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申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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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80년(성종 11)∼1530년(중종 25) = 51세.] 조선 전기 중종 때의 문신. 이조 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자는 대용(大用)이고, 호는 초암(草菴)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 종친부(宗親府)전첨(典籤)신말평(申末平)이고,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익평공(翼平公)권람(權擥)의 딸이다. 세종 때 좌의정신개(申槩)의 증손자이고, 세조 때 공신 영의정권람(權擥)의 외손자이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8년(연산군 4)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5년 뒤인 1503년(연산군 9) 나이 24세에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로 전임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성절사(聖節使)의 표문(表文)을 전송하는 의례를 거행할 때 승정원 주서신상이 연산군을 안내하다가 실수하여, 좌통례(左通禮)김극회(金克恢)와 함께 국문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보다 앞서 이세좌(李世左)가 예조 판서로 있을 때에 별시 문과 · 무과(武科)의 부정을 논하고 그 과방(科榜)을 폐기하도록 건의하였으므로, 별시 문과에 급제한 신상의 홍패(紅牌)를 회수하였다. 1503년(연산군 9) 9월 예조 판서이세좌(李世左)가 양로연(養老宴)에서 회배(回盃)할 때 어의(御衣)에 술을 엎지른 실수로 연산군의 분노를 사서 전라도 무안에 부처되었다가 함경도 온성과 강원도 평해로 이배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가 일어나서, 성종 때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비(廢妃)할 때 이세좌가 형방승지(刑房承旨)로서 윤씨에게 사약(賜藥)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잡혀와서 고문을 당하고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받았다. 그 해 12월 연산군은 신상과 김안국(金安國) · 이완(李琬) 등 6인은 인수대비(仁粹大妃)와 중궁 윤씨(尹氏)의 족친이이라고 하여 홍패를 돌려주었다.

중종 시대 활동

1506년(중종 1)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서 수찬(修撰)이 되었는데,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사(都事)가 되었다. 그러나 춘추관(春秋館)사관(史官)을 계속 겸임하여 동료들과 함께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를 찬수(纂修)하였다. 실록 편찬에 참여한 자들은 모두 당시의 명류(名流)들이었는데, 그 중에서 신상이 나이가 가장 젊었으므로 상국(相國)신용개(申用漑)가 매우 그 재주를 칭찬하였다.[『상촌고』 권 27 「이조판서 문절 신공 신도비명」] 그해 말에 정업원(淨業院)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는데, 홍문관 교리(校理)이행(李荇) · 김세필(金世弼), 부교리(副校理)김안국(金安國),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홍언충(洪彦忠), 이조 좌랑(佐郞)유운(柳雲), 성균관 전적(典籍)김안로(金安老) 등과 함께 책을 읽었다.[『중종실록』중종 1년 12월 3일]

1508년(중종 3) 예조 정랑(正郞),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 홍문관 교리,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상촌고』 권 27 「이조판서 문절 신공 신도비명」] 1509년(중종 4)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고, 그 해 겨울에 한꺼번에 부모의 상을 당하였다.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512년(중종 7) 상복을 벗고, 홍문관에 들어가서 응교 · 전한(典翰)으로 차례로 승진하고, 사헌부 집의(執義)를 거쳐,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다. 1513년(중종 8) 사간원 사간(司諫)을 거쳐, 사복시(司僕寺)정(正)을 역임하였다. 1514년(중종 9)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에 제수되고, 그해 12월 영의정유순(柳洵) 등이 의논하여 사유(師儒)에 해당될 만한 사람으로 김안국 · 이행 · 홍언필(洪彦弼) · 소세양(蘇世讓) 등 28인을 뽑을 때 신상도 함께 뽑혔다.[『중종실록』중종 9년 12월 21일] 1515년(중종 10)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고, 그 해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발탁되어, 1516년(중종 11) 좌승지가 되었다가, 우승지를 거쳐 다음해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중종실록』중종 10년 2월 16일 · 윤4월 29일, 중종 11년 4월 20일, 6월 27일, 중종 12년 3월 12일 ]

1517년(중종 12)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가,[『상촌고』 권 27 「이조판서 문절 신공 신도비명」] 1519년(중종 14)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때 이조 판서신상이 본직과 성균관(成均館)동지사(同知事)를 사임하였으나 중종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중종실록』중종 14년 1월 26일 · 2월 13일 · 2월 29일 · 3월 1일] 그 해 겨울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으나, 신상은 평소에 공평하고 관대하여 남들과 경쟁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당하지 않았다. <기묘사화>를 일으킨 훈구파의 실세인 남곤(南袞)이 이조 판서를 차지하고, 신상은 예조 판서로 밀려났다.

