조선 초기에도 나타나는데, 1397년(태조 6)의 “신덕왕후의 장례를 지내고 혼전도감을 설치하였다.”는 기록(『태조실록』 6년 1월 3일)과 “가례도감을 설치하여 영삼사사(領三司事)이화·좌정승조준·우정승김사형·봉화백(奉化伯)정도전으로 제조를 삼았다.”는 기록(『태조실록』 6년 10월 6일)이 처음이다.

이 외에 『태조실록』과 『태종실록』 등 초기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대묘조성도감(大廟造成都監)·공부상정도감(貢賦詳定都監)·음양산정도감(陰陽刪定都監)·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관습도감(慣習都監)·경성수보도감(京城修補都監) 등도 나타난다. 이러한 도감은 이후에는 설치되지 않은 도감이어서 도감의 설치가 연속적이지 않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나타남을 알 수 있다. 『태종실록』에는 댐[堤堰]을 쌓는 것은 한재(旱災)를 대비하기 위한 중요한 일이므로, 도감을 세워 땅을 파서 둑을 쌓게 하고 고기를 기르자는 내용이 나온다. 빈객(賓客)의 때아닌 수요에 대비하여 민폐를 없애기 위해서였다(『태종실록』 9년 3월 22일). 여기에서, 필요한 경우 도감을 설치한 조선 초기의 사례를 엿볼 수 있다. 태종대에는 청계천 준설을 위해 개거도감 또는 개천도감을 설치하였으며, 세종대에는 왕실의 태(胎)를 모시기 위해 태실도감을 처음 설치하였다.

도감의 설치가 가장 활발했던 시대는 광해군대이다. 광해군대에는 궁궐 건축을 위해 영건도감을 자주 설치하였다. 영접도감은 광해군대에 가장 많이 나타난다. 이 외에 화기도감(火器都監)을 설치한 것도 특징이다. 이들 도감을 통해 광해군이 국방과 외교를 중시한 점과, 궁궐 조성을 통해 왕권을 강화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영조·정조대에는 봉원도감(封園都監)의 설치가 특징인데, 이것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와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원(園)으로 승격시킨 것에서 비롯되었다. 고종대에는 왕실의 존호를 올리는 사업에 치중했는데 이것이 도감을 통해 나타난다. 『고종실록』에는 존호도감에 관한 사례가 총 57건이 나온다.

한편 시대에 따라 도감의 명칭이 변하였다. 청계천 공사를 위한 도감을 개거도감으로 했다가 나중에는 개천도감으로 했다. 세자 책봉을 위한 ‘봉숭도감(奉崇都監)’은 ‘책례도감’으로, ‘궁궐도감’은 ‘영건도감’으로, ‘풍정도감’은 ‘진연도감’으로, ‘조묘도감(造墓都監)’은 ‘산릉도감’으로 바뀌었다. 비슷한 역할을 하지만 그 명칭이 다른 도감도 있었다. 존호를 올리는 의식을 주관하는 도감은 상호도감, 존호도감, 존숭도감으로 구분되며 왕실의 잔치 의식을 주관한 도감으로는 풍정·진연·진찬·진작 도감이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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