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심(柳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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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8년(선조 41)∼1667년(현종 8) = 60세.] 조선 중기 인조 때의 문신, 서예가. 예조 참판을 지냈고, 예조 판서와 전평군(全平君)에 추증되었다. 자(字)는 징보(澄甫)이고, 호(號)는 도계(道溪)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전창위(全昌尉)유정량(柳廷亮)이고, 어머니 정휘옹주(貞徽翁主)는 선조(宣祖)와 김인빈(金仁嬪)의 딸이다. 영의정(領議政)유영경(柳永慶)의 증손자이고, 낙전당(樂全堂)신익성(申翊聖) 처조카이다. 신익성은 신립(申砬)의 아들이다. 친한 친구는 영의정정태화(鄭太和), 예조 판서강백년(姜栢年) 등이다. 전주 유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유혼파(柳渾派) · 유습파(柳濕派) · 유지파(柳池派) 3파가 있는데, 유심은 시조 유습의 12대손이다.

광해군 · 인조 시대 활동

1608년 유심이 태어나자마자, 외조부 선조가 돌아가고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증조부 유영경(柳永慶)소북(小北)의 영수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고 했기에 경흥(慶興)으로 유배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그때 온 집안이 화를 입었으나, 어머니가 광해군의 이복여동생이었으므로 아버지 유정량과 갓난아이 유심은 겨우 살아남았다. 1613년(광해군 5)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 등은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서 영창대군의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을 죽였다. 그리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였던 유영경의 시신을 무덤에서 파내어 도성(都城)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하고, 유영경의 손자 부마 유정량도 전라도 고부(高阜)로 유배하였다. 아버지 유정량은 유배지를 경상도 양산군(梁山郡) 기장(機張)으로 옮겼다.

서울에 남은 어머니 정휘옹주는 어린 아들 유심을 홀로 키우면서 그 배움의 시기를 놓칠까봐 매우 걱정하였는데, 나이 13세의 유심을 비로소 유수업(兪守業)에게 보내어 글을 배우게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정휘옹주의 간청으로 인조가 즉시 유정량을 유배지에서 역마(驛馬)로 서울로 돌아오게 명하고, 전의 관작(官爵)을 회복하여 주었다.[『설봉유고(雪峯遺稿)』 권27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 춘추관성균관홍문관 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좌빈객 행 가의대부 예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전평군 유공 묘갈명(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春秋館成均館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左賓客行嘉義大夫禮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全平君柳公墓碣銘)」 이하 「전평군 유공 묘갈명」로 약칭]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 ∙ 이이첨(李爾瞻) 등은 체포되어 저자에서 능지처참 당하였다. 이처럼 유심의 어린 시절은 당파 싸움으로 부모가 헤어져 사는 가운데 불우한 생활을 보냈다.

1627년(인조 5)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장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0세였다. 음직(蔭職)으로 참봉(參奉)이 되었다가, 시직(侍直)에 임명되었고, 1632년(인조 10) 남별전(南別殿) 참봉이 되었다.[『설봉유고』 권27 「전평군 유공 묘갈명」, 『승정원일기』인조 10년 3월 5일] 1635년(인조 13)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8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어, 춘추관(春秋館)사관(史官)에 의망(擬望)되었으나, 미처 임명되기도 전에,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그때 인조는 황급히 강화도(江華島)로 피난가려 하다가, 길이 막혀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서 청(淸)나라 군사와 싸웠는데, 그도 인조를 호종(扈從)하여 싸우다가 승정원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 1637년(인조 15)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다가,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에 선임되었고,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15년 9월 13일 ·『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15년 11월 17일 · 『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15년 12월 10일)

1638년(인조 16) 사은 진주사(謝恩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청나라 수도 심양(瀋陽)에 다녀왔고[『속잡록(續雜錄)』], 홍문관 부교리(副校理) · 교리(校理)를 거쳐, 이조 좌랑(佐郞)이 되었다.[『인조실록』인조 16년 8월 1일 · 9월 2일 · 11월 9일] 1639년(인조 17) 홍문관 수찬과 부수찬(副修撰)을 번갈아 맡았다.[『인조실록』인조 17년 4월 4일 · 7월 23일] 1640년(인조 18) 이조 정랑(正郞)으로 옮겼다가, 홍문관 부응교(副應敎)을 거쳐, 1641년(인조 19)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는데, 서장관에 임명되어 청나라 서울 심양에 가게 되었으나, 어머니가 병환 중이라고 하여 사양하여 교체되었다. 그때 대간(臺諫)에서 ‘전쟁 중에 있는 오랑캐의 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꺼려서 일부러 회피한 것’이라고 그를 탄핵하여, 경상도 흥해(興海)에 유배되었다가 1년만에 돌아왔다.[『설봉유고』 권27 「전평군 유공 묘갈명」, 『인조실록』인조 19년 3월 6일]

