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전(屯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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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진전 등을 개간·경작하여 그 수확물로 군량, 군문·아문의 재정, 궁방 수입 등에 충당하게 설정된 토지.

개설

본래 둔전은 교통이나 수송 등이 불편한 전통 사회에서, 국방상의 요충지에 주둔하는 군사들로 하여금 진황지(陳荒地)나 진전(陳田) 등을 개간·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군수(軍需)에 충당하도록 하는 군사 목적용 토지였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 군사 목적의 토지뿐 아니라 각 아문 및 궁방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둔전이 운영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아문과 궁방(宮房)의 둔전이 크게 확대되었다.

본래 조선전기의 둔전은 군사나 혹은 노비 등을 직접 사역하는 형태로 경영되었다. 반면에 조선후기에는 농업 기술이 발전하고 무주지(無主地)에 대한 절수(折受)가 광범위하게 진행되면서 병작제(竝作制)로 운영되는 둔전, 민전(民田) 위에 수조지로 설정되는 둔전, 실제 토지가 지급되지는 않으면서 일정한 수세량만을 규정하는 무토(無土) 등 다양한 형태로 운영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 둔전은 주로 군수 확보와 국가 재정의 확충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평안도와 함경도에 주둔하는 군사들의 군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둔전이 설치되었고, 각 지방관아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관둔전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국가 재정의 확보를 위한 국둔전도 설치되었다. 태종 9년(1409)에는 국가의 곡식 비축량이 줄어들자 이를 마련하기 위하여 일반 민호에게 종자곡(種子穀)을 나누어 주고 가을 수확을 거두어들이는 특이한 방식의 호급둔전(戶給屯田)이 경영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9년 1월 18일). 조선후기에는 주로 군문과 아문·궁방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둔전 절수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1695년(숙종 21)「을해정식(乙亥定式)」을 마련하여 일정한 제한을 가하기도 하였다.

내용

태조는 즉위와 더불어 음죽(陰竹) 지역의 둔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혁파하도록 하였으나, 이후 둔전은 상황에 따라 치폐를 계속하였다. 태종 9년에는 국가가 비축곡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호급둔전이 시행되었다. 이는 일반 민호에게 종자곡을 나누어 주고 가을 수확을 거두어들이는 방식으로, 일반적인 둔전의 경영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세종대에는 평안도·함경도에 대한 북방 개척과 사민 정책(徙民政策)이 시행되면서 군수와 식량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둔전이 활용되었다(『세종실록』 14년 4월 12일). 한편 각 지방관아에서도 지방 재정의 확충을 목적으로 관둔전(官屯田) 등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세조대에는 이러한 관둔전의 면적에 제한을 가하는 조치가 취해지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둔전들은 대개 상황에 따라 설치와 폐지가 반복되었다(『세종실록』 10년 7월 1일). 둔전은 황폐한 진황지나 진전에 설정되었고 군사와 노비 등을 동원하여 경작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생산성이 높지 않았다. 따라서 둔전은 재정 확보책으로 효율적이지 못한 측면이 컸다.

둔전 경영 방식은 16세기에 지주 전호제(地主田戶制)가 정착되면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양반들에 의한 불법적인 둔전 침탈이 만연해 가는 한편, 둔전 경영에서도 지주 전호제적 방식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변천

조선전기 전형적인 형태의 둔전 경영은 조선후기에 들어 크게 변화하였는데, 임진왜란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란 중에 국가에서는 대규모의 군량을 조달할 방법을 고심하였는데, 둔전이 그 유력한 방책으로서 시행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 정부는 군영(軍營)들을 잇달아 창설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고, 이에 따라 각 아문들의 재정 수요도 증가하였다. 또한 왕실 구성원인 궁방에 대한 경제적 우대책의 마련 역시 시급하였다. 그러나 전란을 겪은 이후 정부에 의한 토지 파악 능력은 극히 위축된 상태였고, 조세 수입을 통해 이들 재원을 충당하는 것은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조선 정부는 각 군문과 아문·궁방 등에 대해 무주지(無主地)나 진황지들을 절수하고 이들을 둔전으로 경영하여 각자 재정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이는 조선후기 둔전이 크게 확대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각 군문과 아문·궁방에서는 경쟁적으로 토지를 절수받았으며, 다양한 형태의 둔전 경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선후기의 둔전 경영에서는 군사나 노비에 의한 직영 형태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대신 무주지를 절수받아 소유권을 확립한 경우에는 병작제 경영을 통해 지대를 수취하였다. 소유주가 있는 토지를 절수하였을 경우에는 전세(田稅)에 해당하는 양을 수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절수 과정에서 민전 침탈 등의 문제가 빈번히 제기되었다. 특히 개간자가 이미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는 토지에 둔전 절수 등이 이루어진 경우는 수취에서도 경작자와 절수처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다.

이러한 절수지의 확대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였을 뿐 아니라 국가 재정상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이에 따라 1695년(숙종 21) 「을해정식」을 선포하고 둔전 절수의 원칙을 정비하였다. 즉, 숙종 14년(1688) 이후 절수된 둔전·궁방전을 모두 혁파하고 새로운 둔전과 궁방전을 절수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민전에 설정된 수조지로서의 둔전에서는 결당 쌀 23두(斗)를, 군문이나 아문에서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는 영작둔전(永作屯田)에서는 결당 조 200두를 수취하는 것을 법식으로 삼았다. 「을해정식」은 당시까지 제기된 둔전과 관련된 문제를 대부분 정리하는 조처였다.

「을해정식」 시행 이후 둔전과 궁방전의 규모는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둔전의 절수자와 중답주(中畓主)·경작자 사이의 분쟁은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이후 일제시기 토지 조사사업에 이르러서는 둔전의 소유권 확립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송양섭, 『조선 후기 둔전 연구』, 경인문화사, 2006.
  • 이영훈, 『조선 후기 사회 경제사』, 한길사, 1988.
  • 박준성, 「17·18세기 궁방전의 확대와 소유 형태의 변화」, 『한국사론』 11, 1984.
  • 이재룡, 「선초의 둔전제에 대하여」, 『사학잡지』 7,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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