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실(産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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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실 여성의 출산을 위해 궁궐 안에 마련한 출산 장소.

개설

임신한 여성의 출산일이 가까워지면 머물던 처소 가운데 방 하나를 선택하여 산실로 정하였다. 산실이 결정되면 좋은 날을 택하여 산실청에 소속된 관원들이 산실 공간을 꾸몄는데, 이를 ‘산실배설(産室排設)’이라고 한다.

왕실의 산실배설은 크게 산실 벽에 산도(産圖)와 부적(符籍) 등을 붙이는 일과 산모가 해산할 자리를 만드는 일로 나뉜다. 산실을 배설한 다음에는 출산 후에 해산한 산자리[草席]를 걸어 둘 문에 못을 박고, 유사시에 산모와 신생아에 대한 응급 처치를 할 수 있도록 산실과 의관들이 머물 방을 연결하는 방울을 달았다. 출산 장소를 따로 정하고 산실을 꾸미는 과정에는 안전한 출산과 다산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내용 및 특징

왕비의 경우 시어소(時御所), 즉 출산 직전에 머물던 처소 가운데 방 하나를 산실로 정하였다. 어떤 곳을 산실로 할 것인지는 대령 의관(待令醫官)들이 하루 이틀 전에 직접 여쭙도록 하였다. 그와 더불어 산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령 의관과 의녀들이 숙직을 하는 방이 마련되었다. 이는 왕실 여성의 출산을 돕는 의료진들이 산모 가까이에 머물면서 출산 과정에서 일어날 급박한 상황에 대처하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왕비가 자녀를 출산할 때는 산실청(産室廳)이라는 임시 기구를 내의원 내에 설치하였다. 총책임자인 도제조와 그 이하 의관, 의녀 등으로 산실청이 조직되면 가장 먼저 산모의 출산 장소인 산실을 꾸몄다. 일상적인 생활 공간을 산모가 출산하기에 적합한 공간으로 바꾼 것이다. 산실을 배설하는 것은 의식의 순서를 적은 글인 홀기(笏記)를 참고하여 진행할 만큼 복잡하고 많은 인원이 동원되는 일이었다. 19세기 자료인 『산실청총규(産室廳總規)』는 왕실의 출산을 담당하는 내의원의 실무진이 활용한 안내서로, 왕실 출산에 필요한 절차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수록된 「배설시홀기(排設時笏記)」를 통해 산실의 배설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산실배설은 우선 관상감에서 좋은 날을 정하면, 그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정확하게 진행하였다. 산실을 꾸미는 데 참여하는 사람은 산실청의 세 명의 제조를 비롯한 사관, 승후관, 산실 의관, 별장 무관 등이었다. 이들은 흑단령을 차려입고, 차비문 밖에 나가 선다. 제조가 들어오라는 명을 내리면 별장 무관이 산실에 붙일 이십사방위자(二十四方位字), 산도, 최생부(催生符), 차지법(借地法), 안산실길방(安産室吉方), 장태의길방(藏胎衣吉方) 등을 싼 붉은 보자기를 받들고, 서원은 배설할 때 사용할 물건들을 넣은 시렁[架子]을 가지고 산실 앞 남쪽 뜰에 순서대로 선다. 그 뒤 대전 차지승전색, 당전 차지승전색, 산실 차지내관, 주시관(奏時官), 범철관(泛鐵官), 택일관(擇日官)이 함께 산실로 들어간다. 산실의 방위를 정한 다음 먼저 이십사방위자를 산실 북쪽 벽 위에 붙이고, 산도, 최생부, 차지법을 붙인다. 또 안산실길방과 장태의길방을 붙인다. 안산실길방에 가막쇠를 박고 산모가 출산할 때 붙들 고삐를 매단다.

