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량(朴東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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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9년(선조2)~1635년(인조13) = 67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에 활동한 척신. 자는 자룡(子龍)이고, 호는 오창(梧窓)·봉주(鳳洲)·기재(寄齋)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인데, 반천부원군(潘川府院君)박응복(朴應福)의 아들이고, 좌의정박세채(朴世采)의 조부이다. 그의 백부 박응순(朴應順)의 딸이 선조(宣祖)의 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이고, 그의 장자 박미(朴彌)가 선조의 부마(駙馬)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9년(선조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승문원(承文院)권지 부정자(權知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에 천거되어 검열(檢閱)·대교(大敎)·봉교(奉敎)로 차례로 승진하였으며, 강연(講筵) 기주관(記注官)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25) 병조좌랑이 되었을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다.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할 때 아버지 대사헌(大司憲)박응복과 함께 선조와 왕후를 호종(扈從)하였다. 실은 그들 부자는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를 수종(隨從)한 것인데, 왕비가 그의 백부 박응순(朴應順)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신료들이 모두 흩어져서, 문신(文臣) 중에서 의주 용만(龍灣)까지 호종한 자가 겨우 10여 명 안팎이었는데, 젊은 낭관(郎官)은 박동량 한 사람뿐이었다. 선조는 그를 이조정랑으로 승진시켜 육조(六曹) 낭관과 사복시(司僕寺)내승(內乘)의 일까지 겸하여 맡아보게 하였는데, 그는 재간이 있어서 여러 가지 업무를 잘 처리하여 왕후의 사랑을 받았다. 박동량은 어릴 적부터 영리하여 중국어[漢語]에 능통하였는데, 선조가 의주에 머물면서 명(明)나라의 사신이나 장수들을 만날 때 그는 선조의 곁에서 통역을 전담하였다. 선조를 도와 명나라의 파병을 이끌어내니, 선조의 신임도 절대적이었다. 1593년(선조26) 선조 일행이 의주에서 서울로 돌아오던 도중 해주(海州)에서 그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25세였다. 곧 좌부승지(左副承旨)·우승지(右承旨)를 거쳐, 1594년(선조27) 좌승지(左承旨)로 승진하고, 병조참판·형조참의를 거쳤다. 26세에 승정원(承政院)도승지(都承旨)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나이가 어리다고 사양하였으나 결국 도승지가 되었다. 이해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를 거쳐, 병조참지에 임명되었고, 1596년(선조29) 호조참의가 되었다가, 이조참판으로 임명되어 동지사(冬至使)로서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적이 다시 침략하여 변경의 경보가 다시 위급해지자, 왕후와 후궁을 호위하여 황해도 수안(遂安)까지 피난갔다가 돌아왔다. 다시 도승지로 임명되었으나, 1598년(선조31)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연안부사(延安府使)로 나갔다가 얼마 뒤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1600년(선조33) 선조의 제 1왕비 의인왕후가 46세로 돌아갔는데, 후사가 없었다. 이 해에 중추부 동지사(同知事)를 거쳐, 사헌부(司憲府)대사헌에 임명되었고, 1601년(선조34) 이조·예조의 참판을 거쳐서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나갔다. 1603년(선조36)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나갔다가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며, 형조·호조·병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서울에서 의주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선조를 호종한 측근 신하였으므로, 선조가 크게 신임하여, 25세에 승지로 발탁되었고 30세에 재신(宰臣)의 반열에 올랐다. 1604년(선조37) 선조를 호종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等)으로 책훈되었고, 1605년(선조38) 우참찬(右參贊)에 승진하였으며, 호조판서를 거쳐,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나갔다. 1607년(선조40)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졌으며, 1608년(선조41) 선조가 돌아가자, 왕릉을 지키는 수릉관(守陵官)에 임명되어 선조의 목릉(穆陵)을 3년 동안 수묘(守墓)하였다. 선조가 돌아갈 때 그를 포함한 일곱 명의 측근 신하들(유영경·한응인·박동량·서성·신흠·허성·한준겸)에게 나이 어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부탁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후일 광해군(光海君)과 인조 때 그의 정치적 행로가 가시밭길이 되었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광해군이 즉위하자, 왜란 때 호종한 공로를 인정하여 1609년(광해군1)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에, 1610년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에 가자(加資)하였고, 1611년 의금부(義禁府)판사(判事)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북인(北人)이 집권하자, 선조로부터 유영경(柳永慶)·한응인(韓應寅)·서성(徐渻)·신흠(申欽)·허성(許筬)·한준겸(韓浚謙)과 함께 영창대군을 보호하라는 부탁을 받은 이른바 ‘칠신(七臣)’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대북파(大北派)의 미움을 받았다. 1612년(광해군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사건(誣獄事件)이 일어나자, 그를 심문하는 추관(推官)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박동량은 그가 무고한 것을 알고 연루자들을 용서하려고 노력하다가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1613년(광해군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대북파는 그를 모반 혐의로 체포하여 심문하였는데, 이때 그는 반역 혐의를 극구 부인하면서, 선조가 돌아갈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주로 궁녀들이 선조의 의인왕후가 묻힌 유릉(裕陵)을 저주한 사실이 있다고 공초(供招)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사태가 역전되었다. 곧 계축옥사 때 유릉(裕陵)을 저주한 사건이 무고인 것을 알면서도 거짓으로 자백하여 인목대비로 하여금 유폐 생활을 하게 만들었다고, 전라도 강진현(康津縣)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전라도 부안(扶安)에 이배(移配)되었던 것이다. 1632년(인조10) 충청도 충원(忠原)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풀려나서 돌아왔다. 경기도 분진(汾津) 봉성(鳳城)으로 이사하여, 자연을 즐기면서 스스로 호(號)를 ‘봉주(鳳洲)’라고 일컬었다. 그는 평소에 건강하여 질병이 없었는데, 어느 날 저녁에 갑자기 담(痰)이 끓어올라 밤이 새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1635년(인조13) 2월 5일 돌아갈 때 그의 나이는 67세였다.

저서로는 『기재잡록(寄齋雜錄)』·『기재사초(寄齋史草)』·『기재잡기(寄齋雜記)』·『방일유고(放逸遺稿)』 등이 있다.

성품과 사평

박동량은 어릴 적부터 영리하고 재간이 있었으며 사람됨이 ‘정련(精鍊)된 검(劍)’과 같아서 젊어서는 그 예리한 것을 드러내어 수년 동안 글을 배우고 곧 그 이치를 환하게 깨달았다고 한다. 김상용(金尙容)·김상헌 형제와 친교가 두터웠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에는 그에 관해, “박동량은 재주가 뛰어나고 인품이 너그러워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실록을 살펴보면 ‘간특하고 경망하여 독철(毒澈: 악독한 정철)을 추종하여, 정철(鄭澈)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다.’ 하였으니, 사람을 논함에 있어서 사실과 다른 것이 너무 심하다.”라고 하였다.

묘소와 복관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坡州) 옹암리(甕巖里)에 있는데,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아들 금양위(錦陽尉)박미(朴瀰)와 교리(敎理)박의(朴漪) 등이 인조에게 글을 올려서 복관(復官)되었다. 뒤에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기재사초(寄齋史草)』
  • 『기재잡록(寄齋雜錄)』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상촌집(象村集)』
  • 『간이집(簡易集)』
  • 『백사집(白沙集)』
  • 『계곡집(谿谷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송자대전(宋子大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