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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총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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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4년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중종의 제 1왕자 인종이 30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인종의 외삼촌 윤임이 정권을 잡고, 사림파 인물을 많이 등용하였으므로, 윤사익은 한성부 판윤으로 있었으나, 위기감을 느끼고 윤원형·이기 등 소윤(少尹)과 손을 잡았다. 1545년 7월 인종이 나이 31세로 갑자기 승하하자, 소윤이 문정왕후의 [[밀지(密旨)]]를 받고 중종의 제 2왕자 경원대군(慶原大君: 명종)을 옹립하였다. 이리하여 명종이 나이 12세로 즉위하고, 명종의 어머니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되었다. 그때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은 중추부사정순붕(鄭順朋)·호조 판서임백령(林百齡)·형조 판서이기·공조 판서허자(許磁) 등과 결탁하였다. 그해 8월 윤원형은 문정대비의 언문 밀지를 받아서, 인종의 외삼촌 윤임과 좌의정유관(柳灌)·이조 판서유인숙(柳仁淑) 3명을 먼저 귀양 보냈다가 죽이고, 뒤이어 많은 사림파 인사들을 잡아다가 심문하여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이것이 <[[을사사화(乙巳士禍)]]>다. | 1544년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중종의 제 1왕자 인종이 30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인종의 외삼촌 윤임이 정권을 잡고, 사림파 인물을 많이 등용하였으므로, 윤사익은 한성부 판윤으로 있었으나, 위기감을 느끼고 윤원형·이기 등 소윤(少尹)과 손을 잡았다. 1545년 7월 인종이 나이 31세로 갑자기 승하하자, 소윤이 문정왕후의 [[밀지(密旨)]]를 받고 중종의 제 2왕자 경원대군(慶原大君: 명종)을 옹립하였다. 이리하여 명종이 나이 12세로 즉위하고, 명종의 어머니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되었다. 그때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은 중추부사정순붕(鄭順朋)·호조 판서임백령(林百齡)·형조 판서이기·공조 판서허자(許磁) 등과 결탁하였다. 그해 8월 윤원형은 문정대비의 언문 밀지를 받아서, 인종의 외삼촌 윤임과 좌의정유관(柳灌)·이조 판서유인숙(柳仁淑) 3명을 먼저 귀양 보냈다가 죽이고, 뒤이어 많은 사림파 인사들을 잡아다가 심문하여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이것이 <[[을사사화(乙巳士禍)]]>다. | ||
− | 처음에 인종의 병세가 위중할 적에 병조 판서[[권벌(權橃)]]이 대궐의 방비를 철저하게 하면서 한성부 판윤윤사익 등과 함께 인종의 병석을 지켰는데 윤사익이 권벌에게 경원대군을 빨리 맞아들이자고 재촉하였다. 그러나 권벌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는데, 권벌이 경원대군을 모셔다가 인종의 임종(臨終)에 참여시키면, 바로 경원대군이 후계자로 인정을 받게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윤(大尹)]]윤임은 겉으로는 중종의 서출 제 6왕자 봉성군(鳳珹君)[[이완( | + | 처음에 인종의 병세가 위중할 적에 병조 판서[[권벌(權橃)]]이 대궐의 방비를 철저하게 하면서 한성부 판윤윤사익 등과 함께 인종의 병석을 지켰는데 윤사익이 권벌에게 경원대군을 빨리 맞아들이자고 재촉하였다. 그러나 권벌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는데, 권벌이 경원대군을 모셔다가 인종의 임종(臨終)에 참여시키면, 바로 경원대군이 후계자로 인정을 받게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윤(大尹)]]윤임은 겉으로는 중종의 서출 제 6왕자 봉성군(鳳珹君)[[이완(李岏)]]을 후계자로 거론하였으나, 실제로는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손자 계림군(桂林君)[[이류(李瑠)]]를 옹립하려고 하였다. 