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차도(班次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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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가 의례에 동원되는 관원과 시위 군사, 가마류와 의장을 정해진 순서대로 나열한 그림.

개설

국가 의례에 예모(禮貌)와 위의를 갖추기 위해 의식 전의 예행연습[習儀]이나 의식 당일 반차를 숙지시키고 검칙하기 위한 용도로 제작된 노부도(鹵簿圖)이다. 반차는 관원들의 품계 또는 반열의 차례를 뜻한다. 반차도(班次圖)는 형태별로 보면, 왕에게 하례하는 조하나 궁중 연회인 진연같이 의식을 거행하는 의례 공간에서의 반차를 나열한 배반도(排班圖) 형식과 장례 때의 발인반차도와 같이 열을 지어 나아가는 행렬식 반차도 등이 있다. 표현 방식에 따라 글자로 시각화한 자도(字圖) 형식과 그림으로 표현한 회화식 반차도로 나뉜다. 자도 형식에서 사람과 가마류 등 기물을 그림으로 대체하여 시각성을 강화하고 옆에 글자를 작게 부기(附記)한 회화식 반차도로 발전해나갔다.

현전하는 의궤는 임진왜란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국장·능원 천봉·부묘·가례·책례·추숭 등 반복되는 의례 시에 참고하기 위해 회화식 반차도들이 수록되어 있다. 18세기 영조~정조 연간에는 반차도를 제작하여 활용하는 의례의 종류가 크게 확장되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표현이나 행렬상의 변화 없이 전대의 형식을 상투적으로 따르는 경향을 보인다. 1908년 이후부터 일제강점기에는 회화식 반차도가 문반차도(文班次圖)와 같은 자도로 약식화하였다.

내용 및 특징

의궤 반차도에 표현된 행렬은 의례마다 달랐다. 국장 시의 발인반차도는 빈전에 모셔져 있던 혼백과 재궁, 책보류와 부장품 등을 가마에 봉안하여 산릉으로 배진해 가는 행렬을 그린 것이다. 부묘 의례의 반차도는 혼전에 모시던 책보류와 신주를 담제(禫祭) 후 종묘로 봉안해 가는 신주예종묘(神主詣宗廟) 행렬을 그린 것이다. 능원 천봉 시에는 발인반차도에 준하여 편성하되, 길의장 행렬에 책보류와 신련 대신 종이에 사자의 이름을 쓴 지방(紙牓)을 연에 모셨다. 가례 반차도는 별궁에서의 친영례 후 동뢰연을 위해 입궐하는 신부의 예궐(詣闕) 반차도가 제작되다가 1759년 영조와 정순왕후의 가례 때부터 친영 행렬이 더해졌다. 책례 반차도는 책례에 필요한 비물전책(備物典冊)인 교명·책·인, 왕세자의 연과 의장 등을 제작하여 대궐로 내입하는 행렬을 그린 것이다. 정조 때부터 등장하는 존숭 또는 추숭 의례의 반차도는 존호 또는 추상존호의 책보를 제작하여 대궐로 내입하거나 존호를 올릴 대상자 혹은 신주가 있는 곳으로 배진해 가는 행렬을 그린 것이다.

반차도의 구성은 중앙 열에 양산(陽繖)과 청선(靑扇) 같은 중요 의장, 의례 주인공의 책보, 재궁과 신주 혹은 당사자를 모신 가마류, 담당 차비관을 배치하고, 상하 열에 의장기·인로인(引路人)·내시 등 시위 관련 사항을 배치하는 삼단 구성으로 되어 있다. 중앙 열의 인물은 후면에서 본 시점[後面觀]으로 전방을 향해 엎어진 모습으로 그리고, 가마류는 측면에서 본 시점[側面觀]에 단면 혹은 입체형으로 묘사되며, 상하 열의 의장기 담지군과 시위 군사들은 중앙 열을 향해 엎어진 측면관으로 묘사되었다. 여러 시점에서 본 행렬을 삼단 구성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중앙 열 좌우에 의장 및 시위 군사를 배치하는 실제 행렬을 반차도로 시각화할 때 취한 기본 형식이었다.

