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감(柳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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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4년(중종 9)∼1569년(선조 2) = 56세.]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의 문신으로 성균관(成均館)사성(司成)을 지냈다. 자는 극임(克任)이고, 호는 호은(壺隱) 또는 지재(芝齋)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 유세귀(柳世龜)는 종친부(宗親府)전첨(典籤)이고, 어머니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부윤(府尹)허광(許礦)의 딸이다.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유헌(柳軒)의 손자이고, 형조 판서유훈(柳塤)의 형이다. 전주 유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유혼파(柳渾派) · 유습파(柳濕派) · 유지파(柳池派) 3파가 있는데, 유감은 시조 유습의 8대손이다.

종종 ~ 선조 시대 활동

1537년(중종 22)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고, 3년 뒤에 1540년(중종 35)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7세였다.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얼마 뒤에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로 옮겼다. 1544년(중종 39) 의영고(義盈庫)주부(主簿)를 거쳐 예조 좌랑(佐郞)으로 옮겼다.

1545년(인종 1) 함경도수성도 찰방(輸城道察訪)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두만강 연안의 5진(五鎭) 역로(驛路)가 매우 조잔(凋殘)하고 피폐하여 유감이 아니면 이를 맡아서 개선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북변에서 경험한 것이 나중에 경성(鏡城)에서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좌랑으로 옮겼다. 이때 인종이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승하하고, 12세의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명종의 어머니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되었다. 인종 때 인종의 외삼촌 윤임(尹任)과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는데,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의 소윤(少尹) 일파가 윤임의 대윤(大尹) 일파를 숙청하였다. 이것이 바로 <을사사화(乙巳士禍)>다. 윤임을 지지하던 사림파(士林派) 유학자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은 중추부사정순붕(鄭順朋) · 호조 판서임백령(林百齡) · 병조 판서이기(李芑) · 공조 판서허자(許磁) 등과 결탁하여, 문정대비의 밀지(密旨)를 받고, 인종의 외삼촌 윤임과 좌의정유관(柳灌) · 이조 판서유인숙(柳仁淑) 3인을 체포하여 인종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처형하였고, 대윤 일파의 정희등(鄭希登) · 나숙(羅淑) · 박광우(朴光佑) 등 10여 명도 체포하여 죽였다. 처음에 유감은 대윤과 소윤의 싸움에서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아서 피해를 보지 않았다.

1546년(명종 1) 유감은 호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고, 공조 정랑으로 옮겼다. 1547년(명종 2) 호조 정랑이 되었다가,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으로 옮겼는데, 병조 좌랑윤춘년(尹春年)과 함께 윤원형의 친형 윤원로(尹元老)를 탄핵하였다. 이 일로 윤원로는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이어 유감은 윤원형 일파의 비행(非行)을 공격하다가 체직되었으나 다시 복귀하였다. 그해 겨울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수찬(修撰)이 되었다. 1548년(명종 3)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가, 곧바로 이조 정랑에 임명되어 인사 행정을 맡았는데, 좌의정이기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서 이때부터 소윤의 실세들과 사이가 나빠졌다. 이때 유감은 비록 벼슬이 매우 현달(顯達)하였지만, 소윤 실권자들의 횡포를 보고 벼슬할 마음이 없어졌다.

‘을사 2간(乙巳二奸)’이라고 불리는 윤원형과 이기가 사악한 논리를 전개하여, 인종의 재위가 1년을 넘지 못했다고 하여 종묘(宗廟)부묘(祔廟)하는 것까지 저지하였다. 당시 대간(臺諫)언관(言官)들이 이를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수렴청정하던 문정대비의 제지를 받아서 대간의 봉박(封駁)마저 정지당하였다. 유감은 마침 부친의 병환으로 휴가 중에 있다가, 출사(出仕)하여 소윤의 논리에 대항해서 강직하게 간쟁(諫爭)하여 마침내 유신(儒臣)들의 협력을 얻어내어, 인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게 하였다. 이때 만약 인종(仁宗)이 종묘에 부묘되어 시호를 얻지 못하였다면, 시호 인종 대신에 이름[諱] 이호(李峼)만을 쓰게 되므로, 후세에 조선의 왕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유감은 당시 권력을 잡은 소론의 실세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여, 온갖 고초(苦楚)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유감 묘갈명(柳堪墓碣銘)」]