인종이 너무나 갑자기 돌아갔기 때문에 윤임이 미처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명종이 후계자로 결정되고, 처음으로 명종이 문무백관들을 인대(引對)하는 날, 갑자기 윤사익이 나서서 아뢰기를, “대행왕(大行王: 죽은 인종)의 병환이 크게 위중했을 때 신이 권벌에게 마땅히 대군(大君: 명종)을 급히 맞이하여 궐내로 들어오게 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권벌이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권벌이 변명하기를, “그때 대신들이 있었으므로, 신이 능히 혼자서 결단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고, 얼른 빈청(賓廳)으로 물러나왔다. 평소 권벌이 윤사익의 사람됨이 바르지 못하다고 여러 번 책망하였기 때문에 윤사익이 이를 보복한 것이다. 이때 공조 판서허자가 윤사익을 향하여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당신이 권벌을 때려잡고자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위태하고 의심스러운 때를 당하여, 권벌은 대의로써 대계(大計)를 힘써 도왔는데,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는가.” 하니, 윤사익이 낯을 붉히며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권벌은 평안도 삭주(朔州)로 귀양 가서 유배지에서 죽었다.(『퇴계집(退溪集)』 권49 「권벌 행장」 참고.) |
<을사사화>를 일으킨 소윤의 핵심 인물 중에서 ‘을사 2흉(凶)’은 윤원형과 이기이고, ‘을사 3간(奸)’은 정순붕·임백령·정언각이다. 이들 5명이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들인데, 대윤과 사림파에 대한 숙청에 강경하였다. 이에 비하여 이언적·허자·[[구수담(具壽聃)]] 등은 대윤에 동정적이고 온건하였다. 강경파 이기는 심복 진복창(陳復昌)·이무강(李無疆) 등을 사주하여 온건파 허자를 탄핵하여 홍원(洪原)으로 귀양 보내서, 그 뒤에 유배지에서 죽게 하였다. 또 구수담은 이기의 오촌 조카로서 이기의 편에 가담하여 대사헌이 되었는데, 이기의 난폭한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대간에서 공개적으로 이기의 비행을 탄핵하였다. 이기가 분노하여 구수담을 반드시 죽이려고 하자, 공조 판서윤사익은 이기의 뜻에 영합하여 구수담과 평소에 사사로이 나눈 말을 일일이 이기에게 고하니, 이기가 윤사익에게 상달(上達)하도록 강권하는 한편, 이무강에게 외부에서 이에 호응하게 하였다. 윤사익은 원래 자기 주견(主見)이 없는 사람인데, 그 아들 윤옥은 성격이 조급하고 남에게 붙좇기를 좋아하여, 아버지로 하여금 권신 이기가 시키는 대로 구수담을 논핵하게 하였다. 1548년(명종 3) 윤사익은 경연에서 대사헌구수담이 평소에 유관을 변명한 사실을 비판하여, 구수담을 갑산(甲山)으로 귀양 가게 만들어, 구수담은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 <을사사화>를 일으킨 소윤의 핵심 인물 중에서 ‘을사 2흉(凶)’은 윤원형과 이기이고, ‘을사 3간(奸)’은 정순붕·임백령·정언각이다. 이들 5명이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들인데, 대윤과 사림파에 대한 숙청에 강경하였다. 이에 비하여 이언적·허자·[[구수담(具壽聃)]] 등은 대윤에 동정적이고 온건하였다. 강경파 이기는 심복 진복창(陳復昌)·이무강(李無疆) 등을 사주하여 온건파 허자를 탄핵하여 홍원(洪原)으로 귀양 보내서, 그 뒤에 유배지에서 죽게 하였다. 또 구수담은 이기의 오촌 조카로서 이기의 편에 가담하여 대사헌이 되었는데, 이기의 난폭한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대간에서 공개적으로 이기의 비행을 탄핵하였다. 이기가 분노하여 구수담을 반드시 죽이려고 하자, 공조 판서윤사익은 이기의 뜻에 영합하여 구수담과 평소에 사사로이 나눈 말을 일일이 이기에게 고하니, 이기가 윤사익에게 상달(上達)하도록 강권하는 한편, 이무강에게 외부에서 이에 호응하게 하였다. 윤사익은 원래 자기 주견(主見)이 없는 사람인데, 그 아들 윤옥은 성격이 조급하고 남에게 붙좇기를 좋아하여, 아버지로 하여금 권신 이기가 시키는 대로 구수담을 논핵하게 하였다. 1548년(명종 3) 윤사익은 경연에서 대사헌구수담이 평소에 유관을 변명한 사실을 비판하여, 구수담을 갑산(甲山)으로 귀양 가게 만들어, 구수담은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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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과 일화'''== | =='''성품과 일화'''== | ||