산실의 배설은 준비한 것들을 방위에 맞게 정확히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래서 안전한 출산을 위한 방위를 그린 그림인 안산방위도, 즉 산도를 붙이고, 24방위를 가려 부적 등을 붙였다. 산모가 안전하게 해산하기 좋은 방향인 안산실길방과 출산 후에 배출되는 태를 보관하기에 적합한 방향인 장태의길방은 모두 해산할 달의 길한 방위로 정하였다. 따라서 출산이 지연되어 예정된 달을 넘길 경우에는 다시 새로운 달의 좋은 방위로 그 위치를 바꾸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산모가 해산할 자리를 만든다. 온돌에 먼저 황초를 펴고, 빈 가마니, 짚자리, 양모전(羊毛氈), 기름종이, 백마 가죽을 차례로 깔아서 산모가 해산하기 좋은 산자리를 마련하였다. 이때 백마 가죽은 머리가 안산실길방을 향하도록 하고, 꼬리는 장태의길방을 향하도록 한다. 이는 출산에 임박하여 산실에 들어온 여성이 누워야 할 방향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다. 또 백마 가죽 머리 위에 날다람쥐 가죽을 펴고, 머리 밑에 생모시를 깐다. 그리고 백마 가죽이 머리부터 꼬리까지 덮이도록 가장자리를 자른 빈 가마니를 깐다. 출산의 책임을 맡은 의관이 방 밖에서 북쪽을 향해 꿇어앉아 산자리를 빌리는 차지법을 세 번 읽고 물러나면 산실배설이 완료된다.

산실을 꾸밀 때 벽에 붙이는 최생부는 출산을 빨리 하도록 재촉하는 부적이다. 그리고 차지법은 말 그대로 땅을 빌린다는 뜻을 지닌 부적이다. 동서남북과 상하에 있는 신들에게 출산할 여성이 두려움 없이 편안하게 출산하도록 비는 차지법을 읽음으로써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려 한 것이다. 이처럼 주술성이 강한 부적들에는 붉은색을 사용한 반면, 산모가 해산할 산자리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물품들은 양기를 돋우는 흰색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해산할 자리에 까는 백마 가죽과 날다람쥐 가죽은 반드시 새 것, 정결한 것, 온전한 것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간단하게 “중궁전(또는 빈궁전)의 산실을 배설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선조실록』 29년 5월 22일, 『선조실록』 36년 2월 18일], 왕실에서 산실을 배설하는 과정에는 이처럼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의미를 지닌 물건들이 동원되었다.

변천

친영 제도가 정착되기 전 여성의 출산은 대개 혼인 후 거주 방식에 따라 자연스럽게 여성의 친가에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왕실의 경우, 왕과 왕세자를 포함한 직계 가족을 제외하고 다른 왕실 자녀들은 혼인을 하면 원칙적으로 궁궐을 나가서 사는 것이 관례였다.

왕실에서 출산이 허용된 여성은 왕비와 왕세자빈 등과 같이 왕위 계승자를 낳을 자격이 있는 여성으로 한정되었다. 대군의 부인이나 후궁들은 궁궐 밖 사가에서 출산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선조 이후부터는 후궁들도 궁궐에서 출산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선조의 후궁인 숙의 정씨가 난산으로 세상을 떠난 사건이 그 계기가 되었다(『선조수정실록』 13년 11월 1일).

선조의 새로운 조치로 인해 왕비와 후궁의 출산이 궁궐 내에서 함께 이루어졌고, 이는 왕실의 출산과 관련된 제도를 정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왕비의 경우, 출산 예정일 3개월 전에 산실청을 조직하고 그 뒤에 산실을 배설하였다. 후궁의 경우, 출산 예정일 1개월 전에 호산청을 조직하고 그 이후에 산실을 배설하였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산실을 꾸미는 데 필요한 물건들은 왕비와 후궁 모두에게 동일하게 제공되었다.

참고문헌

  • 『産室廳總規』
  • 김지영, 「조선 왕실의 출산문화 연구: 역사인류학적 접근」,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학위 논문, 2010.
  • 김호, 「조선후기 왕실의 산실 풍경」, 『조선의 정치와 사회』, 집문당,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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