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시(鄭復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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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2년(중종 17)∼1595년(선조 28) = 74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호조 참의(參議)돈녕부(敦寧府)도정(都正) 등을 지냈다. 자는 이건(以建)이고, 호는 계담(桂潭), 또는 계헌(桂軒)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충청도 회덕(懷德)이다. 아버지는 천문교관(天文敎官)을 지낸 정화(鄭華)이고, 어머니 영양 남씨(英陽南氏)는 진사(進士)남식(南軾)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부장(部將)정희경(鄭姬卿)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삼가현감(三嘉縣監)정광린(鄭光鄰)이다. 동생 정복원(鄭復元)과 함께 서경덕(徐敬德)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다. 명사(名士) 윤결(尹潔) 및 진우(陳宇) 등과 절친한 사이였다.

명종 시대 활동

1546년(명종 1) 형제가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동춘당집(同春堂集)』 권20 「통정대부호조참의지제교정공행장(通政大夫戶曹參議知製敎鄭公行狀)」 이하 「정복시행장」으로 약칭] 1555년(명종 10)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4세였다.[『방목(榜目)』]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557년(명종 12) 경상좌도평사(慶尙左道評事)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거쳐, 형조 좌랑(佐郞)과 호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정복시행장」] 1558년(명종 13) 단성 현감(丹城縣監)으로 나갔다.[「정복시행장」] 1562년(명종 17) 부친상을 당하였고, 1564년(명종 19)에 상복을 벗고는 예조 좌랑 겸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에 임명되었고, 1565년(명종 20)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가 되었다. 당시 윤원형(尹元衡)이 불법으로 남의 노비 수십 명을 강탈한 사건이 재판에 계류된 채 오래도록 판결이 나지 않고 있었다. 당시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윤원형의 권세에 겁을 먹고 그릇되게 판결하려 하자, 정복시(鄭復始)가 강력히 간쟁하여 마침내 노비들을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었다. 윤원형이 크게 노하여 그를 법으로 얽어서 죄에 몰아넣으려고 뒷조사를 하였으나 나온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정복시행장」]

이어 내직(內職)으로 들어와서 예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와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였으며, 1566년(명종 21)에는 고부군수(古阜郡守)가 되었다.[「정복시행장」] 이듬해인 1567년(명종 22) 5월 흉년이 발생하자 나라에서는 그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이에 정복시가 상소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림파(士林派)의 신원을 간청하였다. 그러자 명종이 노하여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이 정복시의 소장을 보니 망녕된 말을 많이 늘어놓았다. 상벌은 임금에 의해 시행되는 것인데, 임금에게 죄인을 용서하라 하며 대사(大赦)하는 날을 잊지 않도록 하고, 국가에서 무죄한 사람을 죽인 일이 없는데, 선비를 살해하지 말 것을 주청하였으니, 지극히 해괴한 일이다. 내가 죄를 다스리고 싶으나 이미 구언한다는 전교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였다.[『명종실록(明宗實錄)』명종 22년 5월 2일] 결국 정복시는 고부군수에서 체직되어 형조 정랑(正郞)이 되었다.[「정복시행장」]

그는 당시의 명사(名士)였던 윤결 및 진우 등과 절친한 사이였는데,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윤결과 진우 등이 체포되어 죽었다. 정복시와 그의 형제들도 모두 죽을 뻔하였으나, 그의 아버지 정화가 먼저 낌새를 알아채고 그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화를 면하였다.[「정복시행장」]

선조 시대 활동

선조 초년에 발탁되어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과 성균관 사예(司藝)와 성균관 사성(司成)으로 옮겼고, 이어 전라도에 가서 재상(災傷)을 살폈다.[「정복시행장」] 1571년(선조 4) 장악원(掌樂院)정(正)종부시(宗簿寺) 정, 군자감(軍資監) 정, 내섬시(內贍寺) 정을 역임하였으며, 이때 춘추관 편수관(編修官)을 겸임하였다. 여러 차례 향시(鄕試)시관(試官)이 되었는데, 사람을 보는 안목이 매우 밝았으므로 칭찬이 자자하였다. 또한 어사(御史)로서 평안도를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무(慰撫)하기도 하였다.[「정복시행장」]

1572년(선조 5) 모친상을 당한 후, 1574년(선조 7) 내자시(內資寺) 정과 사옹원(司饔院) 정, 선공감(繕工監) 정, 사복시(司僕寺) 정을 지냈으며, 산릉 수보도감(山陵修補都監)을 겸임하였다. 통례원(通禮院) 좌우 통례(通禮)로서 사헌부 집의(執義)를 겸임하였고, 호서 지역에 가서 재상(災傷)을 살폈다. 1575년(선조 8) 영남좌도(嶺南左道)의 과장(科場)에서 변란이 생겨 구속된 선비들이 거의 30여 명이나 되었는데, 명을 받고 그곳에 가서 조사하고는 변란을 주동한 몇몇 사람만 죄주고 나머지는 모두 너그럽게 처리하여 석방시켰으므로, 영남 사람들이 칭송하였다.[「정복시행장」]