− | 윤사익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솔직하고 차분하며, 행동이 깨끗하고 꾸밈이 없어서 번잡한 것을 싫어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신(功臣)]]심정( | + | 윤사익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솔직하고 차분하며, 행동이 깨끗하고 꾸밈이 없어서 번잡한 것을 싫어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신(功臣)]]심정(沈貞)은 “윤사익은 성품이 염정(恬靜)하고 지조가 깨끗하여 의롭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두루 조처하고 번잡한 업무를 처결하는 일은 잘하지 못할 듯하다.” 하였고, 중종도 그를 평하기를, “청렴하고 간솔한 사람”이라고 하였다.(『중종실록』 참고.) |
− | 윤사익은 반정 공신(反正功臣) 심정과 가까워서 사림파 조광조 일파를 싫어하였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조광조가 하는 짓은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의 ‘조종(祖宗)을 본받을 것 없다.’고 하던 것과 같다.” 하였다. 그의 조카 윤관(尹瓘)은 사람파 [[김정( | + | 윤사익은 반정 공신(反正功臣) 심정과 가까워서 사림파 조광조 일파를 싫어하였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조광조가 하는 짓은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의 ‘조종(祖宗)을 본받을 것 없다.’고 하던 것과 같다.” 하였다. 그의 조카 윤관(尹瓘)은 사람파 [[김정(金淨)]]의 제자였는데, 삼촌 윤사익의 말을 조광조 일파에게 전하였다. 이에 격분한 조광조 일파가 윤사익을 호조 좌랑에서 평양 교수로 좌천시켰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 일파가 몰락하였다. 1520년(중종 15) 그 잔당을 잡아들여 문초할 때, 사헌부에서 성균관 [[생원(生員)]]윤관을 잡아와서 심문하자, 윤관이 변명하기를, “나는 김정만을 알 뿐이고 조광조는 본래 서로 교분이 없습니다. 평양 교수로 좌천된 일은 삼촌 윤사익이 승문원(承文院)에 근무할 때에 잘못한 일을 윤광령(尹光齡)이 조광조에게 모두 말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성균관 유생 윤관이 권력을 잡은 조광조 일파에게 아부하여 자기 삼촌을 고자질하여 해쳤습니다.” 하니, 중종이 말하기를, “내 생각은 이렇다. 조광조를 왕안석에 비유하였다면, 어찌 평양 교수로 나가는 데에만 그쳤겠는가? 이제 윤관을 형신(刑訊)하기를 청하는데, 형신하면 사실을 숨질 것이 염려된다. 대신들에게 물어보고 다시 아뢰라.” 하였다.(『중종실록』 참고.) 성균관 생원 윤관은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처외조부이다. 그러므로 후일 사림파 사관들이 실록을 편찬할 때 윤사익에 대해 악평(惡評)하였던 것이다. |
1528년(중종 23) 함경도관찰사를 지낸 중추부 영사정광필의 추천으로 윤사익은 함경도 경성 판관으로 부임하였다. 그때 정광필이 아뢰기를, “경성은 잔폐한 고을이기 때문에 문신 중에서 뽑아서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윤사익은 결직하고 번잡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가 부임하면 반드시 마음을 가다듬어 다스릴 것입니다.” 하였다. 중종이 말하기를, “윤사익은 무재(武才)가 있는 문관(文官)이다. 만약 이런 사람을 보낸다면 [[군관(軍官)]]과 [[무반(武班)]]의 수령들이 반드시 두려워하여 외람된 짓을 못할 것이다.” 하였다. 1530년(중종 25) 함경도관찰사한형윤(韓亨允)이 아뢰기를, “경성 판관윤사익가 판관이 되었을 때, 모두가 말하기를, ‘방어가 매우 절실한 지역이라서 그 사람이 거기에 맞지 않다.’고 하였지만, 윤사익이 매우 엄격하게 무장을 관할하고 조심스럽게 공무를 수행하므로, 경성의 북영이 잘 다스려진다고 합니다.” 하였다. | 1528년(중종 23) 함경도관찰사를 지낸 중추부 영사정광필의 추천으로 윤사익은 함경도 경성 판관으로 부임하였다. 그때 정광필이 아뢰기를, “경성은 잔폐한 고을이기 때문에 문신 중에서 뽑아서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윤사익은 결직하고 번잡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가 부임하면 반드시 마음을 가다듬어 다스릴 것입니다.” 