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藏胎)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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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장태 |
한글표제 | 장태 |
한자표제 | 藏胎 |
상위어 | 왕실출산(王室出産) |
동의어 | 안태(安胎) |
관련어 | 태봉(胎峰), 태봉(胎封), 태실(胎室), 태실가봉(胎室加封) |
분야 | 왕실/왕실문화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김지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장태(藏胎)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현종개수실록』 11년 3월 19일, 『정조실록』7년 4월 27일 |
왕실 자녀의 태(胎)를 좋은 땅을 선정해 묻는 일.
개설
장태의 기원은 신라시대 김유신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대개는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양반 같은 특정 계층에서 태를 처리한 방식을 가리킨다. 특히 왕실에서는 자녀들의 태를 소중하게 보관해 두었다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지의 명당에 묻었다. 왕실의 장태는 출산 후에 태를 씻는 의식인 세태(洗胎)를 시작으로, 태봉(胎峰)의 선정, 태실(胎室)의 조성, 태를 태실에 안치하는 안태(安胎), 태신(胎神)과 토지의 신에게 드리는 제사 등 복잡하고 다양한 의례 절차로 이루어졌다.
내용 및 특징
장태는 일반적으로 출산 뒤에 배출되는 태를 땅에 묻는, 일종의 태 처리 방식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에서는 병원 출산이 보편화된 1980년대 이전까지 태를 불에 태우거나 물에 띄워 보내거나, 혹은 땅에 묻는 방식으로 처리하였다. 대개는 불에 태우는 방식을 선호했으며, 태를 땅에 묻는 장태는 계층적으로, 지역적으로 보편적이지 않은 특수한 방식이었다.
장태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김유신이 태어나자 그 부모가 오늘날의 충청북도 진천에 해당하는 진주현(鎭州縣)의 남쪽 15리에 태를 묻었고, 이 산을 태령산(胎靈山)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김유신의 태가 묻혀 있는 이곳을 신령하게 여겨 김유신의 사우를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태를 묻는 관습이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사이에 시작되었으며, 중국에는 없는 우리 고유의 풍습이라고 여겼다[『선조수정실록』 3년 2월 1일].
조선 왕실에서는 『태장경(胎藏經)』의 장태법을 따라, 좋은 땅을 가려 자녀들의 태를 묻었다. 태를 좋은 땅에 묻으면 태의 주인이 오래 살고 지혜롭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왕이나 원자, 원손과 같이 왕위를 계승할 자손의 경우, 조선 왕조의 흥망성쇠가 그 태에 달려 있다고 여겼다.
조선시대에 왕실의 장태는 여성의 출산과 동시에 배출되는 태를 버리지 않고, 정성스레 씻어서 궁궐 안에 임시로 보관해 두었다가 정해진 시기에 좋은 장소를 택하여 묻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했다. 태를 태실에 안치한다는 의미의 ‘안태’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하기도 하였다. 왕실의 장태는 출산 후에 태를 씻는 의식을 시작으로, 태봉의 선정, 태실의 조성, 태를 태실에 안치하는 안태, 태신과 토지의 신인 후토신(后土神)에게 드리는 제사 등 복잡하고 다양한 의례 절차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태실도감을 설치해 모든 장태 과정을 총괄하게 했으나, 조선시대 후기에는 관상감에서 왕실의 장태를 담당하였다. 왕실의 태를 묻는 장소가 주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지로 정해졌으므로, 태실의 조성을 감독하는 일은 지방관이 맡았다. 중앙에서는 안태사와 배태관 등을 지방에 파견했는데, 특히 안태사는 태를 궁궐에서부터 안전하게 호위하여 지방에 조성한 태실에 안치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장태는 여성이 출산한 뒤에 배출되는 태를 산실(産室)의 특별한 방위에 보관해 두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를 장태의길방(藏胎衣吉方)이라고 한다. 출산 후 3일째 되는 날, 잘 보관해 두었던 태를 의녀가 향온주(香醞酒)로 깨끗이 씻는다. 태를 씻은 뒤 태내 항아리에 넣어서 담당 관원에게 주면 그것을 다시 태외 항아리에 넣는다. 그런 다음 태의 주인 이름과 생년월일시를 적고, 담당 관원의 성명을 기록한 뒤 다시 산실에 보관해 둔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여자아이의 경우에는 3개월 안에, 남자아이의 경우에는 5개월 안에 태를 묻도록 하였다.
장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태를 묻을 장소를 선정하는 일이다. 왕실에서는 태실을 조성할 좋은 땅의 조건으로 높고 정결한 곳을 선호하였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들판 가운데 둥근 봉우리를 택하여 그 위에 태를 묻었다.(『현종개수실록』 11년 3월 19일) 이러한 이유에서 왕실의 장태지를 태봉(胎峰)이라고 불렀다.
왕실에서 태를 정결한 곳에 안치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선조의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명종의 뒤를 이어 선조가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신하들은 선조의 태를 좋은 자리를 골라 묻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먼저 강원도 춘천에 태봉을 정하고 태실을 조성하는 공사를 시작했으나, 그곳이 다른 사람의 태를 묻었던 곳임을 알게 되어 중단하였다. 다시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장태지를 정하고 터를 닦는데, 근처에서 작은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이때 태실 조성을 감독한 황해도관찰사구사맹(具思孟)은 작은 항아리 때문에 또다시 공사를 중단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공사를 마무리하려 하였다. 그러던 중 조정에 이 일이 알려지면서, 구사맹은 불경죄로 사헌부에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결국 선조의 태는 다시 깨끗한 자리를 골라 충청남도 임천(林川)에 안치하게 되었다.
변천
세월이 흐르면서 묻어야 할 왕실 자녀의 태가 늘어남에 따라 장태의 폐단이 지속적으로 지적되었고, 한양에서 먼 지역이 아닌 가까운 경기도나 강원도 지역에 태를 묻는 경향도 나타났다. 심지어 영조는 어원(御苑)에 왕실자녀의 태를 묻도록 하는 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정조실록』7년 4월 27일). 그리고 정조는 태를 묻기 위해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되는 안태사일행의 인원을 줄이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나 원손과 같은 왕위 계승자의 태는 가능한 한 1등 태봉지를 택하여 묻도록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왕위계승자의 태를 묻는 의식은 태의 주인 개인의 안녕뿐 아니라, 왕실 전체의 위상과도 관계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三國史記』
- 「列傳, 金庾信 上條」
- 국립문화재연구소, 『국역 안태등록』, 민속원, 2007.
-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실의 안태와 태실관련의궤』, 민속원,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