윤원형과 이기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무정보감(武定寶鑑)』의 속편을 편찬하였다. 1548년(명종 3) 10월 『속 무정보감(續武定寶鑑)』이 완성되자, 이조의 낭관들이 이 책을 이조에서 출판하기를 청하였으나, 이조 정랑유감은, “이조에서 이 책을 출판할 여력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때 소론에 속한 동료 관원 한지원(韓智源)이 이것을 좌의정이기에게 고자질하여, 이조 정랑유감은 역당(逆黨)을 옹호하였다고 체포되어, 모진 심문을 당하고 장(杖) 1백 대를 맞은 다음에 함경도 경흥(慶興)으로 유배되었다.[「유감 묘갈명」]

함경도 경흥은 두만강 가에 있는 5진(鎭)의 하나로, 날씨도 몹시 춥고, 오랑캐가 언제 침입할지 모르는 위험한 변방 지역이었다. 유감은 경흥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유학자의 선비 정신을 잃지 않고, 항상 경전을 잃고 심신을 가다듬었다. 1553년(명종 8) 명종이 성년이 되자, 문정대비의 수렴청정도 8년 만에 끝나고 명종이 친정(親政)하게 되었는데, 명종은 외삼촌 윤원형의 전횡을 싫어하여 소윤의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1565년(명종 20) 문정대비가 돌아가자, 명종은 영의정윤원형을 삭탈관직하여 강음(江陰)으로 추방하고, 소윤 일파에 의하여 유배된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이리하여 유감은 맨 먼저 은전을 입고 17년 동안 극변(極邊)의 유배생활에서 풀려나서, 서울 집으로 돌아왔으나, 풍토병에 걸려서 고생하였다.

1567년 6월 선조가 즉위하자, 그해 10월 선조가 특별히 “유감을 서용하라.”고 명하여, 유감은 성균관 사예(司藝)에 임명되고, 사성으로 승진되어, 성균관 유생(儒生)들을 가르쳤다. 1568년(선조 1)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가, 장악원(掌樂院) · 사복시(司僕寺)정(正)을 거쳐, 의정부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에 임명되었다. 1569년(선조 2) 6월 18일 지병으로 서울 집의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56세였다.

『속 무정보감(續武定寶鑑)』의 간행에 반대한 이조 정랑 유감

1545년(인종 1) 소윤 윤원형 · 이기 등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서 대윤 윤임 · 유관 · 유인숙 3인을 숙청하면서 많은 사람파 유신(儒臣)들을 죽이거나 유배하였다. 이때 이기·정순붕 등은 <을사사화> 때 많은 사림파 선비를 죽인 것이 종묘사직의 안정을 위하여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을사사화>의 전말을 기록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을사 정난기(乙巳定難記)」다. 이에 맞서서 을사년 당시 사관(史官)안명세(安名世)는 <을사사화>의 전말을 「시정기(時政記)」에 자세히 기록하여 실록청(實錄廳)사초(史草)로 남겼는데, 그는 인종의 장례식 전에 윤임 · 유관 · 유인숙을 처형한 사실, 윤원형 · 이기 등이 무고한 많은 사림파 유신을 처형한 사실, 그리고 이를 찬성한 소윤 일파와 이를 반대하던 대윤 사림파의 명단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1547년(명종 2) 11월 윤원형은 나라에서 『무정보감(武定寶鑑)』을 편찬하도록 청하여, 찬집청(撰集廳)이 설치되었다. 그는 <을사사화>의 정당성을 내외에 알리기 위하여 세조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자세히 기록한 『무정보감(武定寶鑑)』의 속편을 편찬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때 영의정(領議政)윤인경(尹仁鏡), 좌의정이기, 우의정정순붕이 무정보감 찬집청 낭청(郎廳)유강(兪絳)을 시켜 아뢰기를, “『무정보감』은 개국 이후부터 예종 시대까지 편찬하였으니, 성종 시대 이후부터 당대(명종 시대)까지를 『속 무정보감(續武定寶鑑)』에 편찬하여야 마땅합니다. 청컨대, 창덕궁 안의 병조에 찬집청을 설치하고, 실록청에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을 가져다가 상고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의정부 3의정의 감독 아래 『속 무정보감』이 편찬되었다.