1644년(인조 22) 인조가 8도(道)에 암행어사(暗行御史)를 보내어 민정(民情)을 살필 때 충청도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호서 지방을 염찰하고 돌아와서 민정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1645년(인조 23) 홍문관 응교(應敎)에 임명되었는데, 1646년(인조 24) 서장관에 임명되어, 정사(正使)이경석(李景奭), 부사(副使)김육(金堉)과 함께 청나라의 새로 천도(遷都)한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때 청나라는 명나라의 선박이 조선에 왕래하는 것을 문제로 삼아서 외교 관계가 복잡하였으나, 그는 실무를 맡아서 청나라 베이러[貝勒: 왕]와 직접 담판하여 매우 간결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인조 말년에 그는 병조 정랑·이조 정랑, 대간의 언관(言官), 의정부의 사인(舍人) 등을 두루 거쳤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의 직책은 겸임하였고, 여러 시(寺)의 정(正)도 역임하였다.[『설봉유고』 권27 「전평군 유공 묘갈명」] 1649년(인조 27) 비변사(備邊司)에서 문신(文臣) 가운데 문무(文武)를 겸전한 유장(儒將) 7인과 무신(武臣) 가운데 차서에 관계없이 발탁하여 등용할 무장(武將) 10인을 선발하여 비상시국에 대비하였는데, 유심은 홍처후(洪處厚) · 홍중보(洪重普) 등과 함께 7인의 유장으로 뽑혔다.[『인조실록』인조 27년 3월 15일] 이를 보더라도 그는 문무를 겸전한 인물인 것을 알 수 있다.

효종 · 현종 시대 활동

1649년(효종 즉위)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었고, 1651년(효종 2)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652년(효종 3)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2년 7월 11일, 효종 3년 10월 26일] 그때 집안의 6대조 유헌(柳軒)의 6촌 진일재(眞一齋)유숭조(柳崇祖)가 편찬한 『대학강목 십잠(大學綱目十箴)』과 『성리연원 촬요(性理淵源撮要)』를 교정하여 효종에게 바치자 효종이 표피(豹皮)를 하사하였다.[『효종실록』효종 3년 10월 29일, 『국조보감(國朝寶鑑)』 권38] 대사성(大司成)유숭조는 성균관에 18년 동안 봉직하면서 조광조(趙光祖) 등을 길어냈던 학자였다.

1655년(효종 6)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되었다가, 1656년(효종 7)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효종실록』효종 6년 10월 12일, 효종 7년 4월 8일] 그 뒤에 우승지(右承旨) ·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1659년(효종 10) 도승지(都承旨)로 영전하였다.[『효종실록』효종 10년 2월 12일] 그는 효종의 측근으로 있으면서 효종의 <북벌(北伐) 계획>을 도왔으나, 효종이 41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갔기 때문에 북벌 사업이 이룩되지 못하였다.

1659년 5월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자, 청나라에 고부사(告訃使)를 보낼 때 부사에 임명되어 정사우의정정유성(鄭維城)과 함께 중국 연경에 가서 효종의 부고(訃告)를 전하고, 시호(諡號)를 청하였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즉위년 5월 14일 · 6월 15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즉위년 5월 10일 · 6월 15일] 1660년(현종 1) 형조 참판이 되었다가, 강화 유수(江華留守)가 되었다.[『현종개수실록』현종 1년 1월 19일, 『현종실록』현종 1년 2월 8일] 그때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평안도 죄인 김수천(金守天)은 부녀자를 겁탈하였는데, 작년에 사유(赦宥)를 반포할 때에 본도에서 가벼운 죄를 범한 자로 오인하여 석방자 명단에 넣었고, 형조에서도 잘 보지 않고 그대로 방면을 청하였습니다. 본도 감사와 형조의 당상관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현종은 관찰사김여옥(金汝鈺)과 형조 당상관이시방(李時昉) · 채충원(蔡忠元)을 파직하였으나, 유심은 강화도 유수로서 나라를 지키는 직무를 맡고 있다고 하여, 한 자급을 강등하여 그대로 유임시켰다.[『현종실록』현종 1년 11월 7일, 『현종개수실록』현종 1년 11월 13일] 유심이 정휘옹주(貞徽翁主)의 아들이었으므로, 의친(議親)은 감형한다는 당시의 일반적 규례를 따랐던 것이다.