그 뒤에 신상은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여당(餘黨)으로 몰려서 산직(散職)으로 물러나서, 한직(閒職)에 머물렀다. 1520년(중종 15) 주청사(奏請使)에 임명되어, 부사(副使)한효원(韓效元)과 함께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세자(世子: 인종)의 책봉(冊封)을 허락 받아 가지고, 1521년(중종 16) 돌아와서, 돈령부(敦寧府) 지사(知事)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중종 15년 5월 4일, 중종 16년 1월 24일 · 4월 12일] 그때 사헌부에서 신상을 탄핵하기를, “신상은 일찍이 연산군에게 아첨하여 갑자기 6경(六卿)이 되었으므로 이제 감당할 능력이 없는 자리에 있게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공론(公論)에 좇아서 빨리 결단을 내리소서.” 하였으나, 중종이 따르지 않았다.[『중종실록』중종 16년 9월 9일] 이리하여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중종실록』중종 16년 11월 9일] 1524년(중종 19)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어, 다시 중국 명나라 북경에 다녀왔다.[『중종실록』중종 19년 2월 18일 · 7월 25일] 1525년(중종 20)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1526년(중종 21) 형조 판서가 되었다.[『중종실록』중종 20년 8월 2일, 중종 21년 10월 19일] 1530년(중종 25) 병으로 사직하여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가 되었는데, 그해 9월 7일 병으로 별세하니, 향년이 51세였다.[『상촌고』 권 27 「이조판서 문절 신공 신도비명」, 『중종실록』중종 25년 9월 7일 「신상 졸기」]

성품과 일화

신상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단아한데다 풍채는 의젓하여, 청류(淸流)의 기풍이 있어서 그를 바라보면 마치 신선(神仙) 세계의 인간과 같았다.[『상촌고』 권 27 「이조판서 문절 신공 신도비명」] 천성은 단정하고 중후하며 마음가짐이 견고하고 확실하여, 당대 현명한 사람들 중에서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다.[『해동잡록』 권4] 부모의 상사를 만나서 슬퍼하다가, 몸이 야윌 대로 야위어 거의 생명이 끊어질 뻔하였다. 마음에 욕심이 적어서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그가 이조 판서를 맡았을 때 청탁을 거절하여 집안에 선물 꾸러미가 들어오지 않았고, 집 대문에 청탁하려는 사람의 발자취가 끊어져서, 집 안이 조용하여 아이들이 참새 그물을 칠만큼 한적하였다.[『상촌고』 권 27 「이조판서 문절 신공 신도비명」]

어려서 놀이를 좋아하지 않고 깊이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여, 정암(靜菴)조광조·음애(陰崖)이자(李耔))와 뜻이 통하고 도(道)가 합치되었다. 19세에 진사가 되고 24세에 급제하여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나, 그의 지론(持論)은 공정하였으나, 당시 사림파의 논의가 과격하고 훈구파의 대응이 험악한 것을 근심하고, 양파 사이를 조정하려고 노력하여, 기필코 성사시키려고 하였으나 결국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화(禍)를 면하고 <기묘사화> 이후에 산반(散班)으로 밀려나서 한직(閒職)에 있다가 죽었다.[『해동잡록』권4]

1515년(중종 10) 이후에 안당(安瑭), 이장곤(李長坤), 신상이 계속해서 이조 판서를 맡아서 사림파를 등용하여 조광조 일파가 중종과 서로 만나서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연려실기술』 권7] 신상은 이조 판서가 되어 조광조, 김식(金湜), 김정(金淨), 김구(金球) 등을 비롯한 사림파 학자들의 등용에 크게 노력하였다. 사림파와 훈구 세력의 대립이 첨예화되자, 양파의 중재에 힘썼고,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이 죄를 입자 그들의 구명에 힘을 기울였다.[『고봉집』「논사록」 하권]