원래『무정보감(武定寶鑑)』은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황보인(皇甫仁) ·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아서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과정을 내외에 알리기 위하여, 예종 때 계감청(繼鑑廳)을 설치하고, 나라에서 편찬한 책이다. 영순군(永順君)이부(李溥) · 하성군(河城君)정현조(鄭顯祖) ·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극돈(李克墩) 등에게 명하여 조선 건국 초부터 예종 때까지 발생한 국내의 정변을 중심으로 전쟁과 외침을 자세히 기록하게 하였다. 1469(예종 1) 7월 계감(繼鑑)이 완성되자, 예종이 『무정보감(武定寶鑑)』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고령군(高靈郡)신숙주(申叔舟)에게 수교(讎校)하도록 명하였다. 명종 대 『속 무정도감』 편찬은,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단종의 뒤를 이은 것과 명종이 <을사사화>를 통하여 인종의 뒤를 이은 것을 연계하여, <을사사화>가 <계유정난>과 성격이 같다고 주장한 것이다.

『속 무정보감』을 편찬할 때, 사관한지원이 안명세의 「시정기」를 이기 · 정순붕에게 밀고하여, 안명세는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였다. 안명세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소윤의 잘못을 비판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찬집청에서 『속 무정보감』을 편집하는 과정에 실록청의 시정기를 가져다가 참고하였기 때문이다. 1548년(명종 3) 10월 16일 『속 무정보감』이 완성되었다. 이조의 소윤파 낭관들이 이 책을 이조에서 출판하기를 청하였으나, 이조 정랑유감은 이에 반대하고, “이조에서 이 책을 출판할 여력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때 동료 관원 한지원이 이것을 좌의정이기에게 고자질하여, 이조 정랑유감은 역당(逆黨)을 옹호하였다고 체포되었다.

1549년(명종 4) 2월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兩司)에서 이조 정랑유감과 병조 정랑이원록(李元祿) 등을 합동 심문하고 아뢰기를, “나라에서 『무정보감』을 편찬하여 내외에 널리 반포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역당들의 정상을 낱낱이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조 낭관들이 이 책을 간행하려고 하자, 이조 정랑유감만이 홀로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기를, ‘어디 볼 만한 책이 없어서 하필 이런 책을 간행하겠는가.’고 하였습니다. 그는 『무정보감』이 볼 만한 책이 못 된다고 여겨서 제멋대로 이의를 제기하였으니, 그를 먼 곳에 유배시켜야 합니다.” 하였다.[『명종실록』명종 4년 2월 3일] 이리하여 유감은 장(杖) 1백 대를 맞은 다음에 함경도 경흥으로 유배되었다. 병조 정랑이원록은 좌의정이기의 조카인데, <을사사화> 때 삼촌 이기가 사림파 유신들을 잡아죽일 때 상당히 불평하는 기색을 보였으며, 또 동료들에게 자기 숙부 이기를 가리키면서, “온 집안이 멸족(滅族)의 화를 입어야 한다.”고 하였으므로, 삼촌 이기의 요청으로 양사의 합동 심문을 받고 곤장을 맞은 다음에 평안도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

