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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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 관찬 지리총지.

개설

명대 찬수된 전국 지리총지로 1461년 완성되었다. 이 책은 1370년(홍무 3) 찬수한 『대명지서』를 토대로 완성되었다. 이 책은 명대 행정 구역의 유관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을 뿐 아니라 이웃 국가의 풍속·지리·문화 등에 대해서도 정리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이 지리지에서 언급한 내용상의 오류가 지적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조선의 실상이 현실과 다르게 묘사된 부분이 있다고 하여 외교적으로 수정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중국의 지리와 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를 습득할 수 있어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편찬/발간 경위

1458년 영종(英宗)이 이현(李賢) 등에게 중수를 명하여 1461년 4월에 완성하였다. 이보다 앞서 명초 1370년 태조 홍무제는 위준민(魏俊民)·황지(黃篪)·유엄(劉儼)·정봉(丁鳯) 등에게 명하여 『대원대일통지(大元大一統志)』의 체계에 따라 『대명지서(大明志書)』를 찬수하도록 하였고 이후 1384년에 『대명청류천문분야서(大明淸類天文分野書)』를 찬수하기도 하였다. 토목보의 변[土木─變] 이후 제위에 오른 대종(代宗) 경태제는 제위 연간에 전국 지리총람으로서 『환우통지(寰宇通志)』를 찬수하게 하였는데 양경 및 13포정사사 그리고 149개의 부(府)를 편목하였고 건치·연혁·군명·형세·풍속·산천·토산 등 38개의 항목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1457년 탈문의 변[奪門之變]을 통하여 복위한 영종은 경태 연간의 총지가 간략하고 번거로움이 마땅하지 않고 취하고 버림 역시 합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현(李賢) 등에게 중수를 명하여 1461년(천순 5)에 완성하였다. 영종이 직접 서문을 쓰고 『대명일통지』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홍치 연간과 만력 연간에도 재차 수정되면서 건치 관련 내용이 증가되었다.

서지 사항

판본으로 1461년의 만수당(萬壽堂) 각본이 있고 1505년의 신독재(愼獨齋) 각본, 1588년의 귀인재(歸仁齋) 각본, 사고전서본(四庫全書本)이 있다. 1983년 대만(台湾) 상무인관(商務印館)에서 대연각사고전서본(文淵閣四庫全書本)을 영인하였다.

구성/내용

이 책은 『대원대일통지』의 체제를 연용하여 명의 행정 구획을 대강으로 하여 분권하고 항목을 세웠다. 권1~5는 경사(京師), 권6~18은 남경(南京), 권19~21은 산서(山西), 권22~25는 산동(山東), 권26~31은 하남(河南), 권32~37 섬서(陝西), 권38~48은 절강(浙江), 권49~58은 강서(江西), 권59~72는 호광(湖廣), 권73권은 육번초토사사(六番招討使司), 권74~78은 복건(福建), 권79~82는 광동(廣東), 권83~85는 광서(廣西), 권86~87은 운남(雲南), 권88은 귀주(貴州)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북경·남경의 양경과 13포정사사는 모두 부·직예주와 현으로 나누어 건치, 연혁, 군의 이름, 지세, 풍속, 산천, 토산, 서원, 고적, 인물 등 수십여 개의 항목을 기재하였다. 이 외에도 권89와 90은 외이(外夷)의 각국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대명일통지』는 내용이 매우 풍부하고 고금을 관통하여 전국의 각 지역의 자연과 사회, 역사와 현황에 관한 각종 정황을 구분하여 서술하였으며, 이웃 나라도 아울러 언급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에서는 『대명일통지』가 오류가 있음이 종종 지적되었는데 특히 조선의 풍속에 대한 기록이 관료들의 유교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으므로 명의 사신을 통하여 수정을 요구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19년 3월 5일).

참고문헌

  • 黃卓越·桑思奮 주편, 『中國大書典』, 中國書店, 1994.
  • 박인호, 「명·청대 중국 지리서에 나타난 대조선 역사지리인식: 조선시기 역사지리 연구의 추이와 관련하여」, 『경북사학』 21, 경북사학회, 1998.
  • 張英聘, 「論《大明一統志》的編修」, 『史學史硏究』, 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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