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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4년(명종 9)∼1619년(광해군 11) = 66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대사헌(大司憲)참판(參判)을 지냈고,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다. 자는 용석(用錫)이고, 호는 요호(了湖)다. 본관은 영월(寧越)이고, 거주지는 서울인데, 황해도 배천(白川) 출신이다. 아버지는 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신응시(辛應時)이고, 어머니 영광 정씨(靈光丁氏)는 별좌(別坐)정기(丁琦)의 딸이다.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의 6촌 친척이고, 장천군(長川君)황혁(黃赫)과 사돈 관계였다. 율곡(栗谷)이이(李珥)의 문인인데, 동문수학한 묵재(默齎)이귀(李貴)와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선조 22년 11월 1일]

선조 시대 활동

1573년(선조6)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0세였고, 1584년(선조 17) 별시(別試)문과(文科)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1세였다.[『방목(榜目)』]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고,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항상 춘추관(春秋館)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송강(松江)정철(鄭澈)이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어 무고한 동인(東人)들을 많이 연루시키자, 신경진이 친구 이귀와 같이 정철을 찾아가서, “공평하게 처리하여 사림(士林)의 소망을 잃어버리지 마소서.” 하고 권유하였다.[『도암집(陶菴集)』 권27 「대사헌 아호 신공경진신도비(大司憲丫湖辛公慶晉神道碑)」]

1591년(선조 24) 주청사(奏請使)한응인(韓應寅)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질정관(質正官)오억령(吳億齡)과 함께 중국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이듬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돌아왔다. 그때 신경진이 병조 좌랑(佐郞)으로 있다가 서장관에 충원된 것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명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조선에서 길을 빌려 달라.”고 하였으므로, 명나라에서 조선이 일본과 함께 중국 명나라에 침입할까봐 매우 불안해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조선에서 따로 주청사를 보내어 그간의 곡절을 해명하였는데,(『선조실록』 선조 24년 10월 24일)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가 조선의 사신 일행을 불러서 왜국의 형세와 양국의 관계를 자세하게 물었으므로, 서장관신경진이 자세히 설명하니, 황제가 매우 후하게 상을 주었다. 1592년(선조 25) 주청사 일행이 요동(遼東)을 거쳐 의주(義州)로 돌아오니, 이미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서북쪽으로 피난 가던 선조 일행이 황해도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사신 일행은 급하게 송도(松都)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서 선조에게 복명(復命)하였다.[『도암집』 권27 「대사헌 아호 신공경진신도비」]

행재소에서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임명되었는데, 여러 대간(臺諫)들과 함께 3의정(三議政)의 왜란에 대한 책임을 성토하여, 영의정이산해(李山海) · 좌의정유성룡(柳成龍) 등이 마침내 사임하였다. 어가(御駕)를 호위하고 평양에 이르렀을 때 신경진은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이때 신경준은 정4품하 봉렬대부(奉列大夫)로 승품되었고, 행(行) 이조 좌랑으로서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 8월 5일) 선조가 의주에 머물면서,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고, 또 유성룡을 평안도 체찰사(平安道體察使)에 임명하였는데, 유성룡은 신경진을 체찰사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1593년(선조 26) 유성룡의 관군과 이여송(李如松)의 명나라 군사가 연합하여, 평양을 수복하자, 선조는 유성룡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경상 · 전라 · 충청도의 3도(三道)의 체찰사를 겸임시켜서, 전쟁 중에 군사 동원과 물자 공급을 총지휘하게 하였다. 이때 신경진은 의정부(議政府)사인(舍人)에 임명되어, 체찰사부(體察使府)의 낭속(郎屬)으로서 유성룡을 도와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10여 년 가까이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는 데에 온갖 힘을 기울였다. 영의정유성룡이 4도 체찰사가 되어 전시의 비상 체제를 구축하고, 왜군에게 반격을 가하여, 1593년 10월 선조가 서울로 환도할 수 있었다.

