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仁祖反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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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광해군 15) 3월에 인조의 친인척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을 왕으로 옹립한 군사 정변.

개설

1623년 3월에 인조의 친인척 신경진(申景禛)·구굉(具宏)과 무신 이서(李曙), 문신 김류(金瑬)·이귀(李貴)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하는 군사 정변을 일으켜서 정권을 장악했다. 인조정변으로 서인은 장기 집권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공신 세력의 명분론적 지향은 곧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부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안으로는 당파 간의 정치 항쟁을 격화시키는 빌미를 만들었다.

역사적 배경

광해군은 즉위 직후부터 왕권에 잠재적 위험 요인인 동복형 임해군(臨海君)과 선조의 적통(嫡統)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때문에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 등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의 건의에 따라서 임해군을 교동에 가뒀다가 죽음에 이르게 했다.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선조의 유훈을 받은 일곱 신하인 유교칠신(遺敎七臣) 중 현직에 있는 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서성(徐渻)·한준겸(韓浚謙)을 내쫓았다. 그리고 이이첨의 뜻을 받은 강화부사정항(鄭沆)이 영창대군을 살해했다(『광해군일기(중초본)』 6년 2월 10일). 광해군은 인조의 동생인 능창군(綾昌君)을 교동에 유배했다가 살해했고,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도 압박을 가하다가 대비의 존호(尊號)를 폐지하고 서궁(西宮)에 가두어 정치 활동을 제한했다(『광해군일기』 10년 2월 4일).

어머니를 폐위시키고 동생을 살해한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 행위는 지금까지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 세력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친금배명(親金排明)’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는, 광해군의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중립 외교 정책은, 대명의리(大明義理) 명분론자들이 반(反) 광해군 세력의 기치 아래 결집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발단

인조는 광해군의 박해로 동생을 잃고 이에 충격을 받아서 아버지가 사망하였다. 그러자 인조와 측근 세력은 타개책을 모색했다. 인조의 뜻을 간파한 무신 이서와 인조의 외가인 신경진·구굉이 정변 계획을 수립했다. 1620년에 신경진은 무신 출신만으로는 정변을 성사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무관직 경력이 풍부한 문신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우선 김류와 접촉했다. 신경진은 부친 신립이 김류의 부친 김여물(金汝岉)과 임진왜란 때 충주 전투에서 함께 전사한 까닭에 쉽게 설득할 수 있었다. 두 번째 포섭 대상 문신은 이귀였다. 이귀 역시 문신 출신이었으나 숙천부사와 평산부사를 역임하는 등 무관직 경력이 풍부했다. 이귀의 합류로 최명길·최래길 형제와 김자점·김련 부자, 심기원·심기성 형제, 장유·장신 형제 등의 문신이 가담했다(『인조실록』 1년 3월 13일).

이들은 문신과 무신을 가릴 것 없이 대부분 이이와 성혼, 이항복, 김장생 등 서인의 문인들이다. 이들은 이항복이 발탁해서 풍부한 군사 업무 경험을 쌓은 경우가 많았다. 임진왜란 때 다섯 번 병조 판서를 역임한 이항복은 북쪽 변경 지방의 긴장 상황이 높아짐에 따라 서북면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에 임명된 것을 계기로, 서인 출신을 대거 서북 변경 지방의 무장으로 발탁했다. 이들이 바로 인조정변의 주역을 담당했다. 이들 서인들은 경기도 남인 이원익(李元翼)과 경상도 남인 정경세(鄭經世) 등을 끌어들여 지지 세력을 확장했다.

경과

1622년 가을에 이귀가 평산부사(平山府使)가 되어 신경진을 중군(中軍)으로 삼아 거사를 도모하려고 했으나 누설되어 중단했다. 신경진과 구인후도 의심을 받아 외직으로 쫓겨났다. 마침 이서가 장단부사(長湍府使)가 되어 덕진(德津)의 산성 쌓는 곳에 군졸을 모아 훈련시키다가 다시 정변을 기도했다. 그런데 현직 정승 박승종(朴承宗)과 인척 사이인 훈련대장이흥립(李興立)을 설득해야 하는 난제에 직면했다. 이흥립의 사위인 장유의 아우 장신(張紳)이 대의(大義)로 회유하자 이흥립이 내응을 허락했다. 그리하여 이서는 장단에서 군사를 일으켜 달려오고 이천부사(伊川府使)이중로(李重老)도 편비(褊裨)들을 거느리고 달려와 파주(坡州)에서 합류했다.

