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덕(萬世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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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파견된 명군의 전투사령관.

개설

만세덕은 정유재란 때 파견된 경리(經理)양호(楊鎬)가 울산(蔚山) 전투에서 패하자 그를 대신하여 파견되었다. 그러나 곧 일본군이 철수하였고, 만세덕은 일본군을 추격하여 부산 등 해안가까지 추격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명군의 주력이 철수한 후에도 만세덕 등 일부는 남아서 조선을 방어하고 일본을 견제하였다.

가계

시조는 만걸(萬杰), 부는 만암(萬岩)이다.

활동 사항

만세덕은 1571년 진사(進士)에 뽑혔고, 남양(南陽)과 원성(元城)의 수령, 협서안찰사첨사(陜西按察司僉事), 조주지부(趙州知府), 산동안찰사첨사(山東按察司僉事), 순무(巡撫) 등을 역임하였다.

명나라는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요동포정사참정(遼東布政使參政)이던 양호를 경리조선도어사(經理朝鮮都御史)로 파견하였으나, 양호가 울산 도산(島山) 전투의 전공 보고와 관련하여 탄핵을 받고 돌아가게 되자, 순무 만세덕으로 대신하게 하였다(『선조실록』 31년 8월 28일). 만세덕은 일본군이 조선에서 물러난 이후인 11월 말에 한양에 도착하여 선조와 접견했다(『선조실록』 31년 11월 25일).

임진왜란이 끝났지만 명나라는 명군을 철수하면서도 만세덕 등 일부 군대를 남겨두어 조선의 방어를 담당하게 하였다(『선조실록』 32년 5월 24일). 그런데 만세덕은 조선에 있으면서 탐욕을 부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그의 아들까지도 각종 물품을 요구하였다(『선조실록』 32년 5월 25일)(『선조실록』 32년 9월 29일)(『선조실록』 33년 8월 30일). 그는 또 조선의 각 문묘(文廟)에 있는 공자(孔子) 위패의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에서 왕(王) 자를 사(師) 자로 고칠 것, 공자의 아버지인 계성공(啓聖公)의 사당을 건립할 것, 공자의 제자 72현(賢)을 모실 것, 호거인(胡居仁)·진헌장(陳獻章)·왕수인(王守仁)·설선(薛瑄) 4현(賢)을 종사(從祀)하여 중국의 제도와 같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선조실록』 34년 1월 2일).

1600년 철군하여 중국으로 돌아갔으며, 총독(摠督)으로 승진하여 조선의 군무(軍務)를 관장하다가 1602년 병사하였다(『선조수정실록』 33년 9월 1일)(『선조실록』 34년 8월 23일)(『선조실록』 35년 2월 3일)(『선조실록』 36년 3월 25일).

숙종 때에 부산 자성(子城)에서 부러진 비(碑)가 발견되었는데, 명나라의 경리만세덕의 동정(東征)한 공(功)을 서술하고, 장사(將士) 59인의 성명이 음각(陰刻)되어 있었다. 이에 새로이 만세덕을 위해 묘우(廟宇)를 세우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5년 2월 3일). 흔히 자성대(子城臺)로 불리는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은 임진왜란 때 왜적이 부산성을 헐고 성의 동남부에 일본식 성을 쌓아 지휘소로 이용했다가 왜적이 물러간 뒤에는 명나라의 만세덕군(萬世德軍)이 진주한 일이 있어 만공대(萬公臺)라고 했다고도 전해진다.

학문과 사상

저술 및 작품

『황중독(湟中犢)』, 『경략독(經略犢)』, 『해상고(海上稿)』, 『새하곡(塞下曲)』, 『간독우어(竿犢偶語)』, 『해방주의(海防奏議)』, 『경리주의(經理奏議)』, 『경략주의(經略奏議)』

묘소

미상

상훈 및 추모

태자태보병부상서(太子太保兵部尙書)

참고문헌

  • 임종욱, 『중국역대인명사전』, 이회문화사, 201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