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兪絳)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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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유강 |
한글표제 | 유강 |
한자표제 | 兪絳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선조 |
집필자 | 정주영 |
자 | 강지(絳之) |
호 | 만수(晩修) |
시호 | 숙민(肅敏)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10년(중종 5) |
사망 | 1570년(선조 3) |
본관 | 기계(杞溪)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 |
증조부 | 유해(兪解) |
조부 | 유기창(兪起昌) |
부 | 유여림(兪汝霖) |
모_외조 | 창녕 성씨(昌寧成氏) : 성담명(成聃命)의 딸 |
형제 | (형)유관(兪綰), 유진(兪縝) (동생)유윤(兪綸) |
처_장인 | (첫째 부인)의령 남씨(宜寧南氏) : 남숭원(南崇元)의 딸 →(자녀)2남 (둘째 부인)전주 이씨(全州李氏) : 이억년(李億年)의 딸 →(자녀)무후 |
자녀 | (1자)유영(兪泳) (2자)유함(兪涵) |
저술문집 | 『속무정보감(續武定寶鑑)』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유강(兪絳) |
총론
[1510년(중종 5)~1570년(선조 3) = 61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와 호조 판서(判書),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시호는 숙민(肅敏)이며, 자는 강지(絳之)이고, 호는 만수(晩修)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예조 판서를 지낸 유여림(兪汝霖)이고, 어머니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판서에 추증된 성담명(成聃命)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를 지낸 유기창(兪起昌)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유해(兪解)이다.
중종~인종 시대 활동
1531년(중종 26) 식년시(式年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고, 10년 후인 1541년(중종 36) 별시(別試)문과(文科)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나이 32세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36년 10월 29일, 『방목(榜目)』] 이후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부정자(副正字)를 시작으로 예문관(藝文館)한림(翰林)과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 등을 역임하였다.[『계곡집(谿谷集)』 권14 「자헌대부호조판서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유공신도비명(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兪公神道碑銘)」이하 「유강신도비명」으로 약칭]
인종(仁宗) 즉위 직후인 1545년(인종 1) 윤1월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에 제수되었다.[『인종실록(仁宗實錄)』인종 1년 윤1월 18일] 그러나 사간원(司諫院)에서 유강(兪絳)이 사관으로 있을 때 비천(秘薦 : 사관(史官)이 다른 사관을 천거할 때 비밀스럽게 하던 일)을 공정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 등을 들어 탄핵하는 바람에 곧 체직되었다.[『인종실록(仁宗實錄)』인종 1년 윤1월 21일]
명종 시대 활동
1546년(명종 1) 사간원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가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이조 좌랑(佐郞)이 되었다.[『명종실록(明宗實錄)』명종 1년 1월 26일, 명종 1년 2월 20일, 명종 1년 6월 26일] 이듬해인 1547년(명종 2) 10월 명종은 윤원형(尹元衡) 등에게 성종(成宗) 대부터 명종 초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 발생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전말을 기록한 『속무정보감(續武定寶鑑)』을 편찬하도록 하였고, 유강은 『무정보감(武定寶鑑)』찬집청(撰集廳) 낭청(郎廳)으로 이 편찬에 참여하였다.[『명종실록』명종 2년 10월 18일, 명종 2년 10월 29일, 명종 2년 11월 10일] 『속무정보감』은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당시 윤원형 등의 소윤(小尹) 일파가 윤임(尹任) 등의 대윤(大尹) 일파를 숙청한 것에 대하여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편찬한 것으로, 윤임의 모의를 드러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였다.[『명종실록』명종 2년 10월 18일] 1548년(명종 3) 『속무정보감』이 완성되자 명종은 편찬에 참여한 이들에게 포상을 하였는데, 이때 유강은 한 자급이 승품되었다.[『명종실록』명종 3년 10월 16일]
