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섬시(內贍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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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각 궁과 여진족 등에게 공급하는 음식 등을 관장하던 호조에 속한 아문.

개설

내섬시는 조선전기 각 궁(宮)과 전(殿)에 대한 공상(供上)과 2품 이상 관리에게 하사하는 술, 왜인(倭人)과 여진족(女眞族) 같은 야인(野人)에게 공급하는 음식물과 직물[織造] 등을 관장하던 정3품 아문이었다. 조선후기에는 기능의 축소로 종6품 아문으로 강등되었다. 조선후기 내섬시는 기름과 식초 및 소찬(素饌)류를 각 궁과 각 전에 올리는 일만을 관할하는 관청으로 있다가, 1882년(고종 19) 관제 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경위 및 목적

1392년(태조 1) 설치된 덕천고(德泉庫)를 1403년(태종 3) 6월 관제 개혁 때 내섬시로 명칭을 바꾸었다. 내섬시는 1405년 육조(六曹)의 분직(分職)과 소속을 정하면서 호조의 속아문이 되었다.

조직 및 역할

관원으로는 제조(提調), 정3품 정(正), 종3품 부정(副正), 종4품 첨정(僉正), 종5품 판관(判官), 종6품 주부(主簿), 종7품 직장(直長), 종8품 봉사(奉事) 각 1명이 있었다. 주부 이상의 관원은 업무의 특수성을 인정받아 임기에 구애되지 않고 3년 동안 계속 근무할 수 있는 구임직(久任職)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내섬시의 기능 축소로 종5품 판관 이상의 관원은 모두 폐지되어 종6품 주부가 책임자로 근무하는 관청으로 격이 낮아졌다. 내섬시에는 경아전(京衙前)으로 서리(書吏)가 16명 있었지만, 『속대전』에서는 서리를 서원(書員)으로 격을 낮추고 정원도 5명으로 줄었다. 경공장(京工匠)으로 옹장(瓮匠) 8명, 방직장(紡織匠) 30명, 성장(筬匠) 2명이 소속되어 도자기 생산과 직조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 관청수공업의 쇠퇴에 따라 내섬시에 소속된 경공장도 사라져 『대전통편』에는 내섬시 소속 공장은 한 명도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본래 차비노(差備奴) 63명, 근수노(根隨奴) 7명이 배정되어 지방의 공노비가 양인 대신 역(役)을 담당[選上立役]하였다. 그러나 『속대전』 단계에 이르면 이것이 폐지되고, 서울 사람으로 뽑아 역을 담당하게 하고 대신 매달 포(布)를 지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내섬시는 궁중에 음식을 바치는 일 외에도 궁중의 비빈(妃嬪)들이 여자아이를 낳을 경우, 그 산실(産室)에 깔았던 짚자리를 보관하는 권초(捲草)도 담당하였다. 아들을 낳은 권초는 내자시(內資寺)에서 봉안하는 것이 관례였다.

변천

1442년(세종 4) 내섬시에서 관장하던 능라(綾羅)의 직조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내섬시 소속이었던 능라장은 상의원(尙衣院)으로 옮겨졌다. 또한 내섬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재정이 궁핍해지자 1637년(인조 15) 일시적으로 내자시와 병합되었다가 곧 분리되었으며, 1800년(정조 24)에는 의영고(義盈庫)와 합병되기도 했다. 내섬시의 기능은 조선후기에 크게 줄어들었다. 왜인들이 한양에 들어오는 것[漢陽入朝]이 금지되고, 야인들의 입조(入朝)도 없어지자 내섬시에서 담당하던 왜인과 야인에 대한 음식물 공급 업무는 폐지되었다. 2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왕이 술을 하사하는 업무와 직조 기능도 함께 폐지되었다. 다만 기름과 식초 및 소찬류를 각 궁과 각 전에 올리는 일만 관할하는 관청으로 유지되었다. 1882년 관제 개혁 때 폐지되었다.

재정

내섬시의 재정은 조선 초기에는 각 읍의 전세(田稅)로 내는 미두(米豆)와 함께 조선 초기 노비 2천 명이 배정되어 신공(身貢)을 받았다. 조선후기 대동법 실시 이후 내자시 재정은 선혜청(宣惠廳) 57공(貢)의 하나로 편입되어 조달되었는데, 1년에 쌀 4,449석을 배정받았다. 내섬시에서는 이를 내섬시 소속 공인(貢人)에게 지급하여 공인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조달받았다. 선혜청에서 공급받는 재정으로 물품 조달이 어려울 때에는 호조에서 추가로 재정이 배분되었는데, 이를 별무(別貿)라고 한다. 별무는 공물(貢物)을 적어 둔 목록에 있는 물건이 부족할 때 받는 유원공별무(有元貢別貿)와 목록에 없는 것이 필요할 때 받는 무원공별무(無元貢別貿)로 나뉜다. 내자시에 배정된 별무의 규모를 보면, 가장 규모가 컸던 해인 1778년(정조 2)의 경우 유원공별무 940냥, 무원공별무 4,516냥이었다. 중간 규모이던 해인 1785년에는 유원공별무 64냥, 무원공별무 1,151냥이었으며, 가장 적은 해인 1798년의 경우 유원공별무 64냥, 무원공별무 463냥이었다. 1807년(순조 7)의 경우 유원공별무 64냥, 무원공별무 493냥이었다. 내섬시의 회계는 호조판적사(版籍司) 소속 계사 6명 중 한 명이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만기요람(萬機要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 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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