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적사(版籍司)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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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판적사 |
한글표제 | 판적사 |
한자표제 | 版籍司 |
상위어 | 호조(戶曹) |
하위어 | 호구(戶口), 전토(田土), 전곡(錢穀), 식화(食貨) |
관련어 | 회계사(會計司), 경비사(經費司), 급전사(給田司) |
분야 | 경제/재정/전세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이장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판적사(版籍司) |
호조에 속한 세 아문 중 하나.
개설
호조는 태종 초년에 이미 국가 재정의 중심 기구로 확립되었다. 호조는 그 산하에 판적사(版籍司)·회계사(會計司)·급전사(給田司)의 세 아문(衙門)을 두고 호조의 기능을 나누어 맡기었다. 이렇게 확립된 기구가 큰 변화 없이 지속되다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호조 기능이 점차 분화하고 복잡해졌다. 그에 따라 판적사도 그 아래 여러 소속 기구를 포괄하게 되었다. 조선의 다른 아문이나 기구가 그렇듯이 판적사 역시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건국 직후 국정 담당자들은 고려의 재정아문인 삼사(三司)를 존속시켜 국가 재정의 출납 운영과 회계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1401년(태종 1)에 삼사의 명칭이 사평부(司平府)로 바뀌는 등 점차 그 위상이 약화되다가 마침내 1405년(태종 5) 삼사가 호조에 귀속되면서 호조가 국가 재정의 중추 기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호조는 호구(戶口)·전토(田土)·전곡(錢穀)·식화(食貨) 등 일반적인 행정 업무와 세금 수취 관련 업무 등 국가 재정과 관련된 전반적인 업무를 관장하였다. 그리고 그 산하에 판적사·회계사·급전사를 두었고, 각각 정5품인 정랑(正郞)과 정6품인 좌랑(佐郞)을 1명씩 배치하여 담당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중 판적사는 호구·부역·공물 등에 대한 관할과 농상의 장려, 경작 상태와 자연재해 실태 파악 및 빈민 구제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1455년(세조 1)에 판적사 낭관(郎官)이 하천의 제언(堤堰) 관리를 감찰하는 업무를 새로 맡는 등 직제와 기능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지만, 『경국대전』에 위의 내용이 거의 그대로 반영되었다.
변천
호조의 삼사 분장 체제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훈련도감 병사들의 급료를 관리하기 위한 별영색(別營色)이 설치되었다. 1640년(인조 18)에는 각 관서의 부족한 물종과 중국·일본과의 무역가 등을 보관하거나 관리하는 별고색(別庫色)이 신설되었다. 그리고 규정에는 없지만 각사에서 추가로 지출해야 할 예산을 조달하기 위하여 판별방(版別房)을 설치하였는데, 이를 판적사가 관장하였다. 1694년(숙종 20)에는 사섬시(司贍寺), 1767년(영조 43)에 사축서(司畜署)가 각각 혁파되면서, 호조의 직제는 정조대 초반에 3사 14방(房)의 체제로 정비되었다.
새롭게 갖추어진 체제에서 판적사에는 잡물색(雜物色)·금은색(金銀色)·주전소(鑄錢所)·수세소(收稅所)·사섬색(司贍色) 등 5방이, 경비사에는 전례방(前例房)·별례방(別例房)·판별색(版別色)·요록색(料祿色)·세폐색(歲幣色)·응판색(應辦色)·별고색·별영색·사축색(司畜色) 등 9방이 각각 소속되었다. 회계사에는 하위 기구인 방, 색이 설치되지 않았다. 판적사는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으로 호조가 탁지아문(度支衙門)으로 바뀌면서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만기요람(萬機要覽)』
- 『탁지지(度支志)』
- 이장우, 「삼사와 호조」, 『조선초기 전세제도와 국가재정』, 일조각, 199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