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색(柳穡)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561년(명종 16)∼1621년(광해군 13) = 61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贈職)되었다. 자(字)는 자유(子有)이고, 호는 사호(沙湖)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경기도 교하(交河)와 서울이다. 아버지는 병조 참판유영립(柳永立)이고, 어머니 수안 이씨(遂安李氏)는 정국공신(靖國功臣)요산군(遼山君)이기(李夔)의 딸이다. 성균관(成均館)사성(司成)유감(柳堪)의 손자이고, 영의정유영경(柳永慶)의 7촌 조카이며, 영의정이경석(李景奭)의 장인이다. 전주 유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유혼파(柳渾派) · 유습파(柳濕派) · 유지파(柳池派) 3파가 있는데, 유색은 시조 유습의 10대손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2년(선조 15)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2세였다.[『방목』]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면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번번히 낙방(落榜)하였다. 음직으로 전설사(典設司)별좌(別坐)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 등을 역임하였다.

1595년(선조 28) 해주(海州)에서 시행된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5세였다.[『방목』]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는데, 승정원의 가주서(假注書)를 겸임하였다. 1596년(선조 29) 가주서유색은 병을 핑계하고 승정원에 출사하지 않고 임의대로 고향 교하로 내려갔다고 파직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29년 1월 19일]

1597년(선조 30)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서, 검열(檢閱)이 되고, 다음해에 봉교(奉敎)가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0년 8월 24일 · 12월 6일, 선조 31년 7월 14일] 이때 봉교유색과 검열조중립(趙中立)이 사관(史官)의 상번 · 하번으로서 까닭 없이 자리를 비워서, 대간(臺諫)에서 계사(啓辭)하려는데 사관(史官)이 없었고, 승정원(承政院)에서 추고(推考)하려는데 사관(史官)이 없어서 물의를 일으켰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사관(史官)들이 거리낌 없이 앞을 다투어 서로 외출하는 풍습은 다스리지 않으면 아니되므로, 파직시키도록 명하소서.” 하니, 선조가 파직하라고 명하였다.[『선조실록』선조 31년 7월 29일]

1599년(선조 32) 아버지 유영립이 병조 참판으로 있다가 갑자기 돌아가자, 부친상을 당하여 교하의 월롱산(月籠山)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하면서 복제(服制)를 끝마쳤다. 1601년(선조 34)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임명되고, 호조 좌랑(佐郞)으로 옮겼다가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1602년(선조 35)에 다시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좌랑 · 병조 좌랑이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4년 4월 24일 · 11월 6일 · 11월 22일, 선조 35년 7월 3일 · 6월 14일 · 8월 27일]

1603년(선조 36) 어머니를 위하여 외직을 자청해서 평안도영변 판관(寧邊判官)으로 나갔다가, 1604년(선조 37) 영변 판관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백헌집(白軒集)』 권50 「전라도 관찰사 증 영의정 유공 묘표(全羅道觀察使贈領議政柳公墓表)」] 그때 암행어사이유홍(李惟弘)이 평안도 지방을 염찰(廉察)하고 영변 판관유색이 청렴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린다고 보고하여, 선조가 표리(表裏) 1벌을 하사하였다. 1605년(선조 38) 예조 좌랑이 되었다가,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승진되었고, 예조 정랑이 되었다가,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을 거쳐, 홍문관(弘文館)으로 옮겨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백헌집』 권50 「전라도 관찰사 증 영의정 유공 묘표」] 1606년(선조 39)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승진되었다가, 자청하여 배천 군수(白川郡守)로 나갔다. 이때 아버지 유영립의 6촌 동생 유영경이 영의정이 되어 정권을 잡았는데, 소북(小北)의 영수 유영경이 가까운 집안 조카 유색을 이조 정랑의 후보자[望]로 천거하였으나, 유색은 곧바로 사양하고 어머니를 위하여 외직을 자청하였기 때문에 배천 군수가 되었던 것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 2월 광해군이 즉위하자, 선조의 남긴 유교(遺敎)를 받들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던 유영경 · 남이공(南以恭) 등 소북(小北) 일파는 정인홍(鄭仁弘) ·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大北) 일파의 탄핵을 받아 모두 숙청되었는데, 소북의 영수 유영경은 함경도 경흥(慶興)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일찍이 유영경의 집에 출입한 자들은 모두 화를 입었으나, 배천 군수유색만은 홀로 무사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명철(明哲)하다고 일컬었다.[『백헌집』 권50 「전라도 관찰사 증 영의정 유공 묘표」] 유색은 양주목사(楊州牧使)로 승진되었는데, 배천 군수로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1609년(광해군 1) 예빈시(禮賓寺) 부정(副正)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수찬으로 옮겼고, 사복시(司僕寺)정(正)이 되었다.[『백헌집』 권50 「전라도 관찰사 증 영의정 유공 묘표」,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1년 4월 24일 · 7월 26일] 1610년(광해군 2)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고, 집의(執義)로 승진되었으며, 성균관 사성이 되었다가,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고, 장악원(掌樂院)정(正)을 거쳐 홍문관 응교(應敎)로 옮겼다.[『백헌집』 권50 「전라도 관찰사 증 영의정 유공 묘표」, 『광해군일기』광해군 2년 2월 25일 · 3월 23일 · 10월 24일 · 12월 22일 · 12월 26일]

