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실도감(胎室都監)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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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태실도감 |
한글표제 | 태실도감 |
한자표제 | 胎室都監 |
관련어 | 관상감(觀象監), 안태사(安胎使), 태실(胎室),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
분야 | 왕실/왕실문화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김지영 |
폐지 시기 | 조선전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태실도감(胎室都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41년 5월 13일 |
조선 전기에 왕실의 태실(胎室) 조성을 총괄한 임시 관서.
개설
왕의 태실을 새로이 조성할 때 설치하는 임시 관서로, 태실 후보지를 찾는 일부터 태(胎)를 안치하는 일, 그리고 태실 조성을 마무리한 뒤 이를 기록하는 일까지 담당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태실도감은 특별히 왕의 태실을 새로이 조성할 때 설치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태실도감을 설치한 예는 세종 대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1418년(세종 즉위년) 8월 14일에 예조에서 세종의 태실을 조성하기 위해 태실도감을 설치하여 길지(吉地)를 택할 것을 청하였다[『세종실록』 즉위년 8월 14일]. 이때 전례를 따라 설치할 것을 청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그 이전에도 왕실의 태실을 조성하기 위해 태실도감을 설치한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후에 태실도감을 따로 설치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조선 전기에는 원자나 원손 같은 왕위 계승자가 왕위에 오른 사례보다, 정종·태종·세종·성종 등과 같이 갑자기 왕위에 오른 경우가 많았다. 특히 조선 전기에는 왕실의 정치적 위상과 영향력을 지방차원까지 펼치는 계기로 태실을 조성하였으며, 큰 규모의 왕실 역사를 담당하기 위한 임시 관서로 태실도감을 따로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직 및 역할
왕실에서 태실을 조성할 때가 되면, 예조에서 왕에게 태실도감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다. 태실을 조성할 때 가장 중요한 사항은 태실에 적합한 좋은 땅을 선정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태실도감이 설치되면, 우선 풍수지리에 정통한 대신 가운데 1명을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로 임명하고 지방으로 파견해 좋은 땅을 찾도록 하였다. 태실 증고사는 왕의 태실지로 적합한 땅을 찾으면, 그 땅의 산수 형세도나 태실 산도(胎室産圖)를 그려 왕에게 직접 바쳤다.
1418년 8월 14일에는 예조에서 세종의 태실을 조성하기 위해 태실도감을 설치하기를 청하였고, 8월 29일에 전 대제학정이오(鄭以吾)를 태실 증고사로 임명하여 지방으로 파견하였다. 정이오는 경상남도 진주의 속현인 곤명(昆明)에서 태실에 적합한 땅을 찾아 그해 10월 25일에 태실 산도를 왕에게 바쳤다. 정이오는 세종의 태실지를 찾기 위해 태실 증고사로서 약 2개월 동안 지방에 파견되었던 것이다.
세종의 태실을 조성하기 위한 태실도감은 1418년 8월 중순에서 11월까지 약 3개월간 설치되었다가, 태실을 조성한 뒤에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태실도감의 제조를 맡았던 김자지(金自知)는 같은 해 12월 7일에 호조 참판으로 임명되었다[『세종실록』 즉위년 12월 7일].
오늘날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왕실의 장태(藏胎) 관련 의궤를 살펴보면, 태실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인원과 그 역할을 미루어 파악할 수 있다. 원래 태실도감의 경우, 조선 후기의 『장태 의궤』에 기록된 인원수보다 그 규모가 컸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참고할 만한 『태실도감 의궤』는 남아 있지 않다.
조선 후기에는 기본적으로 중앙에서 파견하는 관원으로 안태사(安胎使)·종사관(從事官)·서표관(書標官)·감역관(監役官)·배태관(陪胎官)·주시관(奏時官)을 각각 1명씩 선정하여 태실 조성 과정을 감독하게 하였다. 감역관은 중앙에서 파견한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태실을 조성할 지역의 지방관에게 맡겼다. 그리고 태실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물종들을 중앙과 해당 지방에 잘 분배하여 준비하도록 하였다.
변천
조선 전기에 왕실의 태실 조성은 왕실의 영향력을 경기도 이외의 지역에까지 미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 때문에 왕의 태를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 지역에 주로 안치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안태사가 태를 봉안하기 위해 각 지방을 지나갈 때마다 해당 지역의 백성들에게 왕실의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왕실 자녀의 태실을 조성하는 경우에도 조선 전기에는 한양에서 먼 지역을 선호했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한양에서 가까운 지역에 태를 묻도록 하였다. 1765년(영조 41)에 영조는 장태의 폐단을 지적하며, 태를 후원에 묻도록 조처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41년 5월 13일). 이와 같이 태실 조성이 지닌 정치적 의미가 감소함에 따라 조선 후기에는 별도로 태실도감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 대신 관상감에서 왕의 윤허를 얻어 담당 관원을 차출한 뒤 태실 조성에 관련된 일들을 총괄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 국립문화재연구소, 『국역 안태등록』, 민속원, 2007.
-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실의 안태와 태실관련의궤』, 민속원, 2006.
- 김호, 「조선 왕실의 藏胎 儀式과 관련 儀軌」, 『한국학보』29-2, 일지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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