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선(朴東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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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2년(명종17)~1640년(인조18) = 79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자수(子粹), 호는 서포(西浦)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서울 출신이다. 사재감(司宰監)정(正)박응천(朴應川)의 아들이고,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박동현(朴東賢)의 막내 아우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9년(선조2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590년(선조23) 증광(增廣)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었다. 1593년(선조26) 예문관(藝文館)검열(檢閱)에 임명되고, 시강원(侍講院) 설서(說書)로 옮겼는데, 광해군(光海君)이 세자(世子)로서 전주(全州)에서 무군(撫軍)할 때 수종하고 시강원 사서(司書)가 되었다. 1594년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는데, 동료들이 최영경(崔永慶)의 죽음을 논하면서 서인(西人) 정철(鄭澈)을 무함하는 것을 보고 이를 배척하다가 봉상시(奉常寺)주부(主簿)로 좌천되었다. 1595년 병조좌랑에 임명되었다가, 남포현감(藍浦縣監)으로 나갔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이 일어나서, 홍주(洪州: 지금의 홍성)를 침범할 때 충청도(忠淸道)수영(水營)의 군사와 남포(藍浦)·보령(保寧)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홍주성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다. 1599년(선조32) 병조정랑에 임명되었다가,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수안군수(遂安郡守)로 나갔으며, 1604년(선조37) 군자감(軍資監)정(正)·사복시(司僕寺)정(正)을 거쳐, 1605년 통례원(通禮院)상례(相禮)로 임명되고, 1606년 부평부사(富平府使)로 나갔다.

이몽학의 반란 진압

1596년(선조29) 서얼(庶孼) 출신 이몽학(李夢鶴)이 “왜적을 막고 나라를 바로잡겠다.”라고 하면서 충청도 홍산(鴻山: 지금 부여)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홍주로 향해 진격하자, 홍주목사(洪州牧使)홍가신(洪可臣)은 민병(民兵)을 모으고, 홍주에 사는 무장 임득의(林得義)·박명현(朴名賢) 등과 함께 성을 지키면서 반란군과 싸웠다. 이웃 고을 남포현감 박동선(朴東善)이 변란의 소문을 듣고, 충청도수사(忠淸道水使) 최호(崔浩)에게 급히 달려가서 군병을 동원하여 홍주를 구원하자고 청하니, 수사 최호가 ‘수군(水軍)은 육지에서 싸우는 병사가 아니다.’ 하면서 난색을 표하자, 박동선은 큰소리로 ‘지금이 어느 때인데 수군과 육군을 따지는가?’ 하여 드디어 수영에 있는 군병을 모두 동원하게 하는 한편, 보령현감(保寧縣監)황응성(黃應聖)에게 본현(本縣)의 군사를 소집하여 함께 홍주성에 들어가서 방어하도록 하였다. 그 뒤 이몽학이 부하에게 죽음을 당하고 반란이 평정되었는데, 공훈을 포상할 때 홍가신을 비롯하여, 최호·박명현·임득의 등이 모두 포상을 받았으나, 박동선의 실상은 알려지지 않아서 포상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끝내 입을 다물고 자신의 공로를 일체 말하지 않았다.

광해군 시대 활동

광해군이 즉위하여, 그가 시강원의 관원으로서 수종한 공로를 포상하여,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품시키고, 대사간(大司諫)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613년(광해군5) 동지사(冬至使)의 부사(副使)가 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와서 1614년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갔다가,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왔다. 이때 조정에서 집권한 북인(北人)이이첨(李爾瞻) 등이 ‘폐모론(廢母論)’을 일으켜서 백관들로 하여금 대궐 뜰에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할 것을 상소하게 하였는데, 이에 반대하는 서인(西人) 38명만은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다. 폐모를 정청하던 날 하리(下吏)가 그 이름을 진참자(進參者)의 대열에 몰래 써놓았는데, 박동선이 그 사실을 알고 즉시 불참(不參)하겠다는 뜻을 스스로 밝히니, 사람들은 그가 어려운 일을 하였다고 칭찬하였다. 그 뒤에 그는 도성(都城)에서 자취를 감추고 경기도 외지에 물러가서 은거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인조(仁祖)가 즉위하자 1623년 대사간에 임명되었고, 1624(인조2) 이괄(李适)의 난 때 병조참의로서 인조를 공주(公州)까지 호종(扈從)하였다. 반란이 평정된 뒤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1625년(인조3)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의정부(議政府)우참찬(右參贊)으로 승진하였으며, 이듬해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인조를 강화도(江華島)까지 호종하였으며,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를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경연(經筵)동지사(同知事)을 겸임하였다. 그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인조가 윤허하지 않았다. 다음해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1630년(인조8) 원종(元宗: 인조의 아버지)의 장릉(章陵)을 추숭(追崇)하는 추숭도감(追崇都監)제조(提調)가 되어, 동료와 함께 존호(尊號)의 자수(字數)를 줄이기를 청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삭탈관직(削奪官職)되었다. 그러나, 좌의정(左議政)이정귀(李廷龜)와 우의정(右議政)김상용(金尙容)이 차자를 올려 그를 용서하여 주도록 간청하여 도로 서용(敍用)되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원손(元孫: 소현세자의 아들)과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을 모시고 강화도 교동(喬桐) 등지로 피란했다가, 호란이 진정되어 돌아와서 좌참찬(左參贊)·경연 지사 등을 지냈다. 그가 조정에 벼슬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인 1640년(인조18) 1월 2일 노병으로 죽었는데, 향년 79세였다.

저서로 『서포기문(西浦記聞)』이 있다.

성품과 일화

박동선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천성이 온화하고 후덕하면서도 엄격하고 신중하였다. 질박하고 성실하여 꾸미는 것이 없었으며, 평소에 외물(外物)에 마음을 쓰지 않아서 거실(居室)이 항상 쓸쓸하였다. 선행을 좋아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진심에서 나왔으므로, 완고하고 비루한 자라고 하더라도 그를 공경하여 ‘후덕장자(厚德長者)’라고 일컬었다. 젊어서부터 조정에 나아가면 조용하고 겸양하여 남과 경쟁하지 않고 조심스러워 하여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는 듯하였으나, 대절(大節)에 임하거나 대사(大事)를 당하면 의리를 지키고 정도를 지키는 것이 늠름하여 꺾을 수 없는 기상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 용기에 감탄하였다. 여러 번 대사헌이 되었으나, 지론(持論)이 관대하고 공평하였으며, 일을 맡아서는 자기 주장을 돌이키지 않았다. 이를테면 병인년· 정묘년의 논계(論啓)는 대가(大家)와 친구들에게 관계되어 난처한 일이었으므로, 시론(時論)이 더욱 그를 존중하였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서는, “박동선은 타고난 자질이 부드럽고 후하나, 일을 맡아서는 강직하였다. 일찍이 혼탁한 시대에 살면서도 바른 도리를 지키며 흔들리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묘소와 비문

숙종(肅宗) 때 정헌(貞憲)이란 시호를 내렸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金浦) 마산리(馬山里)의 언덕에 있는데, 윤증(尹拯)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대동야승(大東野乘)』
  • 『계곡집(谿谷集)』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약천집(藥川集)』
  • 『서계집(西溪集)』
  • 『속잡록(續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조경일록(朝京日錄)』
  • 『포저집(浦渚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