1611년(광해군 3)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임하여 세자를 가르치다가,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그때 사간원 사간유색이 입시(入侍)하여, 전시(殿試)에 아버지와 아들이 시관(試官)거자(擧子)로 같은 시험장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는 이른바 ‘부자상피법(父子相避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그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을 자청하여 평안도선천 군수(宣川郡守)가 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5) 선천 군수에서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614년(광해군 6) 승문원 판교(判校)가 되었다가, 외직으로 평안도강계 부사(江界府使)로 나갔으나, 그해 가을에 조정에서 변방 지방의 수령관을 모두 무관(武官)으로 교체하기로 결정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백헌집』 권50 「전라도 관찰사 증 영의정 유공 묘표」]

1615년(광해군 7)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으며,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옮기고 분(分) 병조(兵曹)참의(參議)가 되었다. 그해 가을에 우승지(右承旨)로 승진하였으나, 광해군의 실정(失政)을 보고, 또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자청하여 황해도장단 부사(長湍府使)로 나갔다.[『백헌집』 권50 「전라도 관찰사 증 영의정 유공 묘표」] 광해군은 유색을 근신(近臣)으로 두려고 하였으나, 유색은 광해군을 멀리 하려고 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외직에 머물기를 원하여,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종2품하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그때 서울의 궁궐을 짓는데 필요한 쌀과 무명 등의 물자를 전라도에서 서울로 보내어 궁궐을 신축하는 데에 도와준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가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여러 고을의 수령 가운데 궁액(宮掖) 곧 궁중 내명부의 힘을 빌어서 인사를 청탁하는 자들이 많았으나, 그는 수령을 출척(黜陟)할 때 공정하고 엄하여 시행하고 인사 청탁을 조금도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그를 아는 사람들이 감히 개인적인 연줄을 타고 인사를 청탁하지 못하였다.[『백헌집』 권50 「전라도 관찰사 증 영의정 유공 묘표」]

1620년(광해군 12) 대북의 권신 한계남(韓繼男) 형제와 싸움을 벌였는데, 그의 동생 한덕윤(韓德胤)이 전라도고산 현감(高山縣監)으로 있을 때 전라도의 큰 도적 몽세(夢世)를 체포하자, 형조 판서한계남이 전라도 관찰사유색에게 전라도의 도적떼를 체포하라고 독촉하였다. 대북의 한계남은 소북의 영수 유영경을 죽이는 데 앞장선 인물이었다. 전라도 관찰사유색은 광해군에게 상소하여 형조 판서한계남을 비난하면서, “전라도에는 도적떼가 없으며, 그의 동생 한덕윤에게 포상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때 한계남 형제의 사주를 받은 사헌부에서 탄핵하기를, “전라도 감사유색은 탐욕스럽고 방자하여 못된 짓을 많이 하기 때문에, 온 도내의 사람들이 마치 수화(水火) 중에 있는 것과 같아서, 원성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장차 변란이 일어날 지경이니, 그를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였으나, 광해군은 유색을 비호하면서, “장차 천천히 조사하여 처리하겠다.”고 대답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12년 10월 29일 · 11월 23일] 전라도 관찰사유색과 형조 판서한계남의 싸움은 대북 일파가 소북의 영수 유영경을 죽인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전라도 관찰사유색은 어머니의 상(喪)을 당한데다가, 형조 판서한계남 형제의 비방을 받아서 몹시 침울하여 모든 일이 즐겁지가 않았다. 또 그는 지방의 외직에 나가서 오랫동안 이곳저곳 옮겨 다니다가 몸에 잔병이 많아졌다. 전라도 관찰사유색은 연이어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간청하였으나, 광해군이 윤허하지 않았다. 1621년(광해군 13) 5월 18일 전주(全州)의 감영(監營)에서 지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61세였다.[『백헌집』 권50 「전라도 관찰사 증 영의정 유공 묘표」]