하였다. 중종이 말하기를, “윤사익은 무재(武才)가 있는 문관(文官)이다. 만약 이런 사람을 보낸다면 [[군관(軍官)]]과 [[무반(武班)]]의 수령들이 반드시 두려워하여 외람된 짓을 못할 것이다.” 하였다. 1530년(중종 25) 함경도관찰사한형윤(韓亨允)이 아뢰기를, “경성 판관윤사익가 판관이 되었을 때, 모두가 말하기를, ‘방어가 매우 절실한 지역이라서 그 사람이 거기에 맞지 않다.’고 하였지만, 윤사익이 매우 엄격하게 무장을 관할하고 조심스럽게 공무를 수행하므로, 경성의 북영이 잘 다스려진다고 합니다.”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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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는 경기도 여주(驪州) 대송리(大松里)의 선영(先塋)에 있다. 그의 할머니가 세종 때 명재상 좌의정허조의 2남 3녀 중에서 막내딸이었다. 그러므로, 윤사익은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라면서 자신이 명문 가문 출신이라고 항상 자랑하였다. | 묘소는 경기도 여주(驪州) 대송리(大松里)의 선영(先塋)에 있다. 그의 할머니가 세종 때 명재상 좌의정허조의 2남 3녀 중에서 막내딸이었다. 그러므로, 윤사익은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라면서 자신이 명문 가문 출신이라고 항상 자랑하였다. | ||
− | 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정세걸(鄭世傑)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윤옥은 공조 참판을 지냈고, 딸은 대사헌이중경( | + | 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정세걸(鄭世傑)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윤옥은 공조 참판을 지냈고, 딸은 대사헌이중경(李重慶)의 처가 되었다. 사위 이중경은 명종의 처삼촌 이량(李樑)의 일파가 되어, 윤원형의 세력과 대항하여 싸웠다. 그러므로 장인 윤사익과 사위 이중경이 서로 대립하였는데, 1563년(명종 18) 이량이 몰락하면서 사위 이중경도 파직되어 관직을 떠났고, 그해에 장인 윤사익도 죽었다.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2018년 1월 9일 (화) 22:57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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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윤사익 |
한글표제 | 윤사익 |
한자표제 | 尹思翼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정치·행정가/척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선조 |
집필자 | 윤경수, 이현숙 |
자 | 언례(彦禮) |
시호 | 공호(恭胡)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78년(성종 9) |
사망 | 1563년(명종 18) 2월 26일 |
본관 | 무송(茂松) |
주거지 | 경기도 여주(驪州),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여주(驪州) 대송리(大松里) |
증조부 | 윤보(尹輔): 윤충보(尹忠輔) |
조부 | 윤미견(尹彌堅) |
부 | 윤징(尹徵) |
모_외조 | 죽산박씨(竹山朴氏): 박수신(朴粹信)의 딸 |
처_장인 | 동래정씨(東萊鄭氏): 정세걸(鄭世傑)의 딸→(자녀)1남 1녀 |
자녀 | (1자)윤옥(尹玉) (1녀)이중경(李重慶)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윤사익(尹思翼) |
총론
[1478년(성종 9)∼1563년(명종 18) = 86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공조 판서(判書)이고, 시호(諡號)는 공호(恭胡)이다. 자는 언례(彦禮)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이고, 여주(驪州) 출신으로서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영월 군수(寧越郡守)윤징(尹徵)이고, 어머니 죽산박씨(竹山朴氏)는 박수신(朴粹信)의 딸이다. 사간원 우정언(右正言)윤미견(尹彌堅)의 손자인데, 윤미견은 세종 때 명신 좌의정허조(許稠)의 막내사위였다. 증조부는 안성 군사(安城軍事)윤보(尹輔)인데, 윤충보(尹忠輔)라고도 한다.
