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서봉(洪瑞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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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2년(선조5)∼1645년(인조23) = 74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휘세(輝世), 호는 학곡(鶴谷)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당홍(唐洪)인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도승지홍천민(洪天民)이고, 어머니 흥양유씨(興陽柳氏)는 제용감 주부유당(柳樘)의 딸이다. 황해도관찰사홍춘경(洪春卿)의 손자이며, 참찬홍성민(洪聖民)의 조카이고, 황혁(黃赫)의 사위이다. 북저(北渚)김류(金瑬)와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과는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90년(선조23)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4년(선조27) 23세로 별시 문과에 병과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에 보임되었다가,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였다. 1600년(선조33)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이조 좌랑으로 옮겨, 세자시강원 사서를 겸임하였고 지제교(知製敎)에 선임되었다. 1601년(선조34) 명(明)나라 조사(詔使)고천준(顧天峻) · 최정건(崔廷健)이 조선으로 오자, 접반사(接伴使)이정귀(李廷龜)의 종사관으로 박동열(朴東說) · 이안눌(李安訥)과 함께 선발되었다.(『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57) 1602년(선조35) 이조 좌랑, 1603년(선조36) 예조 정랑, 성균관 사예를 역임하였다. 경기좌도양전어사(京畿左道量田御史)에 차출되었는데, 오랜 전쟁으로 경계가 문란해진 토지를 타량(打量)하여, 토질에 따라 고르게 부세(賦稅)하였다. 1604년(선조37) 좌의정정철(鄭澈)의 추천으로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나갔고 1607년(선조40) 성균관 사예에 임명되었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즉위) 홍문관 교리, 성균관 사성을 거쳐 홍문관 응교가 되어 사가독서(賜假讀書)하였다. 그때 중시(重試)에 갑과로 합격하여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면서 당상관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1) 영위사(迎慰使)신흠(申欽)의 종사관으로 차출되어, 도사영위사(都司迎慰使)로 평양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였는데, 이곳에서 허균(許筠)을 만났다.(『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19) 1610년(광해군2)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관리들의 출척(黜陟)을 엄격히 하고 백성들의 부세를 경감하니, 교화(敎化) 정치가 크게 행해졌다. 순시(巡視)할 때는 수행원을 물리치고 말을 타고 다녀서 사람들이 관찰사의 행차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해 별시 문과에 대독관(對讀官)으로 차출되었다. 1612년(광해군4)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되어, 승문원 부제조를 겸임하였다. 이어 예조 참의가 되었는데, 성절사(聖節使)서장관에 임명되어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1612년(광해군4) <김직재(金直哉)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때 순화군(順和君)의 양자인 진릉군(晉陵君)이태경(李泰慶)이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모함을 당하였다. 그래서 순화군의 장인인 황혁(黃赫)이 옥사에 연루되어 옥에서 죽었고, 순화군의 동서인 홍서봉도 파면되었다.(『응천일록(凝川日錄)』 권1) <김직재의 옥사>는 대북파(大北派)가 소북파(小北派)를 몰아내기 위해 조작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홍서봉은 파직된 후부터 10년 동안 은거하면서 오직 김류 · 김상헌 등과 교유하였다. 한편, 허균은 홍서봉과 김류 · 김상헌 · 장유(張維) 등을 포섭하려 하다가 실패하자, 그들을 일망타진하려는 의도로, 1618년(광해군10) 김득황(金得榥)을 시켜 익명서를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유폐된 서궁(西宮) 안으로 투척하였다. 광해군은 익명서 속의 인물들을 국문하려다가 영의정기자헌(奇自獻)의 만류로 중지하였다.(『잠곡유고(潛谷遺稿)』 권12) 홍서봉은 김류 · 박동선(朴東善) · 심기원(沈器遠) 등과 더불어 광해군을 몰아내기 위한 거사를 은밀히 모의하였다. 그들은 무인(武人) 신경진(申景禛) · 구인후(具仁垕) · 이흥립(李興立) 등과 손을 잡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綾陽君)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1)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하자, 홍서봉은 병조 참의에 임명되어 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이조 참의가 되어, 관료들의 숙청 작업을 맡았고 대사간과 승정원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인조반정>에 참여한 53명의 공신들을 포상할 때 홍서봉은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훈되고, 익녕군(益寧君)에 봉해졌다. 또 우부승지로 승진하여, 형방(刑房)을 겸임하였다. 이때 큰 옥사가 연달아 일어났는데, 그는 사건에 따라 부주(敷奏)하고 다시 조사하여 바르게 재판[平反]하였다. 인조가 그를 매우 신임하여 그가 승정원에 있는 2년 동안 형방을 바꾸지 않았다. 좌부승지가 되었다가, 1624년(인조2)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괄(李适)의 반란> 때 인목대비를 모시고 피난을 갔다 온 공으로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되고 우승지에 임명되었다.