성품과 일화

유색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그의 묘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백헌집』 권50 「전라도 관찰사 증 영의정 유공 묘표」] 그는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厚德)하며 공손하고 몸을 조심하였다. 어버이를 봉양하는데 그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그 자신 백수(白首) 건달로서 어린 아이처럼 행동하였다. 그러나 자제를 교육할 때에는 아주 엄격하여 법도가 있었고, 고아가 된 조카들을 데려다가 기르고 가난한 친족들을 돌보면서 자기 재산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고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였다. 그는 항상 근검절약하였는데, 1614년(광해군 6) 평안도강계 부사로 나갔을 때 관직 생활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비단옷[緋衣]을 입었다고 한다.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자청한 것이 모두 네 차례였는데, 겨우 외직에서 1, 2년이 지나면 곧 해임되어 고향 교하로 돌아오니, 역시 어버이의 뜻이었다. 전후에 대각(臺閣)에 근무하면서 비록 한 달도 채 재임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언관(言官)의 직무를 맡아서 한 번도 시속(時俗)에 적당히 따른 적이 없었다. 유색은 처음에 벼슬하기 전부터 사람들과 교유(交遊)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벼슬하면서 관직이 비록 높아졌지만, 그의 문 앞에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드물어서 항상 조용하였다.[『백헌집』 권50 「전라도 관찰사 증 영의정 유공 묘표」]

유색의 아버지 유영립이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군이 함흥(咸興)을 공격하였다. 이때 유영립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산속으로 도망하다가 왜군에게 사로잡혔던 일과 왜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유영립이 혼자 탈출하였다가 왜군의 진영에 남은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왜장에게 보라매를 뇌물로 주었던 일이 나중에 서인(西人)들에게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 나중에 유영립은 죽을 때까지 서인들로부터 끊임없는 공격과 비난을 당하였다. 유색은 아버지가 자책하면서 괴로워하던 것을 보고, 그는 관리가 되어서 항상 행동을 조심하여 말을 아꼈다.

1606년(선조 39) 유색이 홍문관 수찬으로 있다가, 자청하여 배천 군수로 나갈 무렵, 아버지 유영립의 6촌 동생 유영경이 영의정이 되어 정권을 잡았는데, 소북의 영수 유영경이 유색을 이조 정랑의 후보자[望]로 천거하였다. 영의정과 이조 정랑이 손을 잡으면, 정국을 마음대로 주도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색은 곧바로 사양하고 어머니를 위하여 외직을 자청하여 배천 군수가 되었다. 선조는 말년에 소북의 영수 유영경과 남이공 등에게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광해군(光海君) 대신 세자로 옹립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리하여 세자 광해군을 옹립하려던 대북의 정인홍 · 이이첨과 소북의 유영경 · 남이공이 대립하여 권력 투쟁을 전개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 2월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영경 · 남이공 등 소북 일파는 정인홍 · 이이첨 등의 대북 일파의 탄핵을 받아 모두 숙청되었는데, 소북의 영수 유영경은 함경도 경흥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이때 일찍이 유영경의 집에 출입한 자들은 모두 화를 입었으나, 배천 군수유색만은 홀로 무사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명철(明哲)하다고 칭찬하였다.[『백헌집』 권50 「전라도 관찰사 증 영의정 유공 묘표」]

유색은 평소에 풀방석에 단정히 앉아서 책상 위의 『근사록(近思錄)』과 주자(朱子)의 저서, 고시(古詩) 두어 권을 마주 대하고 오로지 책만을 읽었을 뿐이다. 천성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일찍이 파주 교하의 호수 위에다 정자를 짓고서 정자 이름을 ‘삼호정(三湖亭)’이라고 붙였는데, 자기 호(號)를 ‘모래 호수’라고 하여 ‘사호(沙湖)’라고 부른 것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정자는 해문(海門)에 임하여 있었기 때문에 바다와 호수의 절경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때때로 그는 폭건(幅巾) 곧 접이 두건에 막 입는 두루마기인 야장(野裝)을 입고 말이나 소를 타고 호반(湖畔)을 왕래하면서 소요(逍遙) 음영(吟詠)하였고, 시골 늙은이들과 더불어 호수에 낚시하면서 세월을 잊어버리기도 하였다.[『백헌집』 권50 「전라도 관찰사 증 영의정 유공 묘표」]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교하 월롱산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사위 이경석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백헌집(白軒集)』 권50 「전라도 관찰사 증 영의정 유공 묘표(全羅道觀察使贈領議政柳公墓表)」] 그의 부음이 알려지자, 광해군이 몹시 애도하고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관찰사유색은 소북의 영수 유영경과 손을 잡지 않았기 때문에 1608년 소북이 몰락할 때 살아 남아서, 전주 유씨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부인 창원 유씨(昌原兪氏)는 예조 정랑유필인(兪必仁)의 딸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유윤창(柳允昌)은 음직으로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차녀는 영의정이경석에게 출가하였다.[『백헌집』 권50 「전라도 관찰사 증 영의정 유공 묘표」]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백헌집(白軒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택당집(澤堂集)』
  • 『중봉집(重峰集)』
  • 『오리집(梧里集)』
  • 『태천집(苔泉集)』
  • 『선원유고(仙源遺稿)』
  • 『백주집(白洲集)』
  • 『감수재집(感樹齋集)』
  • 『간정집(艮庭集)』
  • 『분서집(汾西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