체찰사유성룡은 비록 동인의 영수였으나, 서인 신경진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항상 중책을 맡겨서, 유성룡을 대신하여 명나라 군사와 교섭하고, 또 직접 군량미를 공급하는 등 크게 활약하여, 체찰사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도암집』 권27 「대사헌 아호 신공경진신도비」] 1594년(선조 27)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이 되었는데, 나라에서 훈련도감(訓練都監)을 설치하고, 영의정유성룡을 도제조(都提調)에 임명하자, 신경진은 그 낭속이 되어서 유성룡을 도왔다.[『선조수정실록』선조 27년 2월 1일] 그 뒤에 종부시(宗簿寺)정(正)이 되었다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을 거쳐, 다시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그때 대간에서 김우옹(金宇顒) 등이 송강정철의 죄를 소급해 적용하여 관작(官爵)을 삭탈할 것을 요청하니, 사간신경진이 이것을 반대하고 정철의 억울한 점을 하소연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정철과 함께 연좌되어 면직되었다. 얼마 지난 뒤에 강릉 부사(江陵府使)에 임명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어 고과(考課)에서 최고의 점수를 받아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었다[『도암집』 권27 「대사헌 아호 신공경진신도비」]

1600년(선조 33) 신경진이 진주사(陳奏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신종 황제에게 명나라 군대 중에서 중국 남방 출신 병사[南兵] 3천 명을 조선에 계속 머물러두도록 간청하니, 명나라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도암집』 권27 「대사헌 아호 신공경진신도비」] 1601년(선조 34) 중국에서 돌아와서,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1602년(선조 35) 정철의 아들 정종명(鄭宗溟)을 추천하였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그때 인사 행정을 맡은 이조의 당상관(堂上官)이 판서심희수(沈希壽), 참판정사호(鄭賜湖), 참의신경진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서인(西人)으로 정종명을 요직의 3망(三望)에 추천하였다가, 동인의 공격을 받아서 모두 추고(推考)당하여 파면되었다.[『선조수정실록』선조 35년 1월 1일] 선조의 만년에 그는 주로 외방의 나가서 수령관을 역임하였는데, 선조가 신경진을 정철의 여당(餘黨)으로 보아서 싫어하였기 때문이었다. 1603년(선조 36)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어, 임기를 끝마치고, 1605년(선조 38) 충주 목사(忠州牧使)가 되었다가, 1606년(선조 39) 갑산 부사(甲山府使)가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5년 1월 26일, 선조 38년 1월 14일, 선조 39년 7월 20일]

광해군 시대 활동

1609년(광해군 1)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610년(광해군 2)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되어,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2년 윤3월 3일] 그때 호패(號牌)를 새로 실시하여 신분 제도를 강화하니, 백성들의 불평불만이 많았으므로, 정부에서 8도(八道)에 안무사(按撫使)를 파견하여 그 불평을 무마시키도록 하였는데, 신경진은 전라도 안무사에 임명되어 호남(湖南) 지방의 민심을 다독거려서 진정시켰다.[『광해군일기』광해군 2년 12월 7일] 1611년(광해군 3)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예조 참판이 임명되었는데,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2년 12월 30일, 광해군 3년 5월 8일 · 5월 17일 · 8월 12일, 광해군 4년 2월 16일]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서, 그 사돈 장천군황혁이 무고(誣告)를 당하여 국문(鞫問)을 받다가 옥사(獄死)하고, 신경진의 둘째아들 신희업(辛喜業)이 그의 사위로서 연좌되어 곤장을 맞고 유배되었다. 신경진은 처음에 의금부 동지사로서 국문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그의 사돈 황혁이 연루된 사실을 알고 사피(辭避)하자, 광해군이 특별히 그를 교체하였다가 곧바로 관작을 삭탈하였다. <김직재의 옥사>는 봉산군수(鳳山郡守)신율(申慄)과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문관(文官) 김직재를 시켜서 황혁을 무고하기를, “황혁과 같이 모의하여 진릉군(晉陵君)을 추대하려고 했습니다.” 하였는데, 진릉군은 곧 선조의 제4왕자 순화군(順和君)의 양자이고, 순화군의 부인은 황혁의 셋째딸이었다. 모두 잡아다가 국문했는데, 황혁은 곤장을 맞다가 감옥에서 죽었다.[『광해조일기』 권1] 당시 정권을 잡은 북인(北人)이이첨 일당이 서인(西人)을 조정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출시켰는데, <김직재 옥사>는 그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광해군이 전교하기를, “신경진은 황혁의 사돈집이고, 신희업의 친아비이므로,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특별히 너그러운 은전을 베푸니, 관직만을 삭탈하여 성문 밖으로 내쫓아라. 홍서봉(洪瑞鳳)은 황혁의 사위이므로 완전히 석방하기는 어려우니, 그 관직만을 파면하라.” 하여,[『광해군일기』광해군 4년 5월 8일] 신경진은 삭탈 관직되어 문외 출송(門外黜送)되었다. 황혁의 넷째사위가 신희업이고, 그 둘째사위가 홍서봉인데, 학곡(鶴谷)홍서봉은 인조 때 영의정이 되었는데, 장인 황혁을 신원(伸寃)시키고, 그 신도비를 세웠다. 그 뒤에 광해군이 전교하기를, “박동량(朴東亮)과 신경진의 직첩(職牒)을 돌려주라.” 하였는데, 두 사람이 처음에 옥사의 국문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광해군일기』광해군 4년 10월 16일]

