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응(鄭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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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0년(성종 21)∼1522년(중종 17) = 33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이조 정랑(正郞)홍문관(弘文館)응교(應敎) 등을 지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이름이 정응(鄭應)으로 되어 있다. 자는 응지(譍之)이고, 호는 소우(素遇)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돈녕부(敦寧副 정(正)정인후(鄭仁厚)이고, 어머니 경주 최씨(慶州崔氏)는 단성현감(丹城縣監)최순(崔洵)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고양군수(高陽郡守)를 지낸 정수(鄭穗)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경산현령(慶山縣令)을 지낸 정효경(鄭孝卿)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연관되어 유배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중종 시대 활동

1507년(중종 2)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다.[『방목(榜目)』] 1514년(중종 9)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5세였다.[『방목』] 처음에 홍문관(弘文館)정자(正字)로 보임되었으나, 분관(分館)에서 허참례(許參禮)와 면신례(免新禮)를 행하지 않고 바로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었다고 탄핵을 하여 체직되었다.[『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9년 11월 14일, 중종 9년 11월 15일, 중종 9년 11월 22일] 조선 초기부터 새로 출사(出仕)하는 관원은 구 관원(舊官員)에게 음식을 차려 대접하는 예(禮)가 있었는데, 이를 허참례(許參禮), 또는 허참(許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후부터 서로 상종(相從)을 허락한다는 뜻으로, 신 관원(新官員)의 오만을 없애기 위해서 시행해 오던 풍습이었다. 그리고 이후 열 며칠 뒤에는 면신례(免新禮)를 행하여야 비로소 구 관원과 동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응(鄭譍)이 이를 하지 않았다고 하여 구 관원들로부터 지적을 받았던 것이다.

1515년(중종 10) 5월 이조와 예조, 그리고 대제학 등의 의논에 따라 김안로(金安老)·김정(金淨)·소세양(蘇世讓)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되었고, 홍문관 저작(著作)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10년 5월 5일] 이때 중종의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사림파(士林派)의 김정과 박상(朴祥)이 <중종반정(中宗反正)> 이전에 중종이 사가에서 살 때 부인이었던 폐비 신씨(愼氏)를 복위(復位)시켜 다시 중전(中殿)으로 모실 것을 주장하였다. 사림파인 사간원 대사간조광조(趙光祖)는 이를 적극 지지하였으나, 이를 반대하는 훈구파(勳舊派)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행(李荇)의 탄핵을 받고 김정과 박상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때 사간원 정언정응 등이 “상소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언로(言路)를 막는 것입니다.”라며 그들을 비호하고, 오히려 대사헌이행을 탄핵하여 그를 파직시켰다.[『중종실록』중종 10년 8월 22일, 중종 10년 10월 25일] 이행은 훈구파인 사장파(詞章派)의 우두머리로서 남곤(南袞)·소세양 등 당대의 문장가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결국 이 일로 이들은 정응을 사림파 인물로 낙인찍혔다.[『중종실록』중종 14년 12월 14일]

1516년(중종 11) 11월 이언호(李彦浩)·소세량 등과 함께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이 되어, 천문학을 별도로 공부하였다.[『중종실록』중종 11년 11월 7일] 그때 경연청(經筵廳) 사경(司經)을 겸임하였는데, 경연청에서 진강(進講)할 때 내수사(內需司) 장리(長利)를 혁파하도록 건의하였다.[『중종실록』중종 12년 7월 30일] 1517년(중종 12) 성균관(成均館)박사(博士)에 임명되었다가, 5품의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으로 발탁되었으며, 이어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전임되었다가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중종실록』중종 12년 4월 7일, 중종 12년 8월 22일, 중종 12년 8월 24일]

1518년(중종 13)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로 있을 때, 그는 홍문관 부제학조광조, 홍문관 교리(校理)김구(金絿)와 함께 월과(月課)의 시문(詩文)을 짓지 않았다는 이유로 추고(推考)를 당하였다. 당시 정응과 기준(奇遵)은 소장파 그룹에서 문장의 쌍벽(雙璧)을 이룰 만큼 문명(文名)이 높았고, 성리학(性理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당시 풍조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정응은 매월마다 의무적으로 시문(詩文)을 짓는 일을 보이콧하였던 것이다. 이후 예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지평(持平)을 거쳐 병조 좌랑으로 전임되었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속고8 「정응」 이하 「정응묘표」로 약칭] 그리고 그해 11월 홍문관 교리로 승진하였고,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어, 성균관 직강(直講)을 겸임하였다.[『중종실록』중종 13년 11월 17일, 중종 13년 11월 19일]

