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민(洪聖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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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6년(중종31)∼1594년(선조27) = 59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시가(時可), 호는 졸옹(拙翁)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당홍(唐洪)인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홍춘경(洪春卿)이고, 어머니 고성이씨(固城李氏)는 고성군(固城君)이맹우(李孟友)의 딸이다. 예문관 대교홍계정(洪係貞)의 손자이고, 영의정홍서봉(洪瑞鳳)의 삼촌이다. 우계(牛溪)성혼(成渾) · 송강(松江)정철(鄭澈)과는 일생 동안 우정이 변함이 없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56)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61년(명종1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4년(명종19) 29세로 식년 문과에 병과 급제하였다. 승문원 부정자에 보임되었다가, 1565년(명종20) 홍문관 정자로 옮겼으며 명종 말년에는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1568년(선조1)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570년(선조3) 이조 좌랑으로 승진하였고, 1573년(선조6)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어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정랑, 의정부 사인, 사헌부 집의를 역임하였고, 1574년(선조7) 홍문관 응교에 임명되었다. 1575년(선조8) 사은사로 명(明)나라에 가서, 태조이성계(李成桂)의 종계(宗系)와 고려 4왕에 대한 시역(弑逆)에 관해 이미 여러 주청사(奏請使)들이 변무(辨誣)한 사정을, 『속수대명회전(續修大明會典)』에서 개정하여 실어줄 것을 주청하였다. 그리하여, 신종(神宗)만력제(萬曆帝)의 허락과 예부(禮部)의 확실한 약속을 받고 돌아왔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1580년(선조13) 이문(吏文) 중시(重試)에서 장원을 하여,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고,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1583년(선조16) 대사헌이 되었고(『계갑일록(癸甲日錄)』), 이어 홍문관으로 옮길 때, 심의겸(沈義謙)을 지지하는 서인으로 지목되어 동인들의 견제를 받았으나, 청렴하다는 명망이 있어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1584년(선조17) 황정욱(黃廷彧)이 주청사에 임명되어 역관(譯官)홍순언(洪純彦)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교섭할 적에, 홍성민이 그 주문(奏文)을 지었기 때문에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되었다. 1585년(선조18)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586년(선조19) 예조 판서로 전임하였다. 1588년(선조21)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선조가 싫어하던 중봉(重峯)조헌(趙憲)을 학관(學官)에 임명하였기 때문에 파직되었다. 1590년(선조23) 사은사윤근수(尹根壽)가 명나라에서 종계를 변무한 『대명회전』 전체 한 질(帙)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자, 마침내 종계변무의 교섭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 동안 주청사로 갔던 윤근수 · 유홍(兪泓) · 황정욱 · 홍성민 등 19명에게 광국공신(光國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포상하였다.(『재조번방지(再造藩方志)』 권1) 이때 홍성민은 원훈(元勳)이 되는 것은 사양하여, 광국공신 2등에 책훈되었고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으며,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591년(선조24) 좌의정정철이 광해군(光海君)이혼(李琿)의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신성군(信城君)이후(李珝)를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실각하였는데, 그때 중추부 판사로 있던 홍성민도 그 일당으로 몰려서 함경도 부령(富寧)으로 유배당하였다.(『계곡집(谿谷集)』 권6)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귀양에서 풀려나자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승문원 제조로 중국에 긴급히 보내는 이문의 주문을 작성하였다. 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마침 모친상을 당하였으므로 사퇴하였다. 1593년(선조26) 호조 판서로 기복(起復)되었으나, 일곱 차례나 사직서를 올리고 수복된 서울로 먼저 돌아왔는데, 어머니의 3년 상을 마치지도 못하고 1594년(선조27) 6월 7일 서울의 임시 거처[僑舍]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겨우 59세였다.

저서로는 『졸옹집(拙翁集)』이 있다.

종계변무의 교섭

1400년(정종2)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국교가 정상화되었을 때, <종계변무>가 한중 외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 문제가 되었다. <종계(宗系)>는 태조이성계(李成桂)의 ‘왕가(王家) 가계(家系)’를 말하고, <변무(辨誣)>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다’는 뜻이다. 명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조훈(祖訓)」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가 고려의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조선은 주청사를 보내어 이것을 바로잡아 달라고 명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후대 황제들이 선대 『태조실록(太祖實錄)』 등을 마음대로 고칠 수가 없었으므로, 이 문제는 외교상 해결하지 못할 과제로 남게 되었다. 명나라에서 『대명회전』의 속편을 편찬하게 되자, 조선에서는 <종계변무>를 위한 주청사를 계속 파견하였는데, 1519년(중종14)에 보낸 주청사남곤(南袞)은 명나라 예부의 제본(題本)을 받아 왔다. 그 제본에는 “종계가 이인임의 후손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태종(太宗)문황제(文皇帝)의 조지(詔旨)를 받들어 개정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였고, 이성계가 고려의 공민왕 · 우왕 · 창왕 · 공양왕의 4왕을 죽였다는 악명은,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서 분명하게 ‘공민왕왕요(王瑤)가 혼미하여 이성계가 대중에게 추대를 받아서 왕이 되었다.’라고 고쳤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명회전』의 내용이 고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중종, 명종, 선조는 주청사를 잇달아 보냈다.