신경진은 고향 황해도 배천으로 내려가서 7년 동안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면서, 조정과 인연을 끊었다. 조정에서 이이첨 · 정인홍(鄭仁弘) 등이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려고 정청(庭請) 을 전개하여 서인들을 대규모로 박해할 때 그는 시사(時事)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고향 배천에서 7년 동안 은거 생활을 하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기 4년 전에 1619년(광해군 11) 6월 11일 노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6세였다.신경진은 안팎의 벼슬을 두루 역임하면서 청렴결백한 지조를 지켰으므로,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과 같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도암집』 권27 「대사헌 아호 신공경진신도비」] 아들 군수(郡守)신희계(辛喜季)가 1660년(현종 1) 할아버지 신응시(辛應時)와 아버지 신경진의 시문집을 모아서 『백록유고(白麓遺稿)』를 간행하였다.[『연암집(燕巖集)』 권3]

임짐왜란 때 신경진의 활동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5월에 서울이 함락되자,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하고. 유성룡을 평안도 체찰사에 임명하였는데, 동인 유성룡은 서인 신경진과 한준겸(韓浚謙) 등을 그의 종사관으로 삼았다. 1593년(선조 26) 10월 선조는 서울로 환도하고, 유성룡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여 경상 · 전라 · 충청도의 3도(三道) 체찰사를 겸임하여 군무(軍務)를 총괄하게 하였는데, 신경진이 체찰사부의 낭속으로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10여년 가까이 유성룡을 도와서,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는 데에 온갖 힘을 기울였다. 체찰사유성룡은 비록 동인의 영수였으나, 서인 신경진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항상 중책을 맡기고, 그를 신임하였다.[『도암집』 권27 「대사헌 아호 신공경진신도비」]