중종 시대의 활동
1502년(중종 2)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고, 12년이 지나서, 1514년(중종 9) 알성시(謁聖試)문과(文科)에 갑과 2등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7세였다.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호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가, 사림파(士林派) 조광조(趙光祖) 일파에 의하여 평양 교수(平壤敎授)로 좌천되었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서 조광조 등 사림파가 몰락하자, 병조 좌랑(佐郞)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520년(중종 15) 사헌부에서 탄핵하기를, “좌랑윤사익은 병조에 합당하지 않으니, 체직하소서.” 하여, 중종이 그를 교체하였다. 1522년(중종 15)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임명되었고, 1523년(중종 18)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1525년(중종 20)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는데, 그해 말에 암행어사(暗行御使)에 임명되어 전라도 지방을 염찰(廉察)하고 돌아와서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1526년(중종 21)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말에 대간(臺諫)에서 탄핵하기를, “세자(世子: 인종)의 춘추가 점점 장성해지고, 학문도 날로 성취되어 가는데, 필선윤사익은 인물이 용렬하여 본직(本職)에 합당치 않으니, 속히 체직시키소서.” 하였다. 당시 죽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동생 윤임(尹任)이 세자를 보필하면서, 조광조에게 배척당한 윤사익을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윤사익과 윤임은 사이가 크게 나빠졌다. 1528년(중종 23) 함경도관찰사를 지낸 중추부(中樞府)영사(領事)정광필(鄭光弼)의 추천으로 윤사익은 함경도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부임하였는데, 그가 북병영(北兵營)의 무장(武將)을 엄격하게 관할하고 6진(鎭)을 철저하게 방어하였으므로, 함경도관찰사가 경성 판관 윤사익의 치적을 극구 칭찬하였다. 1535년(중종 30) 의정부에서 이조와 의논하여 사유(師儒)에 적합한 사람을 선발하였는데, 윤사익·정사룡(鄭士龍) 등 13명이 함께 뽑혔다. 이리하여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에 임명되었다가,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로 옮겼다. 1538년(중종 33) 의정부에서 이조와 의논하여 청백리(淸白吏)를 선발하였는데, 윤사익은 송흠(宋欽)·정연(鄭淵)·이언적(李彦迪)·정매신(鄭梅臣)과 함께 뽑혔다. 중종이 전교하기를, “청백리를 뽑는 것은 특별히 권장한다는 뜻을 보이려는 것이니, 선발된 사람들에게 각각 1품씩 가자(加資)하라.” 하여, 윤사익은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었다.
1538년(중종 33) 병조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1539년(중종 34) 천추사(千秋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가 북경 옥하관(玉河館)에 머물 때, 명나라 예부(禮部)의 주객사(主客司) 낭중(郎中)에게 증수(增修)하는 『대명회전(大明會典)』에서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고친 부분을 보여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자 예부 낭중이 말하기를, “완성되지 않은 책을 외국인에게 보여줄 수 없습니다. 황제가 그대 나라를 중하게 여기고 있으니 반드시 힘써 고쳐줄 것입니다.” 하였다. 1540년(중종 35) 예조 참의가 되었는데, 그때 대마도주(對馬島主)가 표류한 우리나라 백성을 돌려보냈으므로, “예조 참의윤사익”의 이름으로 감사하는 편지를 보냈다. 1540년(중종 35)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다가, 1541년(중종 36)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 1542년(중종 37) 공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다가, 1544년(중종 34)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는데, 그와 가까운 이기(李芑)는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으로, 그의 아들 윤옥(尹玉)은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이 되었다. 그때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이 그와 가까운 이기와 윤사익 부자를 밀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때 중종이 정청(政廳)에 전교하기를, “윤사익은 청렴한 사람인데, 지금 인물이 부족하니, 특별히 가자하여 한성부 판윤으로 주의(注擬)하라.” 하였다. 그러나 사간원에서 윤사익을 탄핵하자, 중종이 대답하기를, “지금 경연(經筵)에서 들으니, 조정에서는 마땅히 청렴하고 간솔한 사람을 써야 한다고 했으니, 개정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을사사화(乙巳士禍)>와 윤사익
1544년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중종의 제 1왕자 인종이 30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인종의 외삼촌 윤임이 정권을 잡고, 사림파 인물을 많이 등용하였으므로, 윤사익은 한성부 판윤으로 있었으나, 위기감을 느끼고 윤원형·이기 등 소윤(少尹)과 손을 잡았다. 1545년 7월 인종이 나이 31세로 갑자기 승하하자, 소윤이 문정왕후의 밀지(密旨)를 받고 중종의 제 2왕자 경원대군(慶原大君: 명종)을 옹립하였다. 이리하여 명종이 나이 12세로 즉위하고, 명종의 어머니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되었다. 그때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은 중추부사정순붕(鄭順朋)·호조 판서임백령(林百齡)·형조 판서이기·공조 판서허자(許磁) 등과 결탁하였다. 그해 8월 윤원형은 문정대비의 언문 밀지를 받아서, 인종의 외삼촌 윤임과 좌의정유관(柳灌)·이조 판서유인숙(柳仁淑) 3명을 먼저 귀양 보냈다가 죽이고, 뒤이어 많은 사림파 인사들을 잡아다가 심문하여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이것이 <을사사화(乙巳士禍)>다.
