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衣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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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을 비롯하여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 등의 복식을 높여 부르는 말.

개설

의대는 왕실의 복식을 높여 부르는 말인데, 특히 왕과 왕비,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옷을 일컫는다. 그 이하 숙의(淑儀), 대군(大君), 왕자(王子), 공주(公主), 옹주(翁主) 등의 옷은 의복이라고 한다.

연원 및 변천

1402년(태종 2) 태상왕에게 의대를 올렸다(『태종실록』 2년 10월 10일). 살아 있는 왕이나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에게 올린 옷을 의대라고 하지만, 돌아가신 분의 옷도 의대라고 하였다. 1659년(현종 즉위) 효종이 돌아가시자 예문에 이르기를, 3일이 되어야 염을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난처한 일이 있으면 앞당겨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자주 들어가서 봉심하라고 하였다. 이에 들어가 살펴보니 낮이 되니 새벽녘과 달리 입은 의대가 점점 꽉 째이게 보였다고 하였다[『현종실록』 즉위 5월 5일 6번째기사]. 여기서 의대란 아직 소렴을 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습의를 일컫는다. 왕이 착용하는 습의는 평일에 입었던 것을 사용하므로 이때 복식은 곤룡포(袞龍袍)에 해당한다.

또한 1600년(선조 33) 왕에게 뜸을 뜨거나 침을 놓아야 하는데 일기가 추워 침을 놓을 때 의대를 벗게 하는 것이 매우 미안스럽다고 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의 의대는 연거복(燕居服)을 의미한다(『선조실록』 33년 1월 20일). 이처럼 의대는 왕의 옷을 높여 부른 말인데, 살아 계실 때 입은 옷도 의대이고 돌아가실 때 입은 습의도 의대이다.

의대의 범위는 옷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상방정례(尙方定例)』를 살펴보면, 탄일 진상에 의대로 솜가문랄, 솜첩리, 솜과두, 삼아, 겹바지 등을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옷을 만들 때 필요한 옷감과 실, 종이, 솜 등이 진상 물목에 포함되어 있어 의대의 의미가 완성된 옷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대렴(大殮) 때 사용한 의대는 백방사주(白紡絲紬) 횡교(橫絞)·백방사주 장교(長絞)·다홍금선(多紅金線) 이불·자적향적(紫的鄕織) 요·다홍운문단 곤룡포 조복(多紅雲紋緞袞龍袍朝服)·초록운문단 답호(草綠雲紋緞褡𧞤)·보라공단 장의(甫羅貢緞長衣)·두록공단 장의(豆綠貢緞長衣)·옥색공단 장의(玉色貢緞長衣)·구의(柩衣) 등으로 시신을 묶는 끈인 교, 이불, 요, 관을 덮는 구의 등을 포함한 것으로 보아 옷감도 의대였음을 알 수 있다(『영조실록』 52년 3월 9일). 이는 왕비와 왕세자 등의 의대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의대의 의미는 옷뿐 아니라 좀 더 확대 해석하여 옷을 만들기 위한 옷감과 관련 재료 등을 모두 포함한다. 그밖에 1800년(정조 24) 소렴(小殮) 의대에 사용된 의복을 보면, 강사포(絳紗袍)·상의하상·원유관을 포함하여 아청운문단 곤포·보라화주갑 장의·남광직 도포·아청운문대단 철릭 등을 사용하였다(『정조실록』 24년 6월 29일). 1834년(순조 34) 대렴의 의대를 면복(冕服)으로 정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일상복뿐 아니라 법복으로 착용하였던 면복·강사포 등을 말할 때에도 ‘의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순조실록』 34년 11월 17일). 따라서 의대는 왕실에서 입는 옷 전체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상방정례(尙方定例)』
  • 이민주, 「『상방정례』의 편찬과정과 특징-왕실복식의 절용을 중심으로」, 『장서각』27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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