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경도감(刊經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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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1년~1471년 불경의 간행과 국역을 맡아보던 임시 관청.

개설

간경도감(刊經都監)은 조선 초 세조대에 불경의 간행과 국역을 관장하던 임시 관청이다. 세조는 유신(儒臣)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전의 간행을 추진한 대표적 인물이며, 15세기 불경 간행을 주도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언해본은 많은 시간과 정성을 요구하였으므로 언해나 구결 작업에 세조가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조는 대군 때부터 불교를 좋아하여 부왕인 세종의 불서 편찬 및 간인을 적극 도왔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찬탈을 속죄하고 불교에 심취하였다. 1457년(세조 3) 왕세자가 병으로 죽자 왕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친히 불경을 사성(寫聲)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장경 한 질을 비롯한 많은 불경을 찍었으며, 『법화경(法華經)』 등 여러 종류의 불경을 활자로 인출하기도 하였다.

1458년(세조 4)에는 신미(信眉)·수미(守眉)·학열(學悅) 등을 시켜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인출하여 각 도의 명산대찰에 분장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세조의 숭불 정책 구현을 위한 첫 사업이었다. 또한 1459년(세조 5)에는 유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국역 증보판 『월인석보(月印釋譜)』를 간행하였다. 이와 같은 간경(刊經) 사업의 경험을 살려 불경 간행을 국가사업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세조는 1461년(세조 7) 6월 왕권으로 간경도감을 신설하고 제도화하였다(『세조실록』 7년 6월 16일).

간경도감은 고려시대의 대장도감(大藏都監) 또는 교장도감(敎藏都監)의 기능과 역할을 모방하여 설치된 임시 기구로서, 불경의 간행과 훈민정음 창제에 따른 불경의 언해본 간행이 주요한 목적이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문예전고(文藝典故)」에 ‘간경도감은 세조가 나라 안의 전적(典籍)이 적은 것을 염려하여 널리 서적을 간행·반포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세조의 서적에 대한 애호가 간경도감 설치 배경에 깊이 반영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간경도감은 중앙에 본사를 두고 지방에 분사를 두는 이원적 체제를 갖추었다. 현재까지 간경도감 인본에 나타난 간기(刊記)를 보면, 상주목·안동부·전주부·진주목·남원부·개성부에 분사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관직은 설치 당시 도제조·제조·사(使)·부사(副使)·판관으로 구성되어 의정부의 우의정급이 도제조에, 판서 등이 제조에 임명되었고, 한 직책에 복수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전하는 여러 간경도감본에 보이는 관직자 명단을 살펴보면 제조 밑에 부제조라는 관직을 더 두는 등 관직자의 구성과 수가 일정하지 않다. 또 간경도감에 정식으로 소속된 관원 외에 한시적으로 서사자(書士者)와 여러 장인(匠人)이 소속되었다.

현전하는 간경도감본에는 강희안(姜希顔)·송환종·안혜·정난종(鄭蘭宗) 등 당대의 명필가들이 서사를 담당한 기록이 있고, 또 간경도감이 11년 이상 존속한 기구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서사자가 동원되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장인은 목판에 글을 새기는 각수(刻手), 인쇄를 맡은 인출장(印出匠), 장책(粧冊)을 맡은 책장(冊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에 많은 수의 장인이 요구되었다. 전체의 인원에 대해서는 시기에 따라 또 사업의 규모에 따라 유동성이 있었지만, 처음에 계획했던 것보다 대체로 많은 규모의 관원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간경도감 간행본 국역 불서 중 초간에 해당하면서 참여 관직자의 성명이 온전히 전하는 문헌을 중심으로 참여 인원수를 살펴보면, 1462년(세조 8)의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에 24명으로 도제조 3, 제조 7, 부제조 5, 사 4, 부사 2, 판관 3, 1463년(세조 9)의 『법화경언해(法華經諺解)』에 19명으로 도제조 2, 제조 8, 부제조 2, 사 5, 부사 2, 1464년(세조 10)의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에 20명으로 도제조 1, 제조 8, 부제조 2, 사 3, 부사 4, 판관 2, 『반야심경언해(般若心經諺解)』에 20명으로 도제조 1, 제조 8, 부제조 2, 사 3, 부사 4, 판관 2, 1465년(세조 11)의 『원각경언해(圓覺經諺解)』에 20명으로 도제조 1, 제조 9, 부제조 1, 사 5, 부사 3, 판관 1명이 동원되었다.

즉 한 경전의 언해에 대체로 20명 내외의 인원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실록의 기사에 간경도감에 동원된 역부(役夫)와 장인의 수가 170명에 달한 적도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간경도감은 고려 때 한역 『정장(正藏)』과 『교장(敎藏)』을 간행하기 위하여 설치한 대장도감과 교장도감을 본으로 삼았으며, 그중에서도 대각 국사의천(義天)이 『교장』을 수집하여 판각한 사적을 본받은 것이 많다. 이는 한문본으로 간행된 간경도감본의 대부분이 『교장』의 번각본(飜刻本)으로 인쇄된 것에서 알 수 있다.