처음에 인종의 병세가 위중할 적에 병조 판서권벌(權橃)이 대궐의 방비를 철저하게 하면서 한성부 판윤윤사익 등과 함께 인종의 병석을 지켰는데 윤사익이 권벌에게 경원대군을 빨리 맞아들이자고 재촉하였다. 그러나 권벌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는데, 권벌이 경원대군을 모셔다가 인종의 임종(臨終)에 참여시키면, 바로 경원대군이 후계자로 인정을 받게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윤(大尹)윤임은 겉으로는 중종의 서출 제 6왕자 봉성군(鳳珹君)이완(李岏)을 후계자로 거론하였으나, 실제로는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손자 계림군(桂林君)이류(李瑠)를 옹립하려고 하였다. 인종이 너무나 갑자기 돌아갔기 때문에 윤임이 미처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명종이 후계자로 결정되고, 처음으로 명종이 문무백관들을 인대(引對)하는 날, 갑자기 윤사익이 나서서 아뢰기를, “대행왕(大行王: 죽은 인종)의 병환이 크게 위중했을 때 신이 권벌에게 마땅히 대군(大君: 명종)을 급히 맞이하여 궐내로 들어오게 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권벌이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권벌이 변명하기를, “그때 대신들이 있었으므로, 신이 능히 혼자서 결단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고, 얼른 빈청(賓廳)으로 물러나왔다. 평소 권벌이 윤사익의 사람됨이 바르지 못하다고 여러 번 책망하였기 때문에 윤사익이 이를 보복한 것이다. 이때 공조 판서허자가 윤사익을 향하여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당신이 권벌을 때려잡고자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위태하고 의심스러운 때를 당하여, 권벌은 대의로써 대계(大計)를 힘써 도왔는데,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는가.” 하니, 윤사익이 낯을 붉히며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권벌은 평안도 삭주(朔州)로 귀양 가서 유배지에서 죽었다.(『퇴계집(退溪集)』 권49 「권벌 행장」 참고.)
<을사사화>를 일으킨 소윤의 핵심 인물 중에서 ‘을사 2흉(凶)’은 윤원형과 이기이고, ‘을사 3간(奸)’은 정순붕·임백령·정언각이다. 이들 5명이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들인데, 대윤과 사림파에 대한 숙청에 강경하였다. 이에 비하여 이언적·허자·구수담(具壽聃) 등은 대윤에 동정적이고 온건하였다. 강경파 이기는 심복 진복창(陳復昌)·이무강(李無疆) 등을 사주하여 온건파 허자를 탄핵하여 홍원(洪原)으로 귀양 보내서, 그 뒤에 유배지에서 죽게 하였다. 또 구수담은 이기의 오촌 조카로서 이기의 편에 가담하여 대사헌이 되었는데, 이기의 난폭한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대간에서 공개적으로 이기의 비행을 탄핵하였다. 이기가 분노하여 구수담을 반드시 죽이려고 하자, 공조 판서윤사익은 이기의 뜻에 영합하여 구수담과 평소에 사사로이 나눈 말을 일일이 이기에게 고하니, 이기가 윤사익에게 상달(上達)하도록 강권하는 한편, 이무강에게 외부에서 이에 호응하게 하였다. 윤사익은 원래 자기 주견(主見)이 없는 사람인데, 그 아들 윤옥은 성격이 조급하고 남에게 붙좇기를 좋아하여, 아버지로 하여금 권신 이기가 시키는 대로 구수담을 논핵하게 하였다. 1548년(명종 3) 윤사익은 경연에서 대사헌구수담이 평소에 유관을 변명한 사실을 비판하여, 구수담을 갑산(甲山)으로 귀양 가게 만들어, 구수담은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명종 시대의 활동