1592년(선조 25)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여송이 5만여 명의 명나라 군사를 이끌고 조선의 관군과 힘을 합쳐서 평양성을 공격할 때 각 고을에서 군량미를 공급하는 일이 다급하였는데, 체찰사유성룡이 선전관(宣傳官)신경진을 각 고을에 보내어 군량미를 차질 없이 수송하게 하였다. 그때 체찰사유성룡이 아뢰기를, “반드시 선전관 같은 사람을 따로 파견하여 군량미를 오로지 전담하게 해야만 시기에 맞출 수가 있을 것입니다. 종사관신경진을 정한 날짜보다 먼저 현장에 가게 해서 정리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선조가 대답하기를, “빨리 신경진을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 7월 6일) 이때 체찰사 유성룡이 종사관들을 자기 집에 모아놓고 밤이 늦도록 일을 의논하였는데, 체찰사유성룡의 노모(老母)가 갑자기 내실(內室)에서 나오자, 종사관들이 모두 일어나서 뿔뿔이 흩어졌다. 유성룡의 어머니가 하인을 시켜서 말을 전하기를, “신(辛) 종사관은 가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신경진이 청사로 올라가서 절을 하자, 체찰사의 늙은 어머니가 젊은 신경진의 손을 잡고 부탁하기를, “우리 애는 몸이 아파서 대사(大事)를 감당할 수 없으니, 그대가 잘 도와주었으면 한다.”고 하였다.[『도암집』 권27 「대사헌 아호 신공경진신도비」] 그때 체찰사유성룡이 병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593년(선조 26) 1월 제독이여송이 평양성을 수복한 다음에 명나라 군사가 송도(松都)의 여현(礪峴)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패배하자, 이여송이 명나라 군대를 돌이켜서 후퇴하려고 하였다. 신경진은 체찰사유성룡의 명령을 받고 명나라 제독의 진영(陣營)으로 달려가서, 이여송을 만나서, 군사를 돌이키는 것이 옳지 않다고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서 적극적으로 설득하였다. 그 다섯 가지 이유는 “1. 선왕(先王)의 묘소(墓所)가 적의 소굴에 들어가 있다. 2. 경기도 이남의 백성들이 날마다 명나라 군대가 오기를 바라고 있는데, 명나라 군대가 물러가면, 반드시 적에게 투항할 것이다. 3. 우리나라의 강토(疆土)를 한 치도 버릴 수 없다. 4. 우리나라의 병력이 비록 미약하나, 명나라 군대와 협력하면 같이 진격을 꾀할 수 있지만, 명나라 군대가 돌아가 버리면, 다시 어찌 해 볼 수가 없다. 5. 명나라 군대가 퇴각할 때 왜군이 덮치면 임진강(臨津江) 이북은 우리나라의 소유가 될 수 없다.”이다. 신경진이 눈물을 흘리며 극력 간하니, 제독이여송이 부끄러운 기색을 띠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여송은 명나라 군대를 이끌고 일단 평양으로 퇴각하였다가, 다시 명나라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향하여 진군(進軍)하였다. 신경진이 정성껏 설득하여 제독이여송의 마음을 움직였던 결과였으나, 실제로는 도원수(都元帥)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서울에 주둔한 왜군에게 크게 승리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군대가 임진강에 이르자 얼음이 녹아버리고 배도 없어 건널 수가 없었다. 신경진이 지혜를 짜내어 칡넝쿨로 다리를 만드니, 전체 군대가 잘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1593년(선조 26) 2월 이여송의 명나라 대군은 서울 부근 벽제관(碧蹄館)에서 왜군에게 대패하여 다시 후퇴하였다. 서울을 수복하는 데에는 명나라 군사가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講和) 회담이 이루어져서, 그해 9월 이여송은 명나라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였다.

1597년(선조 30) 1월 강화 회담이 깨어지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다. 그 해 12월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 등이 10여 만 명 이상의 명나라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서 조선의 군사와 연합하여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에 주둔한 왜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1598년(선조 31) 8월 일본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왜군들이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명나라 군대도 철수하기 시작하였는데, 조선에서는 명나라 군대가 모두 철수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1600년(선조 33) 9월 명나라 장수 경리(經理)만세덕(萬世德)이 명나라 군대를 모조리 철수시켜서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신경진이 진주사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명나라 신종 황제에게 명나라의 군사 중에서, 남병(南兵) 3천 명을 조선에 계속 머물러 있게 하고, 또 군량미 대신으로 은전(銀錢)을 지급해 줄 것을 요청하니, 명나라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도암집』 권27 「대사헌 아호 신공경진신도비」] 1601년(선조 34) 2월 진주사신경진이 중국 명나라에서 돌아와서 복명(復命)하니, 선조가 크게 기뻐하여 신경진을 이조 참의에 임명하였다.[『선조실록』선조 34년 9월 24일]