반차도는 17세기 중엽까지 간략한 필치로 자유롭게 묘사되다가 1659년 효종 발인 때부터 상(像)을 유형화하고 삼단 구성을 정연하게 갖추어 화면을 정돈하였다. 이어 상을 도장처럼 새겨 찍고[印刻] 모자와 의장기 같은 지물(持物)을 추가하여 그려 넣은 뒤 채색하여 완성하는 인각채색법(印刻彩色法)을 도입하였다. 1661년 효종 부묘 때의 의궤에서부터 쓰인 이 기법은 반차도의 수준과 제작력 향상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정연한 구성을 갖추어 일목요연한 행렬 파악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후 인각채색법은 반차도의 독자적 제작법으로 자리하였다.

변천

(1) 조선전기

조선전기의 반차도는 『국조오례의서례』에 수록된 자도 형식의 「배반도」들이 주로 확인된다. 「정지급성절망궐행례지도(正至及聖節望闕行禮之圖)」, 「황태자천추절망궁행례지도(皇太子千秋節望宮行禮之圖)」, 「근정전정지탄일조하지도(勤政殿正至誕日朝賀之圖)」, 「근정전정지회백관지도(勤政殿正至會百官之圖)」, 「근정문조참지도(勤政門朝參之圖)」가 있는데, 정전인 근정전에서 백관이 모여 국가적인 의식을 거행할 때 반차의 법식으로 활용된 것이다. 한편 예종의 국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작된 발인반차도가 행렬식 반차도의 예로는 유일하다(『성종실록』 1년 1월 22일).

(2) 17·18세기 선조~경종대

이 시기에는 임진왜란 후의 국정 현안과 기본적인 국가 전례 위주로 반차도가 제작되었다. 선조와 광해군대에는 국난을 극복한 선조에 대한 존숭 의례와 선조 국장에 부물(賻物)을 가지고 온 명(明) 사신의 조문 행렬이 반차도로 제작되었다. 이후 인조대부터 국상·부묘·능원 천봉 등 흉례, 가례, 책례 등의 전례를 행하면서 반차도가 제작되었다. 이 시기 국왕의 발인반차도와 부묘 의례 반차도에는 청(淸)으로부터 받은 고명(誥命)을 진열하지 않아 명 멸망 후 변화된 국가 의례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이 시기 반차도는 시위 군사가 일렬횡대로만 표현되고 차비관(差備官) 행렬이 생략되는 등 간략화한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의장기 담지군의 경우 대·중·소 깃발의 크기에 따라 각각 3·2·1인이 든 모습으로 구분되었다. 또한 인물은 이목구비나 움직임이 묘사되지 않고 윤곽선 위주로 단순하게 처리되었다. 17세기 중엽 이후 반차도의 정비와 함께 중앙 열의 가마류는 사각형의 단면으로 묘사되고 가마채를 ‘井’ 자처럼 수직 수평의 구도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여사군은 정자형 구도에 맞춰 앞쪽 인물은 앞에, 뒤쪽 인물을 그 위에 층층이 포개어놓는 공간구성법을 취하여 이차원적 평면도와 같은 특징을 보인다. 한편 어람용 의궤의 반차도는 행렬 구성과 공간구성법은 동일하되, 인각채색법을 쓰지 않고 세밀하게 필사하여 완성하였다.

(3) 18세기 영조~정조대

이 시기에는 예제(禮制) 및 노부·의장 제도의 정비와 함께 전정에서의 의식이나 거둥 시 국왕의 시위와 관련한 절차들이 대폭 정비되고 국가 의례에서 반차도의 활용 영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기본 전례 외에 선대왕의 어진(御眞) 봉안, 종묘의 신주 이안(移安), 존숭 의례에서 반차도가 새로이 제작되었으며, 살아 있는 국왕의 행렬이 반차도로 시각화되기 시작하여 1795년 화성 원행을 계기로 독자적인 행렬도로 발전하였다. 또한 국왕이 중시한 의례에서 관원용으로 분아(分兒) 반차도가 따로 제작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 반차도는 의례에 대한 국왕의 통제권을 행사하는 수단으로 기능하여 국가 의례에 예모와 위의를 더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시기 반차도는 행렬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반차를 분명히 드러내는 경향을 보인다. 새로 제작되는 의례의 반차도를 중심으로 일렬횡대로 묘사되던 시위 군사들이 3대(隊)로 작대(作隊)한 부대로 묘사되고 가마마다 배진하는 차비관들이 도시(圖示)되었다. 또한 의장기 담지군도 대·중·소 깃발의 크기별로 숫자를 달리하지 않고 1인으로 통일되었다. 구성에서는 다시점의 삼단 구성을 유지하면서 중앙 열의 가마를 입체형으로 묘사하고 가마채와 여사군을 평행 사선 구도로 배치하여 사실적인 공간감을 드러내었다. 중앙 열 가마 묘사에서 보이는 공간감은 17세기 의궤 반차도의 평면적인 표현 경향과는 다른 18세기적 특징이며 중엽부터 전체 의궤 반차도에 적용되었다. 어람용 의궤의 반차도는 후반으로 가면서 인각채색법을 더 많이 활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4) 19세기 순조~고종대