1530년(중종 25) 신상이 돌아가자, 사신은 논평하기를, “신상은 타고난 성격이 화평하여 용서를 잘 하였으며 또한 관리의 재능이 있었다. 이리하여 일찍이 중망(重望)이 있었고 나이가 40세가 되기 전에 이조 판서를 임명받은 것은 근래에 없던 일이었으나, <기묘사화>의 여당이기 때문에 시론(時論)에 용납되지 못하여, 마침내 드러나게 중용되지 못했다. 향년이 51세다.” 하였다.[『중종실록』중종 25년 9월 7일 「신상 졸기」]

신상은 역사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하여 고금을 마음대로 다루어 마치 어제의 일처럼 환하게 알았다. 그러나 누가 혹시 물으면 잘 모른 것처럼 하였으니, 그 겸허한 덕이 이와 같았으며, 술에 취하여 시를 지으면 그 시를 사람들이 회자(膾炙)하였으나, 그는 별일로 여기지 않았다. [『상촌고』 권 27 「이조판서 문절 신공 신도비명」]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서 평산(平山) 지방을 지나다닐 때에는 자기의 관향(貫鄕)이라 하여 수레에서 내려서 공손하게 걸어갔는데, 평산 고을에 조상들의 무덤이 있어서 그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해동잡록』 권4]

그의 아버지 감찰(監察)신말평이 성종이 승하한 날에 그 딸을 출가시켰다고 해서 서용(敍用)되지 못하였는데, 그 아들 신상이 진사(進士) 때 상언하기를, “신의 아비 말평이 선왕(先王)이 병환이 위독하시다는 말을 듣고 24일 오전에 사위를 맞았는데, 법사(法司)에서는 성종이 승하한 뒤에 사위를 맞은 자의 예로 논하니, 신은 매우 민망하옵니다.” 하고, 신상은 아버지 신말평을 다른 관직에 서용해 주도록 연산군에게 호소하였으나,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선왕이 병환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미리 사위를 맞이한 그 심정이 가증하다.” 하고 용서하지 않았다.(『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 5월 19일) 조선 시대 국왕이 승하하면, 국상 중에 모든 혼례가 금지되었다. 신말평은 성종이 승하하던 1494년 12월 24일 오전에 사위를 맞이하였는데, 대궐에서 성종이 그날 승하한 사실을 모르고 혼례를 치렀기 때문이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에 있고, 신흠(申欽)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상촌고(象村稿)』 권27 「이조판서 문절 신공 신도비명(吏曹判書文節申公神道碑銘)」]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종실인 부림군(富林君)이식(李湜)의 딸인데,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진사 신광국(申匡國)이고 차남은 신홍국(申弘國)이고, 3남은 신화국(申華國)이며, 장녀는 심경(沈鏡)에게 시집갔다.[『상촌고』 권 27 「이조판서 문절 신공 신도비명」]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기묘록보유(己卯錄續集)』
  • 『고봉집(高峯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상촌고(象村稿)』
  • 『동각잡기(東閣雜記)』
  • 『순암집(順菴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유천차기(柳川箚記)』
  • 『음애일기(陰崖日記)』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청음집(淸陰集)』
  • 『퇴계집(退溪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잡록(海東雜錄)』
  • 『농암집(聾巖集)』
  • 『묵재집(默齋集)』
  • 『충재집(冲齋集)』
  • 『학포집(學圃集)』
  • 『정암집(靜菴集)』
  • 『사재집(思齋集)』
  • 『충암집(冲庵集)』
  • 『범허정집(泛虛亭集)』
  • 『면앙집(俛仰集)』
  • 『유헌집(游軒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잠곡유고(潛谷遺稿)』
  • 『낙전당집(樂全堂集)』
  • 『귀계유고(歸溪遺稿)』
  • 『소곡유고(素谷遺稿)』
  • 『대산집(大山集)』
  • 『순암집(順菴集)』
  • 『번암집(樊巖集)』
  • 『운석유고(雲石遺稿)』
  • 『안촌집(安村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