이어 이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다가 어사로 함경도에 파견되었으며,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을 거쳐, 1549년(명종 4)부터 1557년(명종 12)까지 의정부 사인(舍人), 사헌부 장령(掌令), 사간원 사간(司諫), 사헌부 집의(執義), 홍문관 전한(典翰), 홍문관 직제학(直提學),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 참의(參議),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이조 참의,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중추부 동지사(同知事),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명종실록』명종 3년 11월 11일, 명동 3년 11월 16일, 명종 4년 2월 25일, 명종 4년 3월 26일, 명종 4년 7월 18일, 명종 4년 11월 13일, 명종 5년 10월 20일, 명종 6년 8월 28일, 명종 7년 6월 8일, 명종 8년 2월 11일, 명종 9년 5월 19일, 명종 9년 6월 26일, 명종 10년 7월 9일, 명종 10년 윤11월 16일, 명종 11년 8월 1일, 명종 12년 8월 27일, 명종 12년 11월 1일]
1558년(명종 13) 중추부 첨지사로 임명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와서는 황제가 오랫동안 조회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명나라의 사정들을 보고하였다.[『명종실록』명종 13년 3월 25일, 명종 13년 9월 3일] 북경에서 돌아온 후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평양에서 인재를 모아 교육을 시키고 크게 문풍(文風)을 일으킨 덕분에 이때부터 관서 사람들이 과거에 많이 올랐다.[「유강신도비명」] 1561년(명종 16)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는데, 그해 5월 을사사화의 주역인 임백령(林百齢)의 시호 제정과 관련한 논의가 벌어졌다.[『명종실록』명종 16년 2월 22일, 16년 5월 21일] 그러자 윤원형이 조정에서 을사사화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유강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윤임의 일파라며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명종실록』명종 16년 5월 11일] 당시 윤원형이 실권을 잡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결국 그는 외직으로 나가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다.[『명종실록』명종 16년 5월 27일] 이때 그는 함경도 함흥 지역에 문회서원(文會書院)을 창건하였으며, 문회서원은 1575년(선조 8) 이후백(李後白)의 계청으로 사액서원이 되었다.[『약천집(藥泉集)』 연보 권2]
이후 그는 호조 참판, 병조 참판, 승정원 도승지(都承旨),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공조 판서, 호조 판서, 중추부 지사(知事),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명종실록』명종 18년 6월 20일, 명종 18년 8월 12일, 명종 19년 7월 22일, 명종 19년 11월 26일, 명종 21년 1월 5일, 명종 21년 2월 15일, 명종 21년 3월 12일, 명종 21년 4월 11일, 명종 21년 8월 18일, 명종 22년 3월 25일, 명종 22년 4월 25일, 명종 22년 5월 3일, 명종 22년 5월 14일] 1570년(선조 3) 호조 판서를 역임하던 가운데. 그해 4월 10일 별세하니, 향년이 61세였다.[「유강신도비명」]
성품과 일화
유강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하는 일이 거칠고 비루하며 마음 씀씀이가 음험하고 추향(趨向)이 바르지 못하여 본디 사론(士論)에 용납되지 않았으나 일을 처리하는 재능이 있어 사람들이 능리(能吏)라고 하였다.[『명종실록(明宗實錄)』명종 9년 6월 26일] 또 모나지 않은 자세로 작록(爵祿)이나 보존하기를 도모하였으나, 이재(吏才)는 있었다고도 평가한다.[『명종실록(明宗實錄)』명종 16년 2월 22일]
호조 판서를 역임하던 때에는 씀씀이를 절약하고 비용을 절감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의 폐해를 제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두 위에 아뢰어 시행하였으며, 그 결과 몇 년 지나지 않는 사이에 국가의 재정이 점차 여유를 되찾게 되었으므로, 논하는 자들이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였다고도 전해진다.[「유강신도비명」] 그러나 이와 달리 성품이 강경했으나 권세 앞에는 나약했고 재간과 능력이 있었으나 가산을 모으는 데만 힘써 나라에는 도움이 없었다는 평가를 듣기도 하였다.[『명종실록(明宗實錄)』명종 18년 8월 7일]
묘소와 후손
유강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에 있다. 1639년(인조 17) 증손 유성증(兪省曾)이 경기도관찰사로 재임하던 때에 유강의 묘에 석물과 신도비를 세웠다. 한편 그는 1642년(인조 20) 함경도 함흥에 있던 문회서원에 한준겸(韓浚謙) 등과 함께 배향되었는데, 문회서원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따라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8 「함경도(咸鏡道) 함흥부(咸興府)」]
유강의 첫 번째 부인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주부(主簿)남숭원(南崇元)의 딸로 2남을 낳았다. 둘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무송수(茂松守)이억년(李億年)의 딸인데, 자식을 두지 못했다. 모두 유강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다. 장남 유영(兪泳)은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차남 유함(兪涵)은 진사(進士)를 지냈다.[「유강신도비명」]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사마방목(司馬榜目)』
- 『계곡집(谿谷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성호전집(星湖全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약천집(藥泉集)』
- 『월사집(月沙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