이 시기에는 세도정치와 수렴청정으로 대표되는 시대적 특징이 반차도에 드러나 있다. 왕실 어른을 존숭·추숭하는 의례가 빈번하게 거행되면서 잔치 현장의 반차도 즉, 진작·진찬 반차도와 존숭·추숭의 책보 행렬의 반차도 비중이 높아졌다. 또한 국왕의 친영 행렬에 대규모 군병을 동원하여 왕실과 왕권의 위엄을 드러냄에 따라 가례 반차도에서 시위 군사의 면수가 크게 늘었다. 가례 반차도의 시위군 표현은 발인반차도에도 영향을 주어 전반적인 면수(面數) 증대를 가져왔다. 그리고 후반으로 가면서 팔인교를 탄 상궁 행렬, 왕의 가례에 참여한 국왕의 생부 생모 행렬 등 변화된 의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반차도의 제작에서는 19세기 초부터 분상용 의궤 반차도의 윤곽선이 목판(木版) 판곽(版廓)으로 대체되고 어람용 의궤도 인각채색법으로 제작되어 상투화 양상을 보인다. 표현 면에서는 1830년대 들어 인물이 약간씩 커지면서 이목구비가 묘사되고 비례가 적정해지는 등 조형적 완성도가 높고 한층 세련된 상들이 제작되었다. 또한 각종 깃발과 의장물을 인각으로 제작하고 만장과 만장군도 일체형으로 인각하였다. 중앙 열의 가마채와 여사군을 포치하는 방식은 18세기 중엽 이래의 평행 사선식 구도를 따랐지만 인물의 신체 비례나 사물 간의 비례가 적정하고 여러 동작들을 포괄한 일체형 인각을 통해 좀 더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화면이 구성되었다. 이것이 18세기 반차도에 비해 세련된 19세기적 표현 경향이다. 한편 19세기 후반 철종~고종대에는 주로 전대의 조형을 답습하여 의궤 반차도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하락하였다. 그럼에도 고종대 왕권 강화 움직임과 궤를 같이하여 왕권과 왕실의 성세(盛勢)를 기록하려는 의도에서 일련의 행행도들이 제작되었다.

(5) 대한제국기~일제강점기

대한제국기는 황제국으로 국격이 바뀌면서 새로운 의장과 군제 및 관제가 반차도에 반영되었다. 의례 면에서는 황제국 선포와 관련한 대례, 명성황후 국장, 선대 황제들의 어진 제작과 관련한 반차도에 큰 비중이 두어졌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당시에는 기존의 의장과 가마의 색깔을 황색으로 바꾸어 사용하였고 명성황후 발인 시에 황후의 의장과 봉여(鳳輿) 등을 마련하였다. 삼각형·원형·방형으로 된 대한제국의 새 의장은 1901년 고종 탄생 50주년 기념 진연 이후 황제·황태자·황태자비·황비 등 주요 황실 성원을 중심으로 정비되었을 뿐 전반적인 제도적 정비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하였다. 한편 관원 및 시위군의 복색은 모두 근대식 바지와 상의, 모자 차림으로 바뀌었으나 인각의 조형 수준은 그다지 높지 못하며 그 외에는 대부분 전대의 조형을 차용하였다. 도화서 해체 이후 제도적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조형적인 발전을 꾀할 여력이 없었던 사정을 보여준다. 한편 순종대인 1908년부터 일제강점기에는 국력의 쇠퇴와 함께 회화식 반차도가 더 이상 제작되지 않고 자도인 문반차도로 약식화하였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 『순조무자진작의궤(純祖戊子進爵儀軌)』
  •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
  •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
  • 제송희, 「18세기 행렬반차도 연구」, 『미술사학 연구』 273, 한국미술사학회, 2012.
  • 제송희, 「조선시대 의례 반차도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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