1545년(명종 즉위) 9월 <을사사화>를 다스리는 데에 공로가 많은 정순붕 등 29명을 ‘홍제보익 공신(弘濟保翼功臣)’으로 녹훈하였는데, 윤사익도 이에 포함되었다. 뒤에 보익 공신을 ‘정난 공신(定難功臣)’으로 고쳤다. 1546년(명종 1) 원종 공신(原從功臣) 1등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가자할 때 윤사익은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되고,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말에 주강(晝講)에서 특진관(特進官)윤사익이 아뢰기를, “근래 민간에 저축이 없고, 지난해에도 흉년이 들었는데 금년에도 수재와 한재가 있어서 양맥(兩麥)이 흉작이라서, 현재 식량이 떨어진 자가 많습니다. 재용은 국가에 매우 중한 것이니, 수입을 헤아려 지출해야 합니다.” 하였다.(『명종실록(明宗實錄)』 참고.) 1548년(명종 3) 공조 판서윤사익이 나이가 70이 되었다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550년(명종 5) 조강(朝講)의 자리에서 특진관윤사익이 평소 대사헌구수담과 이야기할 때 유관을 힘써 변명한 사실을 폭로하자, 대간에서 그의 죄를 탄핵하여, 구수담을 갑산으로 귀양 보내어, 유배지에서 죽게 만들었다. 당시 윤사익은 공조 판서로 『중종실록(中宗實錄)』편수관에 참여하였는데, 그해 실록이 완성되었다.
1552년(명종 7) 영의정이기가 공조 판서윤사익의 아들 윤옥을 강력히 추천하여, 윤옥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이것은 윤사익이 구수담을 제거해준 데에 대한 이기의 보상이었다. 1553년(명종 8) 공조 판서윤사익이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기를, “나이 거의 80이 되어 날로 정신이 흐리고 기운이 쇠약해지니, 만약 오래도록 판서의 관직에 있으면 끝내 국사를 그르칠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명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사림파 사관(史官)이 논평하기를, “이미 국사를 그르친 것도 많은데, 어찌 뻔뻔스럽게 ‘끝내 국사를 그르칠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고, 시니컬하게 그를 비판하였다.(『명종실록』 참고.) 1553년(명종 8) 중추부 지사(知事)로 전임하였는데, 9년 동안 공조 판서로 봉직하다가, 직무가 비교적 한가한 서반(西班)으로 옮긴 것이다.
1556년(명종 11) 특진관윤사익이 말하기를, “조광조는 비록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더라도 괜찮습니다.” 하고, 조광조 등을 허물하였다. 사관이 논평하기를, “윤사익도 조광조 때에 시론(時論)에 인정받지 못했었기 때문에 원한을 품었다가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의 어리석고 무식한 것이 이와 같았다.”하였다.(『명종실록』 참고.) 1557년(명종 12) 윤사익이 나이 80세가 되었다고 하여 가자하니,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陞品)하였다. 이것은 윤원형이 조강에서 명종에게 건의하였기 때문이다. 1561년(명종 16) 명종의 외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세자빈으로 간택된 윤원형의 친척 황씨(黃氏)가 몸이 약하다고 하여 파혼당하고, 그 대신에 윤사익의 손녀가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는데, 윤옥의 둘째 딸 덕빈윤씨(德嬪尹氏)이다. 그때 아들 윤옥은 승정원 좌승지에 발탁되었다. 1563년(명종 18) 2월 26일 노병으로 윤사익이 돌아갔는데, 향년이 86세였다.
성품과 일화
윤사익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솔직하고 차분하며, 행동이 깨끗하고 꾸밈이 없어서 번잡한 것을 싫어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신(功臣)심정(沈貞)은 “윤사익은 성품이 염정(恬靜)하고 지조가 깨끗하여 의롭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두루 조처하고 번잡한 업무를 처결하는 일은 잘하지 못할 듯하다.” 하였고, 중종도 그를 평하기를, “청렴하고 간솔한 사람”이라고 하였다.(『중종실록』 참고.)