1604년(선조 37) 6월 왜란 7년 동안 활동한 공신(功臣)에 대하여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할 때, 임금을 의주까지 호종(扈從)한 호성공신(扈聖功臣)과 전쟁에 공훈을 세운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나누어 공신을 책정하였다. 호종공신 1등에는 이항복(李恒福) · 정곤수(鄭崑壽) 2명, 2등에는 유성룡 등 31명, 3등에는 정탁(鄭琢) 등 53명을 책봉하고, 선무공신에는 이순신(李舜臣) · 권율 · 원균(元均) 3명, 2등에는 신점(申點) 등 5명, 3등에는 정기원(鄭期遠) 등 10명을 책봉하였다. 그러나 신경진은 호성공신 86명과 선무공신 18명의 명단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것은 신경진은 주로 체찰사유성룡의 종사관으로 활동하였으므로, 그 업적이 체찰사부의 공로로 돌아가고, 따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재(李縡)가 지은 신경진의 비문에 의하면, “신경진의 이름이 호성공신에 들어가고 선무공신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모두 이를 억울하게 여겼으나, 정작 본인은 그에 대하여 스스로 한 마디도 말한 적이 없었다.” 하였다. 그러나 잘못된 기록으로 볼 수 있는데, 이재의 비문은 신경진의 5세손 순창군수(淳昌郡守)신치복(辛致復)이 이미 1백여 년이 지나서 비를 세울 때 지었으므로, 그 사실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도암집』 권27 「대사헌 아호 신공경진신도비」] 왜란 때 영의정유성룡이 4도 체찰사가 되어 왜군을 물리치고 평양과 서울을 수복한 업적에 대해서 논평하는 자들이 대부분 체찰사부의 공로로 돌리는데, 그때 영의정유성룡이 체찰사가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원인은 당파를 초월하여 신경진 · 한준겸과 같은 훌륭한 인재를 종사관으로 썼기 때문이다.

성품과 일화

신경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신중하며, 행동이 묵중(黙重)하여 위엄이 있었다. 또 사려가 깊고 지식이 두루 통달하여, 자못 사대부의 기풍을 지니고 있었다. 젊어서부터 문무(文武)의 재주를 아울러 갖추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여러 차례 외직을 맡았을 때에도 칭송을 받았다. 광해군 시대 <김직재의 옥사>에 연루되어, 비록 만년에 세상과 인연을 끊고 고향에서 오랫동안 칩거(蟄居)하였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나라가 위급할 때 등용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오랑캐가 두만강변을 대거 침입하자 서평군(西平君)한준겸이 5도 대원수(五道大元帥)에 임명되었을 적에 신경진도 김류(金瑬)와 함께 원수의 3망에 추천되었는데, 당시 조정에서 문무(文武)를 겸전하여 오랑캐의 침입을 막을 만한 인물을 추천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반정에 참여한 김류 · 신경진(申景禛) · 최명길(崔鳴吉) 등 여러 공신들이 너나없이 그를 추모하며 말하기를 “신경진(辛慶晉)이 살아 있다면, 지금 3의정(三議政)의 물망에 올랐을 것이다.” 하였다.[『도암집』 권27 「대사헌 아호 신공경진신도비」]

신경진은 태어나면서부터 총명이 뛰어났다. 나이 겨우 11세 때 아버지 신응시를 따라 홍문관에 갔을 적에 여러 사람들이 벽에 걸린 「여선취적도(呂仙吹笛圖)」를 가리키며 글을 한번 지어보라고 하였다. 여선취적도는 여씨 신선이 피리를 부는 그림이다. 신경진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시를 완성하였는데, 말과 뜻이 기발하였으므로 온 좌석의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였다. 조금 장성하자, 율곡이이의 문하에서 이귀와 함께 수학하였다. 당시 이귀는 기개(氣槪)가 너무 호방하여 친구들이 싫어하였으나, 신경진은 홀로 말하기를 “후일에 국가의 큰일을 감당할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고 하였다. 이귀는 과거에 급제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켜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연평군(延平君)에 봉해졌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신경진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眼目)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경진은 평소 집안에서 행실이 매우 독실하였다. 특히 계모(繼母)를 잘 섬기었는데, 계모의 상(喪)을 당하자, 『주자 가례(朱子家禮)』대로 예절을 다하고 상복(喪服)을 입었으며, 길제(吉祭)를 지낸 뒤에야 비로소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 동인 유성룡의 수제자 우복(愚伏)정경세(鄭經世)가 이것을 보고 감탄하였다고 한다.[『도암집』 권27 「대사헌 아호 신공경진신도비」]