1575년(선조8) 홍성민은 사은사로 북경에 가서 종계와 악명에 관하여 이미 변무된 사실을 새로 만드는 『대명회전』에 자세히 실어주기를 요청하였다. 이때 명나라 예부 상서만사화(萬士和)는 증수되는 『대명회전』에 이 두 가지를 상세히 싣겠다고 약속하였다. 또 홍성민은 신종만력제에게 <종계변무>를 강력히 호소하여 개정을 허락하는 황지(皇旨)를 얻어 냈다. 1576년(선조9) 『속수대명회전』이 완성되었는데, 종계와 악명이 모두 조선의 요구대로 개정되었다. 명나라 예부에서 황제의 칙서(勅書)에 이 사실을 첨부하여 조선에 통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홍성민은 개정된 『대명회전』이 반포(頒布)된 이후로 미뤄달라고 요청하고 귀국한 다음에도 홍성민은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1588년(선조21) 『속수대명회전』의 반포를 청하러 갔던 유홍이 돌아오면서 가지고 온 황제의 칙서에, “홍성민이 주청하였을 때 이미 황제가 허락하였다”라는 구절이 있어, 그가 <종계변무>를 해결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1590년(선조23) 사은사윤근수가 북경에서 돌아올 때 개정된 『속수대명회전』 228권 전체 한 질(帙)을 받아 오면서 <종계변무>는 일단락되었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18)

성품과 일화

홍성민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성품이 간소하고 담박하며, 온화하고 조용하였다. 또한 자품이 탁월하고 지조가 깨끗하였다. 그는 세상의 모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과 세상의 명예나 이익과 재물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하여 자기가 사는 집이 기울어 허물어지고 먹을 끼니가 떨어지는 때도 있었으나, 그는 태연하게 앉아서 마치 과거 공부를 하는 사람처럼 서적만을 탐독하였다. 그는 인자하고 겸손하여,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항상 몸과 마음을 낮추었을 뿐만 아니라, 시속(時俗)의 기호(嗜好)에 따라서 억지로 자기 모습을 바꾸지도 않았다. 벼슬을 시작한 때부터 스스로 결심한 바가 있어, 벼슬 하는 동안 내내 품위를 고상하게 지키고 행동을 개결(介潔)하게 하여 남의 말을 맹종하지 않았다.

율곡(栗谷)이이(李珥) · 성혼과 친하게 지내면서, 정철 · 윤두수(尹斗壽) 등과 함께 서인을 이끌었는데, 그는 서인의 지도급 인물로서 그 논의와 지론이 엄정하였다. 조정의 반열에 나아가서 임금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그는 정직하고 남에게 아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비들이 모두 그를 ‘길한 사람[吉人]’이라 일컬었다. 그는 친구 신응시(辛應時)만장(挽章)에 “지하에 가서 율곡을 만나거든, 오늘날의 시사(時事)가 매우 잘못된 것을 부디 말해주시오.”라고 썼다가, 동인의 공격을 받아서 외방으로 쫓겨난 적도 있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207) 홍성민의 문장은 맑고 아름다웠는데, 임금의 교서(敎書)를 지을 적에는 그가 붓만 손에 잡으면 당장 글이 술술 나왔다고 한다. 그가 저술한 글들이 병화(兵火)에 유실되었으나, 그는 그 글들을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모조리 암기하고 있었으므로, 나중에 이것을 다시 글로 써서 여러 질(帙)의 초고를 만들어 집안에 간직하였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 후진들이 그가 갈무리한 초고들을 편집하여 그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驪州) 남쪽 이포리(梨浦里)의 언덕에 있는데 상촌(象村)신흠(申欽)이 지은 묘지명이 남아 있다.(『상촌집(象村集)』 권23)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연안부사(延安府使)윤희(尹曦)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홍서익(洪瑞翼)은 문과에 급제하고, 분 병조 참의를 지냈다. 딸은 도승지김시헌(金時獻)의 처가 되었다. 손자 홍명구(洪命耈)는 문과에 급제하여 평안도관찰사를 지내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원도 김화(金化) 백전(栢田) 전투에서 순절하였고, 손자 홍명하(洪命夏)는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냈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계곡집(谿谷集)』
  • 『계갑일록(癸甲日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재사초(寄齋史草)』
  • 『동각잡기(東閣雜記)』
  • 『상촌집(象村集)』
  • 『석담일기(石潭日記)』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시정비(時政非)』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유천차기(柳川箚記)』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재조번방지(再造藩方志)』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