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정관(質正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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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국 사행에 차임되어 글의 음운(音韻)이나 기타 제도 등에 관한 의문점을 중국에 질문하여 알아오는 일을 맡은 관원.

개설

중국은 원말부터 계속해서 쇄국적인 외교정책을 취하였다. 따라서 조선과 중국은 사절의 왕래로만 통교할 수 있었다. 즉 다른 시기와는 달리 양국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행을 통하여 중국의 고제(古制)나 글의 음운 등 특정사안에 관한 의문점을 중국에 가서 알아오는 일이 필요하였다.

특히 조선에서는 중국과의 표·전문(表·箋文) 등의 외교문서 작성이나 중국 측의 조서(詔書)칙서(勅書) 등의 정확한 해석을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계속해서 중국 측에 조선의 자제(子弟)들을 북경의 국자감(國子監)이나, 혹은 요동의 향학(鄕學)에 입학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의 요청에 대해 중국은 여러 가지 핑계로 끝내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이에 조선 측에서는 차선책으로 질정관(質正官)을 사행원의 일원으로 중국에 들여보내 이문(吏文)이나 중국의 고제(古制) 등을 질의케 하였다.

담당 직무

당시 외교문서였던 표·전문의 작성이나 중국의 칙서와 조서는 모두 이문으로 작성되었다. 따라서 질정관은 이문의 정확한 해독(解讀)을 위해 중국에 파견되어 특수 문제를 질문하여 그 해답을 얻어오는 직무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중국 측에 중국의 고제를 질의하거나 특수 문제였던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하는 일, 그리고 서장관의 직임을 겸하기도 하였다.

변천

조선에서 최초로 질정관을 파견한 것은 1477년(성종 8)으로 한훈질정관(漢訓質正官)이라는 이름으로 김석원(金錫元)을 파견했으며(『성종실록』 8년 윤2월 18일), 이후 1481년(성종 12)에 정조사겸사은사 사행 시 지달하(池達河)가 파견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정사, 부사, 서장관 이외에 질정관이 파견되었으나, 점차 질정관이 파견되는 사행에는 서장관이 차임되지 않고 질정관이 서장관의 직임도 겸임하는 것이 관례화 되어갔다. 질정관이 파견되기 시작한 성종대 이후 질정관이 사행에 참여한 것은 연산군대에 4회, 중종대에 11회, 선조대에 8회, 광해군대에 1회 등이었는데, 이때 서장관은 별도로 차임되지 않았다. 이처럼 질정관이 서장관의 직임을 겸대하게 된 것은 ‘역로(驛路)에 폐해’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중종실록』 9년 8월 10일), (『중종실록』 20년 7월 4일).

질정관으로 파견된 인물은 홍문관·사헌부·의정부·육조 등의 재능 있는 당하관으로 선임되었고, 대체로 중국어 능통한 문관이었다.

조선후기 대청 관계에서는 질정관의 파견 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통문관지』에 의하면, 1657년(효종 8) 정유년 이후로 통사(通事) 가운데 1인이 질문종사관(質問從事官)으로서 질정관의 직임을 대신하였다. 이때부터 질문종사관의 서열은 사행원 중에서 상통사(上通事)의 아래, 압물종사관(押物從事官)의 위에 위치하였다.

참고문헌

  • 『통문관지(通文館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박성주, 「高麗·朝鮮의 遣明使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8.
  • 박성주, 「朝鮮前期 對明 御前通事」, 『慶州史學』 제29집 , 경주사학회, 2009. 6.
  • 張舜順, 「朝鮮後期 通信使行의 製述官에 대한 一考察」, 전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9.
  • 정다함, 「조선초기 습독관제도의 운영과 그 실태」, 『진단학보』 96, 진단학회, 2003. 12.
  • 정다함, 「朝鮮前期 兩班 雜學兼修官 硏究」,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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