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淸白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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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결백’한 깨끗한 관료를 지칭하는 말로, 고려~조선시대에 특별히 국가에서 선발하여 청백리안(淸白吏案)에 이름이 올랐던 훌륭한 공직자들.

개설

청백리(淸白吏)는 전통적으로 깨끗한 공직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청백’이라는 말은 ‘청렴결백(淸廉潔白)’의 약칭으로 유교문화권에서 가장 이상적인 관료의 미덕을 표현한 것이다. 청백리는 청렴한 관리를 지칭하는 일반 용어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고려~조선시대에 특별히 국가에서 선발하여 청백리안 즉 청백리 대장에 이름이 올랐던 사람들을 말하였다. 또 정확히 말하자면 청백리는 작고한 사람들에 대한 호칭이고, 산 사람에 대하여는 보통 염근리(廉勤吏) 혹은 염리(廉吏)라고 불렀다(『숙종실록』 20년 7월 23일). 깨끗하고 유능한 관리를 뜻한다. 염근리나 청백리에 선발되면 당사자에게는 승진이나 보직에 특혜를 주었고, 자손들에게는 벼슬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그 수가 많았기 때문에 후대에는 수혜자를 적장자나 적장손으로 한정하였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로는 세종대의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성종대의 허종(許琮), 선조대의 이원익(李元翼)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태조 때의 심덕부(沈德符)처럼 청백리로 선발되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당대에 칭송되던 청렴한 인물들이 많았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선발된 사람들만을 청백리라고 할 수는 없으며,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도 아니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는 태조 때 안성(安星) 등 5인을 청백리로 뽑은 이래 태종 때 8인, 세종 때 15인, 세조 때 8인, 성종 때 20인, 중종 때 34인, 명종 때 45인, 선조 때 26인, 인조 때 13인, 숙종 때 22인, 경종 때 6인, 영조 때 9인, 정조 때 2인, 순조 때 4인 등 모두 217인을 청백리 혹은 염근리로 선발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청백리 선발은 일정한 제도가 있어 정규적으로 선발하는 것이 아니어서 때로는 많이 뽑기도 하고 때로는 적게 뽑거나 뽑지 않기도 하였다. 효종-현종 때를 비롯하여 조선후기에는 한동안 청백리 선발이 중지된 때도 있었다. 또 ‘청백리’와 ‘염근리’의 분간이나 의미가 분명치 않은 것도 있고, 자료마다 명단이 다른 것도 있다. 비교적 잘 정리된 자료인 『청선고(淸選考)』에는 186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이 밖에 자료에서 빠졌거나 비공식적으로 칭송된 청백리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 조선초 안평부원군(安平府院君)이서(李舒)의 경우, 그가 청백리에 선정되지는 않았으나, 그의 죽음과 관련된 졸기에서 평하기를, “이서는 정직하고 방엄(方嚴)하며, 청백(淸白)하고 검소하여 스스로 분수를 지켰으며, 평소의 생활에서도 하루 종일 반듯하고 꼿꼿하게 앉아서 지냈다.”(『태종실록』 10년 9월 9일)라 하여 청렴결백한 관원으로 말하고 있다.

이렇게 관원이 사후 청백리에 선정되면 자기 자신의 영예에 그치지 않고 후손들에까지 특혜가 주어졌다. 청백리 자손에 대한 관직 등의 특혜는 조선의 정책과도 결부된 것으로, 관직 사회의 기강과 도덕성 확립 차원에서 이해된다. 그리하여 사풍(士風)의 진작을 위해 청백리 자손의 등용이 이루어지거나(『중종실록』 2년 4월 6일), 충신·효자와 동급으로 녹용(錄用)이 추진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2년 11월 25일). 한편 1695년(숙종 21)의 경우에는 이례적으로 청백리와 염근리가 동시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때 청백리에 피선된 사람은 고 영의정 이시백(李時白)·홍명하(洪命夏), 우의정 이상진(李尙眞), 판중추부사 조경(趙絅)·강백년(姜栢年), 이조 참판 조석윤(趙錫胤), 예조 참판 유경창(柳慶昌), 좌참찬 박신규(朴信圭)·최관(崔寬), 우윤 이지온(李之醞), 강계부사 성이성(成以性), 병조 참지 이후정(李后定), 진선 조속(趙涑), 예빈시 정 홍무(洪茂), 경상좌수사 홍우량(洪宇亮), 덕원부사 강열(姜說), 순천군수 이태영(李泰英)이다. 염근리에 피선된 사람은 호조 판서이세화(李世華), 부호군강세귀(姜世龜), 전 군수윤추(尹推)이다. 이세화와 강세귀에게는 가자를 명하고, 윤추에게는 준직(準職)의 제수를 명하였다(『숙종실록』 21년 7월 11일).

변천

청백리를 선발하고 표창하는 제도는 중국 고대에서 시작되었다. 공식적으로 문헌에 남아 있는 것은 한나라 때인 B.C 168년(문제 12)에 ‘염리’를 선발하여 표창하고 곡식과 비단으로 상을 준 것이 처음이다. 한 무제 때는 전국에서 청렴한 사람을 뽑아 특별히 벼슬을 주기도 하였다. 그 후 중국 여러 왕조에서는 이를 본받아 청백리를 선발하여 표창하고 우대함으로서 관료들의 기풍을 세우고 미덕을 장려하였다. 후한대의 양진(楊震), 양(梁)대의 서면(徐勉), 수대의 방언겸(房彦謙), 송대의 두건(杜愆)과 같은 인물이 대표적으로 유명한 청백리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청백리를 표창하는 전통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1136년(고려 인종 14)에 청렴하고 절개 있는 사람들을 뽑아 벼슬을 준 기록이 있다. 최석(崔奭)·윤해(尹諧)·최영(崔瑩) 등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들이다. 조선전기에는 대체로 청백리를 현직 관리들 중에서 선발하였는데, 예조에서 후보자를 뽑아 올리면 의정부의 대신들이 심의하여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때로는 서울의 2품 이상 재상급 고관들과 사헌부 대사헌, 사간원 대사간 등이 후보자를 추천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주로 비변사에서 이 일을 하였는데, 생전에 염근리로 뽑혔거나 사망한 인물들 중에서 청렴으로 칭송되었던 관료들을 청백리로 선정하였다.

의의 및 평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청백리를 선발하여 표창하고 이를 제도화한 것은 고대 중국에서 비롯된 덕치주의를 지향하던 유교정치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관료들의 기강과 도덕성을 확립하고 장려하기 위한 정책적 필요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였다. 물론 두 왕조에서는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감찰기관을 두기도 하고 고발제도를 운영하기도 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였다. 조선과 같은 유교국가에서는 관료들의 자발적인 도덕성 함양과 염치 숭상의 기풍을 기르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이를 위해 고안된 것이 청백리 제도였다.

청백리나 염근리로 선발된 사람은 승진이나 보직에 많은 특혜를 받았고, 죽은 후에도 자손들에게 벼슬을 주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는 관료로서의 큰 명예였으며 가문을 빛내는 일이기도 하였다. 반대로 부정부패한 관료는 탐관오리(貪官汚吏) 혹은 장리(臟吏)라고 불렀다. 탐관오리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았거나 처벌받은 관리들은 장리안(臟吏案)에 수록되어 본인의 관직생활이 막히는 것은 물론 그 자손들이 과거를 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한번 장리로 지목되면 당사자의 관직생활에 결정적인 하자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두고두고 가문의 수치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청백리 제도는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시대 관료 사회에서 예의염치를 숭상하는 기풍을 장려하고 부패를 방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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