<김직재 옥사>의 배후에는 황혁의 아버지 도승지황정욱(黃廷彧)과 신율(申慄)의 할아버지 형조판서신점(申點)의 사적인 원한 관계도 있었다.[『도곡집(陶谷集)』 권11 「증좌찬성 독석 황공신도비명(贈左贊成獨石黃公神道碑銘)」] 판서신점은 원래 황정욱과 집과 서로 이웃해서 살았다. 1589년(선조 14) 여름 어느 날 황정욱이 조정에서 퇴근하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화살이 날아와서 그의 수레에 꽂혔다. 화살을 쏜 사람은 바로 판서신점의 손자이자 신율의 친형인 신열(申悅)이었다. 신열이 활쏘기를 연습하다가 잘못 빗나간 것이지만, 황정욱은 이를 고발하여 그 죄를 다스리려고 하니, 신열이 도망하여 숨어버렸다.[『광해군일기』광해군 4년 3월 18일] 이 사건으로 인하여 두 집안이 원수가 되었는데, 황정욱은 서인의 거물이고, 신점은 대북(大北)의 실권자 이이첨의 외삼촌이었다. 신열의 동생 신율은 처음에 과거에 급제하여 신경진의 맏딸과 혼인하였다가 곧 상처하고, 판서이호민(李好閔)의 맏딸과 재혼하였다. 신율은 신경진의 맏사위였으나, 봉산군수 때 이이첨과 서로 손잡고 <김직재 옥사>를 일으켜서 황혁의 집안을 멸망시키고, 장인 신경준을 벼슬에서 은퇴시켰다. 그 공으로 신율은 광해군 때 대간을 거쳐 판서에 이르러, 영풍군(永豊君)에 봉해졌다.[『광해군일기』광해군 5년 9월 19일]

묘소와 후손

묘소는 황해도 배천군 서쪽 비봉산(飛鳳山)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도암(陶庵)이재(李縡)가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도암집(陶菴集)』 권27 「대사헌 아호 신공경진신도비(大司憲丫湖辛公慶晉神道碑)」] 첫째 부인 양주 조씨(楊州趙氏)는 진사 조지(趙摯)의 딸인데, 자녀는 1남 3녀를 두었다. 둘째 부인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군수원축(元軸)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신희손(辛喜孫)은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제자로서 군수를 지냈고, 차남 신희업(辛喜業)은 군수를 지냈다. 장녀는 영풍군신율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찰방(察訪)심평(沈枰)의 처가 되었고, 4녀는 사헌부 지평이시우(李時雨)의 처가 되었다.[『도암집』 권27 「대사헌 아호 신공경진신도비」] 서3자 신희계(辛喜季)는 문과에 급제하고 중시(重試) 장원하여 군수를 지냈다.[『방목』] 신희계가 서출로서 과거에 급제한 사실은 서얼(庶孼) 차별이 심하였던 조선 중기 시대에 매우 이례적인데, 그 출신이 셋째부인 정실(正室) 소생이거나, 아니면, 당시 이이 등이 주장한 ‘서얼 허통론(庶孼許通論)’의 결과일 수도 있다. 1633년(인조 11) 신희계가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그 뒤에 승문원(承文院) 검교(檢校)로 있을 때 문신(文臣) 중시(重試)에서 장원을 차지했는데, 이처럼 서얼이 장원을 차지한 것은 조선 개국 이래 처음이었다고 한다.[『연암집』 권3]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도암집(陶庵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재사초(寄齋史草)』
  • 『기축록(己丑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명재유고(明齋遺稿)』
  • 『묵재일기(黙齋日記)』
  • 『미수기언(眉叟記言)』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서애집(西厓集)』
  • 『순암집(順菴集)』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암집(燕巖集)』
  • 『우계집(牛溪集)』
  • 『운암잡록(雲巖雜錄)』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청음집(淸陰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혼정편록(混定編錄)』
  • 『율곡전서(栗谷全書)』
  • 『송강집(松江集)』
  • 『백암집(柏巖集)』
  • 『동강집(東岡集)』
  • 『고담일고(孤潭逸稿)』
  • 『창석집(蒼石集)』
  • 『한음문고(漢陰文稿)』
  • 『인재집(訒齋集)』
  • 『우복집(愚伏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순암집(順菴集)』
  • 『선양정집(善養亭集)』
  • 『모당집(慕堂集)』
  • 『문월당집(問月堂集)』
  • 『완정집(浣亭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