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벌(權橃)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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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권벌 |
한글표제 | 권벌 |
한자표제 | 權橃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명종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중허(仲虛) |
호 | 충재(冲齋), 훤정(萱亭), 송정(松亭) |
봉작 | 길원군(吉原君) |
시호 | 충정(忠定)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78년(성종9) |
사망 | 1548년(명종3) |
본관 | 안동(安東) |
주거지 | 안동(安東) |
묘소소재지 | 경상도 봉화(奉化) 유곡산(酉谷山) |
증조부 | 권계경(權啓經) |
조부 | 권곤(權琨) |
부 | 권사빈(權士彬) |
모_외조 | 파평윤씨(坡平尹氏): 윤당(尹塘)의 딸 |
형제 | (동생)권장(權檣) |
처_장인 | 화순최씨(和順崔氏): 최세연(崔世演)의 딸 →(자녀)2남 |
자녀 | (1자)권동보(權東輔) (2자)권동미(權東美) |
저술문집 | 『충재집(冲齋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권벌(權橃) |
총론
[1478년(성종9)∼1548년(명종3) = 71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중허(仲虛)이고, 호는 충재(冲齋) 또는 훤정(萱亭) · 송정(松亭)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권사빈(權士彬)의 아들이다. 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윤당(尹塘)의 딸로 성종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의 근친이었다.
중종 시대 활동
30세이던 1507년(중종2)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을 거쳐서, 사간원 정언(正言) · 예조 좌랑 · 홍문관 부교리(副校理) · 병조 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513년(중종8) 사헌부 지평(持平)을 거쳐서, 이듬해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얼마 안 되어 호조 정랑으로 옮겼다가,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영천군수(永川郡守)가 되었다.
1517년(중종12) 장령(掌令)으로 소환되어,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전직되었다. 1518년(중종13) 우부승지(右副承旨)로 발탁되었는데, 임금이 친히 임명한 것이다. 그 뒤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1518년(중종13)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하였다. 이때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장하여, 사림파(士林派)와 훈구파(勳舊派)가 대립하자, 중간에서 이를 조정하려고 노력하였다.
1519년(중종14) 예조 참판으로 옮겼다가, 중추부(中樞府)를 거쳐서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갔다. 그런데, 그 해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가 숙청되자, 사림파인 권벌도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15년 동안 고향 안동에서 지내다가, 1533년(중종28)에 복직되어 용양위(龍驤衛)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밀양부사(密陽府使)를 거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승진하였다. 1539년(중종34) 중추부 지사(知事)로서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을 청하는 주청사(奏請使)에 임명되어, 명(明)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황제의 허락을 받아서 돌아오니, 중종이 기뻐하며 정헌대부(正憲大夫)의 품계로 승진시키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였다. 1540년(중종35) 병조 판서를 거쳐서,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에 올랐으며, 또 1541년(중종36) 예조 판서를 거쳐서, 다음해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중종 시대 권벌은 조광조 · 김정국(金正國) 등의 기호(畿湖) 사림파와 손을 잡고 개혁정치를 추진한 영남(嶺南)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다.
인종~명종 교체 시기 활동
1545년(명종즉위)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어 병조 판서를 맡았으며 길원군(吉原君)에 봉해졌다. 그 해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서 명종의 외숙 윤원형(尹元衡) 일파, 이른바 소윤(小尹) 일파가 인종의 외숙 윤임(尹任) 일파, 곧 대윤(大尹)을 조정에서 몰아내었다. 이때 소윤 일파인 이기(李芑)와 정순붕(鄭順朋) 등이 권벌을 사림파라고 배척하여 전라도 구례(求禮)로 유배시켰다. 그 뒤 1547년(명종2)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에 다시 연루되어 유배지가 평안도 태천(泰川), 삭주(朔州)로 바뀌었다. 1548년(명종3) 3월 26일에 변방의 유배지에서 쓸쓸이 돌아갔는데, 향년 71세였다. 저서로는 『충재집(冲齋集)』 9권 5책이 남아 있다.
무덤과 신원 제향
묘소는 경상도 봉화(奉化)유곡산(酉谷山)에 있고, 정경세(鄭經世)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1567년(선조즉위) 신원(伸寃)되었고, 1570년(선조3) 시호를 충정(忠定)이라 하였다. 1588년(선조21)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568년(선조1) 좌의정에 추증되었다가 1591년(선조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충재집(冲齋集)』
- 『우복집(愚伏集)』
- 『점필재집(佔畢齋集)』
- 『농암집(聾巖集)』
- 『우정집(憂亭集)』
- 『묵재집(默齋集)』
- 『학포집(學圃集)』
- 『입암집(立巖集)』
- 『소재집(穌齋集)』
- 『중봉집(重峰集)』
- 『백사집(白沙集)』
- 『지호집(芝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