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친(私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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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입후(立後)하여 즉위하거나 후궁 소생으로 즉위한 왕의 친부모 또는 왕비와 후궁의 친부모.

개설

주자학은 부계위주(父系爲主)의 친족조직에 바탕을 둔 정치·사회사상이었다. 따라서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주자학의 윤리가 명실상부하게 시행되기 위해서는 부계위주의 친족조직이 확립되어야 했다. 주자학에서 강조하는 이성혼(異姓婚)도 부계위주의 친족조직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한국사에서 명실상부한 부계위주의 친족조직은 조선 건국 이후에나 가능했다. 삼국 시대와 통일신라 시대 및 고려 시대에는 부계와 모계가 다 같이 중시되는 양측적(兩側的) 친속제도가 온존하였으며, 동성(同姓) 친족 간의 족내혼도 빈번하였다. 고려 시대의 경우 대부분의 친족집단은 거주지와 본관이 일치하였으며, 각 지역의 토성(土姓)들은 동성동본(同姓同本) 간의 혼인이나 딸자식을 주고받는 교환혼(交換婚)의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한 혼인의 경우 사위가 장인의 집에서 처가살이 하는 솔서제(率壻制)가 흔하였고, 여성들의 재혼도 관념상이나 제도상으로도 금기시되지 않았다. 이 같은 친족제도에서는 적서(嫡庶)의 차별이나 처첩(妻妾)의 차별이 별로 없었으며 가문을 계승하기 위한 양자제도나 입후제도 역시 없었다.

조선왕실의 경우 나라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면에서 주자학에 입각한 친족제도와 친족윤리를 솔선하여 실천하게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왕실에서의 족내혼은 물론 왕실 이외에서의 동성혼도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조선 건국 후 부계혈연 가족제도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가문을 계승하기 위한 양자제도 또는 입후제도가 확산되었고, 그 결과 입후된 사람과 그 사람의 친생 부모 즉 사친에 관한 의례문제가 중요시되었다. 아울러 혼인한 여성의 사친에 관한 의례문제 역시 중요시되었다. 이 같은 사회적 현상이 왕의 사친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 시대에 사친에 관련된 핵심 개념 및 의례는 『주자가례』상례(喪禮)의 “남의 후사가 된 남자나 시집 간 여자는 그 사친을 위해 모두 상복을 한 등급 내리고, 사친도 역시 그렇게 한다.”는 규정이었다. 이 규정에 의하면 사친은 입후되어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의 친부모 또는 시집 간 여자의 친부모를 지칭한다. 양자가 된 남자는 양부모를 위해서는 정복(正服)의 상복을 입지만, 정작 친부모를 위해서는 상복을 한 등급 내려 입는데, 이는 자신의 친부모보다는 자신을 양자로 들인 부모를 우선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시집 간 여자 역시 시부모를 위해서는 정복의 상복을 입지만, 친정 부모를 위해서는 상복을 한 등급 내려 입는데, 이 역시 자신의 친부모보다는 시부모를 우선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조선건국 이후 유교문화의 확산으로 부계 혈연가족이 더욱 확대되고, 조선 중기까지도 유지되던 자녀간 균분(均分) 상속과 윤회 봉사(輪回奉祀)가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장자(長子) 위주의 재산상속과 종가(宗家) 위주의 제사상속 문화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대체로 봉사조(奉祀條)전민(田民)의 장자에의 계승과 관련하여 나타나는데, 이 결과 봉사조 전민은 종가의 세거지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게 되었고, 또 덧붙여 세거지 주변의 전민을 종가에서 대대로 물려받음으로써, 종가 일대의 전민 대부분을 종가가 차지하게 되었다. 18세기 이후 종가를 중심으로 지차(支次) 자손들이 모여 취락을 형성하는 동족부락 역시 이런 과정에서 생겨났다. 이런 맥락에서 조선 후기 족계나 동계 등의 결사 역시 한 동리에 거주하면서, 봉사하는 선조가 동일한 사족의 후예를 중심으로 결성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입후(立後)하여 즉위하거나 후궁 소생으로 즉위한 왕에게 사친 문제는 왕권의 정통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의 왕들은 의례 추숭을 통해 사친을 왕이나 왕비 또는 그에 버금가는 존재로 만들곤 했다.