간경도감은 한문본과 언해본을 포함한 불서의 간행을 주요 업무로 삼았는데, 특히 당시 긴요하게 요구되던 불서는 대각 국사의천이 주도한 『교장』이었다. 즉 정장경인 팔만대장경은 경판이 해인사에 완전하게 보존되고 있었고, 또 1457년~1458년 팔만대장경을 50건이나 인출하여 전국의 사찰에 분치해 두었으므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장경을 더 이상 간행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교장』은 당시 전하는 간본이 적었으므로 중수를 통해 이를 더욱 보급하여야 했다. 또 훈민정음 창제 이후 언해본의 간행도 긴요한 실정이었다. 따라서 간경도감의 불서 간행 사업은 『교장』의 중수와 불서의 언해가 주 대상이었다.

간경도감은 한문본 불경으로 1461년 중앙의 본사와 지방의 분사에서 『금강경소개현초(金剛經疏開玄抄)』를 비롯하여 많은 불경을 간행하였는데, 목판을 새로 새기기도 하고 전래하던 책판을 중수하기도 하였다.

간경도감의 언해본은 모두 세조 연간에 간행되었다. 1462년의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을 시작으로, 1463년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1464년의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 1465년의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1467년(세조 13)의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사법어(四法語)』 등의 언해본이 간행된 것이다.

간행을 위해 수집된 불서들은 독자적으로 정서본을 마련하거나 교감 작업을 끝낸 뒤 중수하여 간행하였다. 언해나 구결 작업에 세조가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1464년 간행된 『금강반야바라밀경』에서도 알 수 있다. 곧 『금강반야바라밀경』은 세조가 친히 구결하고‚ 한계희(韓繼禧)가 언해하였으며‚ 판교종사 흥덕사 주지 해초‚ 회암사 주지 홍일‚ 전진관사 주지 명신‚ 전속리사 주지 연희‚ 전만덕사 주지 정심과 효령대군(孝寧大君)이 교감을 담당하는 등 20명이 참여하여 완성한 것이었다.

<표-1> 간경도감 국역 불서 언해본 목록

<표-2> 간경도감 한문 불서 목록

간경도감에서 이루어진 불경의 간행 사업과 관련하여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정리해보면 한문본과 언해본으로 대별된다. 이 중에서 언해본은 기존에 10종으로 알려졌는데 최근 국어학계에서는 초간본 『몽산화상법어약록(蒙山和尙法語略錄)』을 한글 독음의 표기, 구결에 쓰이는 방점, 번역의 배열 방식 등이 일반적인 간경도감본과 다른 점 등을 근거로 간경도감 이전의 간본으로 보고 이를 간경도감본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한편 간경도감이 설치되어 있던 시기에 불경의 간행이 간경도감에서 목판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즉 1465년에는 교서관(校書館)에서 을유자(乙酉字)로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을 인쇄하는 등 전문 인쇄 기구를 이용하여 금속 활자로도 불경을 인쇄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당시 불경 간행 사업의 다원적 체계를 확인할 수 있다.

간경도감은 불경의 간행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초기의 간경 목적에서 점차 확대되어 불교에 관계되는 일을 주관하였으며, 전 불교계를 통괄하는 불교 통제 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즉 명승과 거유(巨儒)를 초빙하여 불경을 국역하고 교감하여 간행하는 일을 주요 사업으로 삼았지만, 그 밖에도 불서를 구입 또는 수집하고, 왕실에서 실시하는 불사와 법회를 관장하였으며, 때로는 고승을 접대하는 일까지 맡아보았다. 이는 숭유억불을 주장하는 유신들이 반대 상소를 올리는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변천

애초에 간경도감은 불경 간행을 위한 임시 기구로 설치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이 숭유억불 정책을 기치로 건국된 탓에 그 운명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설립 초기와 세조 당대에는 의욕적으로 간경 사업을 펼쳤으나 세조 사후 예종대를 거치면서 점차 쇠퇴 일로를 걸었다. 성종대에 와서 도첩(度牒)의 남발로 인한 군액의 감소와 서적 구입과 대규모 간행 사업으로 인한 국고의 낭비 등이 심해지자, 이를 명목으로 한 유자(儒者)들의 반대 상소가 거듭되었고, 결국 1471년(성종 2) 12월 간경도감은 폐지되었다.

의의

간경도감은 조선초기 불경 간행 사업에 중심 역할을 수행한 임시 기구로서, 간경도감 간행본 가운데 문화재로 지정된 불경이 국보 1건, 보물 35건, 시도유형문화재 2건 등에 이를 정도로 가치 있는 문화유산을 창조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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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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