윤사익은 반정 공신(反正功臣) 심정과 가까워서 사림파 조광조 일파를 싫어하였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조광조가 하는 짓은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의 ‘조종(祖宗)을 본받을 것 없다.’고 하던 것과 같다.” 하였다. 그의 조카 윤관(尹瓘)은 사람파 김정(金淨)의 제자였는데, 삼촌 윤사익의 말을 조광조 일파에게 전하였다. 이에 격분한 조광조 일파가 윤사익을 호조 좌랑에서 평양 교수로 좌천시켰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 일파가 몰락하였다. 1520년(중종 15) 그 잔당을 잡아들여 문초할 때, 사헌부에서 성균관 생원(生員)윤관을 잡아와서 심문하자, 윤관이 변명하기를, “나는 김정만을 알 뿐이고 조광조는 본래 서로 교분이 없습니다. 평양 교수로 좌천된 일은 삼촌 윤사익이 승문원(承文院)에 근무할 때에 잘못한 일을 윤광령(尹光齡)이 조광조에게 모두 말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성균관 유생 윤관이 권력을 잡은 조광조 일파에게 아부하여 자기 삼촌을 고자질하여 해쳤습니다.” 하니, 중종이 말하기를, “내 생각은 이렇다. 조광조를 왕안석에 비유하였다면, 어찌 평양 교수로 나가는 데에만 그쳤겠는가? 이제 윤관을 형신(刑訊)하기를 청하는데, 형신하면 사실을 숨질 것이 염려된다. 대신들에게 물어보고 다시 아뢰라.” 하였다.(『중종실록』 참고.) 성균관 생원 윤관은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처외조부이다. 그러므로 후일 사림파 사관들이 실록을 편찬할 때 윤사익에 대해 악평(惡評)하였던 것이다.
1528년(중종 23) 함경도관찰사를 지낸 중추부 영사정광필의 추천으로 윤사익은 함경도 경성 판관으로 부임하였다. 그때 정광필이 아뢰기를, “경성은 잔폐한 고을이기 때문에 문신 중에서 뽑아서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윤사익은 결직하고 번잡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가 부임하면 반드시 마음을 가다듬어 다스릴 것입니다.” 하였다. 중종이 말하기를, “윤사익은 무재(武才)가 있는 문관(文官)이다. 만약 이런 사람을 보낸다면 군관(軍官)과 무반(武班)의 수령들이 반드시 두려워하여 외람된 짓을 못할 것이다.” 하였다. 1530년(중종 25) 함경도관찰사한형윤(韓亨允)이 아뢰기를, “경성 판관윤사익가 판관이 되었을 때, 모두가 말하기를, ‘방어가 매우 절실한 지역이라서 그 사람이 거기에 맞지 않다.’고 하였지만, 윤사익이 매우 엄격하게 무장을 관할하고 조심스럽게 공무를 수행하므로, 경성의 북영이 잘 다스려진다고 합니다.” 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여주(驪州) 대송리(大松里)의 선영(先塋)에 있다. 그의 할머니가 세종 때 명재상 좌의정허조의 2남 3녀 중에서 막내딸이었다. 그러므로, 윤사익은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라면서 자신이 명문 가문 출신이라고 항상 자랑하였다.
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정세걸(鄭世傑)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윤옥은 공조 참판을 지냈고, 딸은 대사헌이중경(李重慶)의 처가 되었다. 사위 이중경은 명종의 처삼촌 이량(李樑)의 일파가 되어, 윤원형의 세력과 대항하여 싸웠다. 그러므로 장인 윤사익과 사위 이중경이 서로 대립하였는데, 1563년(명종 18) 이량이 몰락하면서 사위 이중경도 파직되어 관직을 떠났고, 그해에 장인 윤사익도 죽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문과방목(文科榜目)』
- 『퇴계집(退溪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선원계보(璿源系譜)』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미수기언(眉叟記言)』
- 『동각잡기(東閣雜記)』
- 『농암집(聾巖集)』
- 『묵재집(黙齋集)』
- 『충재집(冲齋集)』
- 『기재집(企齋集)』
- 『호음잡고(湖陰雜稿)』
- 『양곡집(陽谷集)』
- 『입암집(立巖集)』
- 『인재집(忍齋集)』
- 『소고집(嘯皐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목재집(木齋集)』
- 『노봉집(老峯集)』
- 『병곡집(屛谷集)』
- 『야계집(倻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