1576년(선조 9)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급하여 의주목사(義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권극례(權克禮)도 동시에 품계가 올라 길주목사(吉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함경도 지역에 우려스러운 일이 많았는데, 그가 원래 문무를 겸전(兼全)한 재주가 있다고 일컬어졌으므로 대신이 계청하여 그를 권극례와 바꾸어 임명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할머니 이씨(李氏)의 승중상(承重喪)을 당하였고, 복을 벗은 뒤에는 상호군(上護軍)파주목사(坡州牧使)를 거쳐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에 임명되어, 오위장(五衛將)을 겸임하였다. 1582년(선조 15) 관압사(管押使)로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와서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가을에 다시 오위장에 임명되었다.[「정복시행장」]

이듬해인 1583년(선조 16) 송응개(宋應漑)와 허봉(許篈) 등이 터무니없는 일을 꾸며 율곡(栗谷)이이(李珥)를 모함하였다. 이에 왕이 그 실상을 헤아리고서 누차 준엄한 하교를 내렸으나, 도승지(都承旨)박근원(朴謹元)이 송응개 등과 한패거리가 되어 끊임없이 계속 진달하게 하니, 왕이 크게 노하여 박근원 등을 모두 축출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는 특명으로 그를 가승지(假承旨)에 임명하여 승정원에 입직(入直)하게 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16년 8월 6일, 「정복시행장」]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광주목사(廣州牧使)와 양주목사(楊州牧使)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호조 참의와 돈녕부 도정이 되었다.[「정복시행장」]

1591년(선조 24) 오위장이 되었으나, 병이 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선조실록』선조 24년 4월 12일]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 충청도 회덕(懷德)에 있는 장사(莊舍)에서 노년을 보내다가, 1595년(선조 28) 9월 7일 병으로 회덕의 본가(本家)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4세였다.[「정복시행장」]

그는 시문(詩文)에 뛰어났는데, 그의 시문을 모은 『계담집(桂潭集)』이 전해진다.

성품과 일화

정복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타고난 자질이 호방하고 쾌활하였으며 기국(器局)이 커서 자잘한 예절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다. 침착하여 말수가 적었고 기쁨이나 노여움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평소에 성품이 깐깐하여 남들과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벼슬살이의 진퇴는 한결같이 운명에 맡겼다. 벼슬에 있는 40년 동안에 권력자의 집을 찾아간 적이 없었고 평소 마음속에 비루하게 여긴 자들과는 만나더라도 못 본체하였다. 그런 까닭에 초년에는 윤원형에게 해를 당하고 중년에는 또 유영경(柳永慶)에게 미움을 사서 계속 배척을 당하였으므로 벼슬이 높이 오르지 못하였다.[「정복시행장」]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들보다 뛰어나고 도량이 범상치 않아서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학업이 나날이 향상되었다. 나이 12세 때에 아버지를 모시고 옥천(沃川)의 적등진(赤登津)을 지나다가 한 문사(文士)를 만났는데, 그 문사가 운자(韻字)를 부르니, 그가 즉시 응하여 “많고 적은 길손들은 바쁘게 길을 가는데, 갈매기는 한가로이 물 위에 떠있네.[多少行人忙裏過 白鷗閑泛水中天]”라는 구절을 지어서 내놓았다. 이를 본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그 시구를 판자에 새겨서 누상(樓上)에 내걸었는데, 이때부터 시문에 능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조금 성장한 뒤에는 동생 정복원과 함께 책 상자를 짊어지고 송도(松都)에 가서 화담(花潭)서경덕에게 학업을 배웠다.[「정복시행장」]

일찍이 집안에 전염병이 번져서 전염된 자마다 번번이 죽어 나갔는데, 두 아우가 함께 전염병에 걸려 병세가 매우 위독해지자 몸소 약을 달여 밤낮으로 병구완을 하였다. 그 아우들이 죽자 좌우로 어루만지면서 예(禮)와 슬픔을 극진하게 다하여 초상에서부터 장사 때까지 상차(喪次)를 떠나지 않았고, 시신에 입히는 옷이나 관에 넣는 물건을 모두 여한(餘恨)이 없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그는 끝내 아무런 탈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신기하게 여기면서 유곤(庾袞)에게 비교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손아래 누이 하나가 일찍 과부가 되어 자력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자, 자기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면서 위무하고 사랑함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였으며, 그 우애심을 친척에게까지 미루어 극진한 은혜로 대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그 의리에 감복하였다고 전해진다.[「정복시행장」]

묘소와 후손

묘소는 대전광역시 대덕구 석봉동에 있는데, 동춘당(同春堂)송준길(宋浚吉)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있다.[「정복시행장」]

부인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통례원(通禮院) 인의(引義)안치성(安致誠)의 딸이다. 자녀는 4남을 두었는데, 장남 정울(鄭爩)은 선무랑(宣務郞)이고, 차남 정혁(鄭爀)은 생원(生員)이며, 3남 정융(鄭烿)은 참봉(參奉)이고, 4남 정작(鄭爝)은 선교랑(宣敎郞)이다. 측실(側室)에서 2녀를 두었는데, 윤기조(尹起祚)와 덕창령(德昌令)이경지(李鏡智)에게 각각 시집갔다.[「정복시행장」]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송자대전(宋子大全)』
  • 『계갑일록(癸甲日錄)』
  • 『계미기사(癸未記事)』
  • 『국조보감(國朝寶鑑)』
  • 『석담일기(石潭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운암잡록(雲巖雜錄)』
  • 『청음집(淸陰集)』
  • 『혼정편록(混定編錄)』
  •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
  • 『미암집(眉巖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은봉전서(隱峯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