1625년(인조3) 대사헌이 되었고, 병조 참판과 이조 참판을 역임하였는데, 춘추관 동지사 등을 겸임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626년(인조4)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江華島)로 피난가자, 도승지로서 어가를 호종(扈從)하였다. 1627년(인조5) 홍문관 부제학, 대사간과 대사성을 거쳐, 이조 참판이 되었다. 1628년(인조6) 유효립(柳孝立) 등이 모반 계획을 세웠는데, 허적(許積)이 이를 듣고 홍서봉에게 알렸다. 홍서봉은 급히 묘당(廟堂)에 통지하고 기포(機捕)를 설치하여 그들을 모두 사로잡아 복주(伏誅)하였다. <유효립의 모반>에서 공을 세운 32명을 녹훈(錄勳)할 때, 그는 영사공신(寧社功臣) 2등에 책훈되고,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되어, 의금부 지사에 임명되었다. 이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옮겼다가,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629년(인조7) 예조 판서와 의정부 우참찬, 1630년(인조8) 예문관 제학, 좌참찬, 예조 판서와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631년(인조9) 인목대비의 병환에 시약(侍藥)한 노고로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되었다. 이때 인조가 사친(私親)인 정원군(定遠君)과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 구씨(具氏)를 원종(元宗)과 인헌왕후(仁獻王后)를 추숭(追崇)하려고 하였다. 홍서봉과 조정 신료들은 반대하였으나, 이귀(李貴)는 찬성하였다. 또 이귀는 홍서봉이 뇌물을 받았다고 비난하면서 그가 이조 판서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에 인조는 이귀를 이조 판서에 임명하고 홍서봉을 파직하였다. 1632년(인조10) 홍문관 제학에 임명되었다가, 1633년(인조11) 예조 판서 · 병조 판서를 거쳐, 의정부 좌참찬에 임명되었다. 1634년(인조12) 명나라 태감(太監)노유령(盧維寧)이 조서를 가지고 조선에 오자, 관반사(館伴使)가 되어 사신을 접대하였다. 1635년(인조13) 종1품상 숭록대부(崇綠大夫)로 승품되고, 예조 판서 · 좌참찬에 임명되어 의금부 판사를 겸임하였으며 1636년(인조14) 우의정과 좌의정이 되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청(淸)나라 군사에게 포위되었다. 이때 좌의정홍서봉은 최명길(崔鳴吉) · 김신국(金藎國) · 이경직(李景稷) 등과 청나라 군사 진영에 내왕하면서 화의(和議)를 위한 실무 담판을 진행하였다.(『청음집(淸陰集)』 권6) 포위당한지 45일만에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태종(太宗)홍타이지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화의를 반대하던 척화파는 홍서봉이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척화파 인물들을 심양(瀋陽)에 보내기로 약속하고 청나라 태종에게 칭신(稱臣)하였다며 비난하였다.(『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63) 1639년(인조17) 영의정에 임명되었고, 1641년(인조19) 익녕부원군(益寧府院君)에 봉해졌다. 1644년(인조22) 홍서봉이 병으로 영의정을 사임하자, 인조는 김류를 영의정으로 삼고 그를 좌의정으로 삼았다. 1645년(인조23) 청나라에서 귀국한 소현세자가 급사하자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때 홍서봉은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고 왕세손을 후계자로 삼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1645년 8월 8일 노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74세였다.

문명은 높았으나 남아 있는 글이 거의 없고,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시조 1수가 전한다.

성품과 일화

홍서봉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간결하고 중후하며, 식견이 깊고 원대하여, 일찍부터 국기(國器)라고 일컬어졌다. 평소에도 관대(冠帶)를 단정히 갖추고 조금도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담소를 화기애애하게 하여 사람들을 즐겁고 편안하게 하였다. 그러나 남이 의롭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을 보면 곧장 자기 몸이 더럽혀질 것처럼 혐오스러워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횡역(橫逆)한 일을 당하더라도 나쁜 감정을 가슴속에 품지 않았으므로, 그의 정적들도 모두 그의 도량에 감탄하였다. 총명하고 민첩하며, 전고(典故)에 빼어나고, 문사(文詞)에 뛰어나서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는 1572년(선조5) 12월 21일에 출생하였는데, 임신 중에 무늬가 빛나는 봉황새가 구름 속을 날아다니는 점괘를 얻었으므로, 이름을 홍서봉(洪瑞鳳)이라고 지었다고 한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18) 3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므로, 작은 아버지 홍성민(洪聖民)이 그의 형제를 거두어 길렀다. 14세 때에 송강(松江)정철이 그에게 시를 짓게 하자, 그 자리에서 잠계(箴戒)와 풍간(諷諫)의 뜻이 담긴 시를 지으니, 정철이 크게 칭찬하였다. 자라서 황정욱(黃廷彧)의 손녀딸과 결혼하여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강원도로 피난 갔다. 황정욱 · 황혁 부자는 어명을 받고 순화군을 배종(陪從)하여 함경도로 가다가 철원에서 홍서봉 모자를 만났는데, 함께 북쪽으로 갈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철원이 안전하다고 여겨 따라가지 않았다. 함경도로 피난 간 순화군 일행은 회령에서 원주민 국경인(鞠景仁)의 배반으로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포로가 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다. 반면 홍서봉의 가족은 무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적성(積城) 남쪽 송산(松山)의 선영에 있는데, 부인과 동영이실(同瑩異室)이다.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비명이 남아 있다.(『명곡집(明谷集)』 권22) 부인 장수황씨(長水黃氏)는 승지황혁의 딸이고,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황정욱의 손녀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홍명일(洪命一)은 진사에 장원 급제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관찰사를 지냈으며 딸은 대사헌박황(朴潢)의 처가 되었다. 손자 홍처우(洪處宇)는 현령을, 홍처주(洪處宙)는 부사(府使)를 지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명곡집(明谷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상촌집(象村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순암집(順菴集)』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