성품과 일화

유감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용모가 헌칠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성품이 엄격하고 강직하였다. 겉모습은 너그럽고 까다롭지 않게 보였지만, 속마음은 굳고 확실하였다. 뜻을 세워서 일을 처리할 때에는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거나 뜻이 꺾이지 않았다. 권간(權奸)들이 국정을 전단할 때에도 그들 앞에 정색(正色)하고 우뚝하게 버티고 서서 언론과 행동에서 자주 그들과 충돌하였다. 유감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우수하고, 부지런히 공부에 힘을 써서 누가 번거롭게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학문을 깨우쳤다. 항상 유교의 경전(經典) 읽기를 좋아하고 공부에 부지런함이 남달라서 세월이 갈수록 크게 진보하여 일찍 학업을 성취하였다.[「유감 묘갈명」] 그러므로 그는 가는 곳마다 스스로 학업을 통하여 자기를 수련하고, 남들에게 학문을 권장하고 가르쳐서 자기의 삶에 만족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유감이 17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함경도 경흥은 두만강가의 변방 요새(要塞)로, 사람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인정이 메마르고 날씨가 추운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학업을 수련하면서 그 어려운 환경을 초연하게 극복하였는데, 마치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종신(終身)토록 머물러 살 생각도 하였다. 매일 유교의 경전을 읽고 그 뜻을 궁리(窮理)하면서 사색(思索)하는 것 이외에는 그가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없었다. 이때 그는 유교의 경전 중에서 『주역(周易)』과 『예기(禮記)』의 구절을 하나하나 손수 써서 책상 위에 펼쳐 두고서 아침저녁으로 한 줄씩 되풀이하여 소리 내어 읽으면서 그 뜻을 곰곰이 연구하였다. 그리고 종종 술과 시(詩)로써 스스로 삶을 즐기면서 자기 심성(心性)을 기르고 세상 근심을 떨쳐버렸다.

유감은 항상 북쪽 지방의 풍속이 미개한데다가 북방 사람들이 문자(文字)를 배우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리하여 그는 경흥의 젊은이들을 모아서 글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간절하게 학문을 권장하고 재주가 있는 자를 학문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의 제자 중에서 마침내 학업을 성취하여 과거에 합격한 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함경도 5진(鎭)에서 과거 합격자를 배출한 것은 그가 경흥 지방의 젊은이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567년 6월 선조가 즉위하자, 그해 10월 <을사사화>에서 화를 입은 대윤의 사림파를 신원(伸寃)하고, 복직(復職)하였다. 그때 선조와 중신들이 사화에서 화를 입은 사림파 인물들의 억울한 사정을 논의하였는데, 고봉(高峯)기대승(奇大升)이 선조에게 아뢰기를, “유감이 이조 정랑이 되었을 때, 영의정이기가 자기의 사적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유감을 미워하여, 자기 앞잡이 한지원을 시켜서 그 뒷조사를 해서 유감의 비리를 캐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꼬집어 낼 만한 단서가 없자, 마침내 유감이 ‘『무정보감』은 굳이 볼 만한 것이 없다.’고 한 말을 죄목으로 삼아서 결국 귀양을 보내고 말았습니다. 그때 유감의 한 말은 죄를 받을 정도의 불손한 말도 아니었고, 더구나 그가 정말 그 말을 했는지 여부도 분명한 증거가 없었는데, 심문할 때 끝내 이것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고봉집(高峯集)』「논사록」 상권] 이리하여 선조는 특별히 명하기를, “유희춘(柳希春) · 노수신(盧守愼) 등을 방면하고 직첩을 돌려주고, 이원록 · 유감 등을 서용하라.” 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즉위년 10월 12일]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송산리(松山里)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지금 경기도 의정부시 산곡동이다. 유감이 돌아간 지 37년이 지나서, 1605년(선조 38) 유감의 3남 군수유영기(柳永起)가 좌의정심희수(沈喜壽)를 찾아가서 아버지의 묘갈명을 지어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일송(一松)심희수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심희수는 유감의 2남 감사유영립(柳永立)과 과거에 같이 급제한 동방(同榜)이어서, 서로 절친한 친구사이였으나, 이때 유영립은 이미 작고하였다.

첫째 부인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병마사(兵馬使)조윤무(曺允武)의 딸인데, 자녀는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유영건(柳永健)은 진사로서 수원 부사(水原府使)를 지냈으며, 차남 유영립(柳永立)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조 참판을 지냈다. 장녀는 직장(直長)이춘원(李春元)에게, 차녀는 병마사(兵馬使)이세증(李世曾)에게 시집갔다. 둘째 부인 교하 노씨(交河盧氏)는 첨정(僉正)노첨지(盧僉知)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낳았다. 3남 유영기(柳永起)는 진사로서 마전 군수(麻田郡守)를 지냈다.[「유감 묘갈명」]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고봉집(高峯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백사집(白沙集)』
  • 『부계기문(涪溪記聞)』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조천기(朝天記)』
  • 『퇴계집(退溪集)』
  • 『미암집(眉巖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지퇴당집(知退堂集)』
  • 『야계집(倻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