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胎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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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실 자녀의 태를 봉안하기 위해 조성한 태실(胎室)이 위치한 산봉우리.

개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태(胎)를 묻기에 좋은 장소로, 높고 정결한 곳 가운데 둥그런 봉우리를 선호하였다. 그에 따라 왕실의 태실을 산의 정상에 조성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봉우리를 태봉이라 일컬었다. 태봉은 태의 주인인 왕실 자녀의 신분에 따라 세 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왕실의 태실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태봉 주변에는 금표를 세워 백성들이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태실이 있는 장소를 지칭할 때, 태봉을 ‘태를 봉한다.’는 의미의 태봉(胎封)과 함께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엄밀하게 구분하면, 태봉(胎封)은 태를 봉하여 태실을 조성하는 행위를 말하고, 태봉(胎峰)은 태를 묻기에 적합한 땅의 지형적 특징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두 가지 의미의 태봉을 엄격하게 구별하여 사용하지는 않았다(『성종실록』 24년 11월 12일, 『영조실록』 28년 11월 25일).

왕실에서는 태실을 조성할 좋은 땅의 조건으로 높고 정결한 곳을 선호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들판 가운데 둥근 봉우리를 택하여 그 위에 태를 묻어 보관하고, 이를 태봉이라 불렀다[『현종개수실록』 11년 3월 19일].

조선 왕실에서는 평소에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나 관상감 관원을 파견해 태실을 조성하기에 좋은 땅을 물색하여 기록해 두었다. 태봉은 1등 태봉, 2등 태봉, 3등 태봉으로 구분하였다. 태의 주인이 왕위 계승자인지의 여부에 따라, 그리고 왕비 소생인지 후궁 소생인지에 따라 태봉의 등급이 정해졌다. 따라서 원자와 원손은 1등 태봉, 대군과 공주는 2등 태봉, 왕자와 옹주는 3등 태봉 가운데서 선정하여 태를 묻도록 규정하였다[『선조실록』 35년 6월 25일].

그리고 왕실의 태실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태실 주변의 일정한 거리를 출입 통제 구역으로 설정하였다. 태봉은 누구의 것이냐에 따라 몇 등급으로 나누었고, 등급에 따라 금지 구역의 넓이도 달랐다. 왕의 태봉은 1등급으로 300보, 대군의 태봉은 2등급으로 200보, 왕자의 태봉은 3등급으로 100보로 정했다. 태봉으로 선정되면, 금표 안에 있던 집이나 밭들은 해당 주인에게 보상을 한 뒤 철거하였다. 그 뒤 태실 주위 사방에 금표를 세워서 백성들이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베는 행위를 금하였다. 또한 태봉을 관리하기 위해 태봉지기를 선발하여 철저히 보호하게 하였다.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해당 백성을 엄하게 처벌했을 뿐 아니라, 태봉 관리를 소홀히 한 태봉지기와 지방관도 함께 벌하였다.

변천

조선 후기에 인구는 증가하고 토지는 부족해지면서, 왕실 자녀의 태봉이 산 하나씩을 점유하여 민폐를 끼친다는 신하들의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1758년(영조 34)에 영조는 이와 관련하여 특별히 ‘태봉윤음(胎峰綸音)’을 반포하기도 하였다. 한 태가 산봉우리 하나를 차지하는 폐단을 지적했으며, 부모가 동일할 경우 왕실 자녀의 태를 같은 산등성이에 함께 묻도록 하였다(『영조실록』 34년 3월 24일).

참고문헌

  • 『增補文獻備考』
  • 국립문화재연구소, 『국역 안태등록』, 민속원, 2007.
  •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실의 안태와 태실관련의궤』, 민속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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