그 과정에서 이이반(李而攽)이 역모를 고변(告變)했으나, 광해군이 후궁과 곡연(曲宴)을 벌이느라 결제를 미루었다. 또 박승종이 이흥립에게 정변에 가담했는지를 캐물었으나, 강력히 부인함으로써 광해군 세력이 정변 기도를 사전에 포착할 수 없었다.

정변군은 이날 밤 2경(9~11시)에 홍제원(弘濟院)에 모여서 정변군 부대를 편성하기로 했다. 김류가 대장직을 맡기로 했는데 고변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지체하다가 심기원과 원두표(元斗杓) 등의 독촉을 받고 늦게 약속 장소로 갔다. 이귀·김자점·한교(韓嶠) 등이 먼저 홍제원으로 갔는데, 이때 모인 자들이 겨우 수백 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김류와 장단의 군사도 도착하지 않았고 고변서(告變書)가 이미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군중이 흉흉하였다. 이에 이귀가 병사(兵使)이괄(李适)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은 다음 편대를 나누고 호령하니, 군중이 곧 안정되었다. 김류가 뒤늦게 도착해서 이괄을 부르자 이괄이 크게 노하여 따르려 하지 않으므로 이귀가 화해시켰다.

인조가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연서역(延曙驛)에서 이서(李曙)의 군사를 맞이했다. 장단(長湍) 지역의 군사가 7백여 명이며 김류·이귀·심기원·최명길·김자점·송영망(宋英望)·신경유(申景裕) 등이 거느린 군사가 또한 6~7백여 명이었다. 이들은 밤 3경(11~1시)에 창의문(彰義門)에서 선전관(宣傳官)을 참수하고 곧바로 창덕궁(昌德宮)에 이르렀다. 이흥립은 궁문 입구에서 군사를 단속하여 정변군에 대항하지 못하게 했다. 정변군이 바로 궁 안으로 들어가자 호위군은 모두 흩어지고 광해군은 후원문(後苑門)을 통하여 달아났다.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침전으로 들어가 횃불을 들고 수색하다가 그 횃불이 발[簾]에 옮겨 붙어 여러 궁전이 연소하였다.

능양군(綾陽君)종(倧)이 국새(國璽)를 경운궁에 유폐중인 인목대비에게 진상하자, 대비가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양군을 즉위시켰다. 이가 곧 인조이며 이 정변이 인조반정이다(『인조실록』 1년 3월 13일).

광해군은 의관(醫官)안국신(安國臣)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되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죄를 들어 처형하려 했으나, 새 왕의 간청으로 서인(庶人)으로 신분을 강등시켜서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인조실록』 12년 1월 12일].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유희분 등 수십 명은 참형에 처하고 200여 명을 귀양 보냈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김류·이귀·김자점·신경진·구굉 등 53명은 세 등급으로 나누어져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훈호(勳號)를 받고, 각기 등위에 따라 벼슬을 얻었다(『인조실록』 1년 윤10월 25일). 그러나 논공이 공평하지 못해 서인 공신들 간에 불화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1년 뒤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또한 남인 이원익이 다시 조정에 들어와 영의정에 오름으로써 남인이 제2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의의

인조반정을 주도한 평산신씨와 능성구씨는 인조의 외가로 53명의 정사공신 중에서 11명이 이들 양대 가문 출신이다. 박원종만이 무신 출신이었던 중종반정과 달리 인조반정의 주역 가운데 상당수가 무신 출신이라는 특징이 있다. 인조와 최초로 반정을 모의한 신경진과 구굉은 무신으로, 구굉은 인조의 외삼촌이고, 신경진은 인조의 큰아버지인 신성군(信城君)이 입양한 능창군의 외삼촌이다. 신경진과 구굉은 무신 출신인 자신의 동생과 아들, 조카 등을 끌어들인 뒤 무신 이서와 그의 조카, 매제를 끌어들였다. 정변 이후로 평산신씨 가문과 능성구씨 가문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무신 가문으로 성장했다.

인조반정은 조선후기의 역사를 규정하는 분기점으로 작용한 군사 정변이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인조정변 이후 조선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눈을 감은 채 극단적인 명분론을 앞세워 폐쇄적으로 정국을 운영했고 이로써 병자호란의 빌미를 제공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은 장기 집권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공신 세력의 명분론적 지향은 밖으로 외적의 침입을 부르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고 안으로는 당파 간의 정치 항쟁을 격화시키는 빌미를 만들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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