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詔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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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국 사신 중 조서를 지참한 사신.

개설

조선시대 중국 사신 가운데 최고 등급의 황제 문서였던 조서를 지참한 사신을 지칭하는 말이다. 조서는 유조(遺詔), 즉위조서(卽位詔書), 친정조서(親政詔書), 반조(頒詔) 등의 형식으로 조선에 전달되었으며, 조사는 중국 관원 중 상대적으로 높은 관직의 관원, 또는 문관 등이 임명되어 파견되어 왔다. 조사는 지참한 조서의 정치, 외교사적 의미로 인하여 조선에서 최고의 대우로 대접을 받았다.

내용 및 변천

1. 조사의 파견과 변천

조서는 명·청시대 황제의 명령으로 가장 높은 단계의 명령을 담은 황제문서로, 천하를 대상으로 천리(天理)를 밝히고, 통치의 대원칙을 천명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특히, 황위계승을 비롯한 황실 관련 사안이나 조선 왕위계승 및 왕실 관련 사안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최고의 외교문서로 인식되었다. 조선과 중국에서 상호 중요하게 인식하였기 때문에 파견하는 사신도 정치·외교적 역량에 맞도록 선정되었다.

조선시대 사행 명칭은 조서를 지침하면 조사, 칙서를 지참하면 칙사(勅使), 사은표를 지참하면 사은사, 정조하표(正朝賀表)를 지참하면 정조사 등과 같이 지참하는 외교문서에 따라 정해졌다. 외교문서의 전달에 있어 조선사행이 중국에서 귀국하면서 칙서와 자문을 비롯한 중국문서를 수령하여 조선 왕에게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조서는 반드시 중국 관원이 임명되어 조선에 전달되었다. 또한 명대에 환관이 사신으로 파견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조서를 전달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문관을 정사로 임명하여 파견하였으며, 청대 역시, 고위 관원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조사는 조선에서 맞이하는 최고 등급의 사신을 의미하였으며, 조사라는 용어 자체가 존대의 의미로 보편화되기도 하였다. 즉, 명대에 비록 조서가 아닌 칙서를 지참한 명나라 사신을 존대하여 “천사(天使)”, “조사”라고 하였다. 반면에 청대에는 조서를 지참한 사신마저도 “청사(淸使)”, “칙사” 등으로 불러 상대적인 인식 차이를 보여 주었다.

2. 조사의 사신접대

조서는 천하의 대사에 관련된 황제문서였기 때문에 융성하고 번화한 의식절차를 동반하였다. 중국에서 조서를 반포하는 의식과 조선에서 조서를 맞이하는 의식도 엄격하게 규정화되어 있었다. 조선은 명대의 의례를 준용하여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영조서의(迎詔書儀)”를 별도로 규정하여 조서의 접수를 중시하였다.

조사의 파견이 조선에 통보되면 조선은 영접도감을 설치하고 조사의 접대를 준비하였다. 조사가 서울에 도착함과 동시에 조선 왕은 모화관, 경복궁에서 영조서의를 거행하였다. 한편 명나라의 조사가 왔다가 돌아가면 조사와 조선의 문신들이 수창한 시문을 기록하여 한 질의 책으로 만들어 황화집(皇華集)이라 이름하였다.

3. 조사의 역할과 사례

조사는 외교적 역할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중요 인물 중심으로 선정되었다. 명대 사신의 절대 다수는 환관이었지만, 등극이나 책봉에 관련된 조사는 문관 중심으로 임명하였다. 1401년(태종 1) 건문제의 조서를 가져온 예부 주사육옹(陸顒), 홍려시 행인임사영(林士英), 1402년(태종 2) 영락제의 등극을 알리는 조서를 가져온 도찰원첨도어사(都察院僉都御史)유사길(兪士吉), 홍려시 소경왕태(汪泰), 1424년(세종 6) 홍희제의 등극을 알리는 조서를 가져온 예부 낭중이기(李琦), 통정사 참의(通政司參議)팽영(彭璟), 1452년(문종 2) 황태자를 책봉하는 조서를 가져온 이부 낭중 진순(陳鈍), 행인사 행인이관(李寬) 등이다. 청대는 육부의 중요 인물이 조사로 파견되었다. 1799년(정조 23) 귀국한 사신이 올린 문견별단에서 조선이 문장이 뛰어난 나라이기 때문에 청나라가 진사(進士) 출신을 조사로 파견한다고 보고하기도 하였다.

의의

조선시대 대중국 문서 가운데 최고 등급의 황제문서로 중국의 대조선 외교정책을 반영한 외교문서였다. 왕위 계승 및 왕실 관련 각종 사안을 최종 마무리하는 단계는 조서를 접수하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조선은 조서의 접수를 위하여 많은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서는 최고 황제문서로서 격식과 의식이 복잡하였으며, 조서를 지참한 조사는 중국에서 높은 관직의 관원으로 파견하였으며, 조선에서 정치·외교적 의미를 두어 적극적으로 접대하여 조선의 외교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문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 파견되어 조·중간 학문 교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 『대명회전(大明會典)』
  • 『동문휘고(同文彙考)』
  • 김경록, 「명대 공문제도와 행이체계」, 『명청사연구』 26, 2006.
  • 김경록, 「조선시대 사신접대와 영접도감」, 『한국학보』 117, 2004.
  • 김경록, 「조선후기 사대문서의 종류와 성격」, 『한국문화』 35,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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