물론 왕의 사친 추숭은 조선 전기에도 있었다. 예컨대 성종의 사친인 의경세자, 선조의 사친인 덕흥군 등에 대한 추숭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의경세자의 추숭이나 덕흥군의 추숭은 왕권의 정통성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그에 비해 조선 후기에는 부계위주의 친족조직 확립과 주자학의 보급에 따라 왕의 사친 추숭이 곧 왕권의 정통성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사안으로 간주되었다. 그 같은 사례를 잘 보여주는 것이 인조의 사친 추숭이었다.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자 정원군의 장자였는데,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인조는 왕의 아들이 아니라 왕의 손자로서 왕이 되었다. 이에 인조는 생부인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였는데, 원종 추숭에는 인조반정 직후의 여러 정치적 동기와 정파의 대립이 함께 개재해 있었다. 반정으로 즉위한 인조의 입장에서는 추숭을 통해 종법적(宗法的) 정통성을 확립하면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왕권의 강화를 이룩해 나가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반면 신료들의 입장에서는 유교적 명분과 원리를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견제하려는 전통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일부 훈척들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은 왕권에 기생하여 왕권을 높임으로써 자신들의 특권을 지속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고, 대다수 사림계의 관료들과 학자들은 선명성을 강조하는 도학정치의 여러 원칙들을 들고 공론을 무기로 하여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원종이 추숭되기까지 12년 간의 논쟁을 겪어야 했다. 원종이 추숭됨으로써 예학적으로 『주자가례』 중심의 보편주의 예론이 전통적 분별주의 예론을 압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인조의 왕실권위와 왕권의 강화가 이루어지고 사림 세력에 대한 훈척 세력의 우세, 조정의 공론에 대한 국왕의 독단이 우세해져 갔다. 인조의 사친 추숭 이후로 왕의 적자가 아닌 처지에서 즉위한 왕들 역시 인조의 사례를 따라 사친을 추숭하였다.

변천

18세기 들어서면서 조선왕실에서는 후궁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경우 왕은 자신의 생모 즉 사친을 추숭함으로써 종통(宗統)을 확립하고자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추숭이었다.

영조는 즉위 초에 숙빈최씨(淑嬪崔氏)가 왕비가 아니라서 종묘에 모실 수 없었다. 영조는 1724년 즉위하자마자 사당의 부지를 선정하게 해서 이듬해인 1725년에 경복궁 서북쪽 북악산 아래에 숙빈의 사당인 숙빈묘(淑嬪廟)를 완성하였다.

그런데 영조는 1753년(영조 29) 기왕의 숙빈묘를 육상궁(毓祥宮)이라 하였으며 숙빈 무덤이었던 소령묘(昭寧墓)는 소령원(昭寧園)으로 하였다. 본래 조선 시대에 세자, 세자빈 또는 왕을 낳은 후궁의 사당은 묘(廟)로, 무덤은 묘(墓)로 불렸는데, 이 같은 묘묘(廟墓) 제도를 영조가 궁원(宮園) 제도로 바꾼 것이었다.

유교 예법에서는 천자의 무덤을 능이라고도 하고 원(園)이라고도 하며, 제후왕의 무덤 역시 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무덤의 명칭을 묘(墓)에서 원(園)으로 바꾼 것은 의례상 크나큰 격상이었다. 영조는 자신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를 위해 이 같은 궁원 제도를 도입하였던 것이다. 영조 이후 후궁의 아들로 즉위한 순조도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사친을 추숭하였다. 이 결과 영조의 사친을 모신 육상궁(毓祥宮)을 위시하여 추존왕 원종의 사친을 모신 저경궁(儲慶宮), 경종의 생모인 희빈장씨를 모신 대빈궁(大嬪宮), 추존왕 덕종의 사친을 모신 연우궁(延祐宮), 사도세자의 사친을 모신 선희궁(宣禧宮), 순조의 사친을 모신 경우궁(景祐宮), 영친왕의 사친을 모신 덕안궁(德安宮) 등 7궁이 출현하였다.

참고문헌

  • 『朱子家禮』
  • 이영춘, 「潛冶 朴知誡의 禮學과 元宗追崇論」, 『청계사학』7, 1990.
  • 신명호, 『조선초기 왕실편제에 관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9.
  • 문숙자, 『조선전기의 재산상속』,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1.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陵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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