1519년(중종 14) 이조 정랑(正郞)을 거쳐 홍문관 응교(應敎)로 승진하였다가, 이윽고 홍문관 전한(典翰) 및 예문관 응교(應敎)를 겸하였다.[「정응묘표」] 이는 중종이 그의 재주를 아껴서 초자(超資)하여 불차탁용(不次擢用)한 것이었다. 불차탁용이란 유능한 인재를 발탁할 때 품계(品階)의 차례를 밟지 않고 품계를 몇 단계씩 건너뛰어서 높은 관직에 등용하던 것을 말한다. 당시 중종은 정응과 기준 두 사람의 재주를 중하게 여겨 불차탁용한 것인데, 훈구파에서 그들을 너무 조급하게 승진시킨다고 비난하였다.

이때 훈구파 홍경주(洪景舟)와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이 중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1519년(중종 14) 11월 15일 기묘사화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이자(李耔)·김정·조광조·김구·김식(金湜)·유인숙(柳仁淑)·박훈(朴薰)·박세희(朴世熹)등의 사림파가 모두 체포되어 하옥되었다. 이때 훈구파 홍경주와 남곤 등은 사림파를 모조리 죽이고자 하였으나, 영의정정광필(鄭光弼)과 우의정안당(安塘)이 중종에게 간청하면서 체포된 사림파들은 모두 3차례에 걸쳐 석방되었고, 마지막 8명만이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훈구파는 영의정정광필을 파직시키고, 조광조를 능주(綾州)로 귀양보냈다가 곧 사사(賜死)시켰다. 이어 김정과 김식 등도 유배지에서 사사되었으며, 기준 및 한충 등도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 밖에 김구·박세희·박훈·홍언필(洪彦弼)·이자·유인숙(柳仁淑) 등 수십 명이 귀양을 갔으며, 사림파를 두둔한 안당과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 형제 등도 파직되었다.

기준은 조광조의 제자였으나, 정응은 조광조의 제자가 아니었으므로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 체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해 11월 정응을 비롯한 홍문관 관원들은 연명으로 상소하여, “일을 같이 한 사람들이 이미 죄를 받았으니, 우리들도 감옥에 가서 그 죄를 함께 받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중종실록』중종 14년 11월 16일] 이에 중종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얼마 후인 12월 조광조 일파를 추가 색출하는 과정에서 정응도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충청도 부여(扶餘)로 유배되었다.[『중종실록』중종 14년 12월 16일,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상권] 그리고 1522년(중종 17) 7월 장독(杖毒 : 곤장을 맞은 여독)으로 유배지 부여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33세였다.[『중종실록』중종 17년 7월 29일, 『비문』]

성품과 일화

정응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성품과 행실이 순수하였으며, 문장과 지절(志節)로 세상에 이름났다.[『해동잡록(海東雜錄)』 권6, 「정응묘표」] 전한(前漢)의 고문(古文)을 문장의 기본으로 삼았으므로, 시문으로 일가견을 이루었다. 당시 사람들은 정응과 기준을 ‘문학의 쌍벽’이라고 불렀다.[『국조보감(國朝寶鑑)』 권20] 정응은 사림파의 영수인 조광조로부터 크게 쓰일 인물로 촉망을 받았으나, 기준처럼 조광조의 제자가 아니었다. 만약 그가 훈구파의 사장파에 합류하였다면, 소세양과 문장을 겨룰 만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정응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522년(중종 17) 7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찍이 개 한 마리를 길렀었는데, 그가 죽자 그 집안 식구들이 애통해 하니, 그 개도 슬피 부르짖으며 3일 동안 밥을 먹지 않다가 죽었으므로, 듣는 자들이 슬퍼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중종실록』중종 17년 7월 29일]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강올리(綱兀里)에 있는데, 묘표(墓表)가 남아있다.[「정응묘표」]

첫째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부사(府使)신염(申濂) 딸인데, 영의정(領議政)신숙주(申叔舟)의 후손이다. 둘째 부인 연일 정씨(延日鄭氏)는 정랑(正郞)정완(鄭浣)의 딸이다. 후사가 없었으므로, 여동생의 아들 의양령(義陽令)이중손(李仲孫)이 제사를 맡아서 그 기일(忌日)에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정응묘표」]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고봉집(高峯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해동잡록(海東雜錄)』
  • 『극원유고(屐園遺稿)』
  • 『남계집(南溪集)』
  • 『문곡집(文谷集)』
  • 『사재집(思齋集)』
  • 『송재집(松齋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음애집(陰崖集)』
  • 『정암집(靜菴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학포집(學圃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