1662년(현종 3)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는데[『현종실록』현종 3년 2월 8일, 『현종개수실록』현종 3년 2월 8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였다. 1666년(현종 7) 병조 참판이 되었는데[『현종개수실록』현종 7년 8월 11일], 그때 유학(儒學) 권계흥(權啓興)을 특별히 천거하는 명단에 넣었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서, 천거한 사람 곧 천주(薦主)였던 병조 참판유심이 심문당하고 파직되었다.[『현종실록』현종 7년 12월 10일, 『현종개수실록』현종 7년 12월 10일] 당시 ‘보거(保擧) 제도’에 의하여 관리를 임용할 때 후보자를 보증 천거하게 하였는데, 후보자에게 잘못이 있을 때 천거한 사람에게 그 책임을 물었던 것이다. 1667년(현종 8) 2월 지병으로 서울의 집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60세였다. 그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는데, 살아 있을 때 나라의 죽책(竹冊)을 많이 썼기 때문에 현종이 예조 판서로 증직하였다.[『설봉유고』 권27 「전평군 유공 묘갈명」]

강화 유수 유심의 정족산 사고 건립

1660년(현종 1) 유심이 강화 유수가 되었을 때 강화도의 ‘정족 산성 사고(鼎足山城史庫)’를 지었다.[『현종실록』현종 1년 11월 8일, 『현종개수실록』현종 1년 11월 8일] 정족산성(鼎足山珹)은 강화읍(江華邑)에서 남쪽으로 35리쯤에 있는 고려 때 산성인데, 세종은 그 산성의 외적 방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새로운 산성터를 찾게 하였다. 좌의정최윤덕(崔潤德)이 마니산의 지세를 돌아보고 산세가 매우 험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세종이 고려 때 산성을 그대로 보수하게 하였다. 정족산(鼎足山)은 일명 삼랑산(三郞山)이라고 하는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단군(檀君)의 세 아들이 각기 봉우리[峯]에 하나씩 성을 쌓았다고 한다. 산성 안에 전등사(傳燈寺)라는 유명한 절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창건했는지 알 수 없으나, 1226년(원종 7) 고려 원종(元宗) 때 세 번째 중건(重建)되었다고 한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서울의 사대부 집안사람들이 먼저 강화도로 피난갔다가, 1637년 1월 강화도가 청나라 군사에게 함락되자, 섬 안에 피난한 사람들이 오랑캐 군사에게 쫓겨서 모두 정족산성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정족산성마저 무너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고, 부녀자들은 오랑캐에게 겁탈당하지 않으려고 목을 매거나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끔찍한 참극이 이때 이곳에서 벌어졌다.

1660년(현종 1) 유심이 강화 유수에 부임하여, 역사의 비극을 막으려고 정족산성을 보수(補修)하였는데, 이때 산성 안에다 왕가(王家)의 『선원보(璿源譜)』를 갈무리할 ‘선원각(璿源閣)’과 역대 실록(實錄)을 보관할 사각(史閣)을 지었다. 이리하여, 1678년(숙종 4) 숙종 때 역대 실록(實錄)규장각(奎章閣) 귀중 장서(藏書) 5천 7백여 권을 ‘정족 산성 사고’에 봉안하였다.[『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59] 당시 창덕궁(昌德宮) 안에 있던 규장각을 ‘내 규장각’이라고 부르고, 마니산 사고에 있던 규장각을 ‘외 규장각’이라고 불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하여, 사고를 불태우고, 사고에 보관된 외규장각 장서 중에서 채색이 아름다운 의궤(儀軌) 종류와 귀중한 고문서 3백여 종을 약탈해 갔는데, 그때 실록은 다행히 약탈 방화를 면하여 지금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1975년 서지학자 박병선(朴炳善) 여사가 프랑스 군사들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의궤’를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별관 창고에서 발견하여, <외규장각 도서>가 일부 현존하는 사실이 비로소 알려졌다. 역대 한국 정부는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위하여, 프랑스 정부와 외교적으로 교섭한 결과, 프랑스인들이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간 지 145년만에 2011년 4차에 걸쳐 296권을 모두 한국에 반환하였다.

성품과 일화

유심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무게가 있었으며, 천성이 온화하고 행동이 순수하였다. 몸가짐은 효성과 우애로써 그 기준을 삼았다. 어버이 곁에 있을 때는 항상 부드러운 얼굴 표정을 지었다. 부모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마시게 하였고, 부모의 상(喪)을 당해서는 짚자리를 깔고 상례를 다하였다. 혼자된 누이와 서출 아우들을 대할 때에는 모두 지극 정성을 다 하였고, 집안 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내면서 아버지 유정량이 만든 규범(規範)에 따라 가난한 친척들을 정기적으로 구제하였다. 70여 호의 가난한 친척들이 유심 부자의 의창(義倉) 곡식에 의존하여 생계를 이어갔다. 또 고아가 되어 출가(出嫁)하지 못한 6촌 누이를 데려다가 출가시켰다. 사람을 대할 적에는 경계를 두지 아니하였고, 친구와 사귈 때에는 신의(信義)를 우선으로 여겼다.

평생 정도(正道)를 지키면서 세속에 영합(迎合)하지 않았다.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청나라 연경에 사신으로 오가는 재상들이 평양에 머물 때 법전(法典)에 정해진 대로 접대하고 그들의 지나친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 재상들은, 그가 관찰사로 있을 때 행정상의 실수를 책잡으려다 그 잘못을 찾아내지 못하자, 속으로 분한 마음을 묻어두고 있다가, 도목정사(都目政事) 때마다 은근히 그의 승진을 훼방하였으므로, 그는 끝내 정승 판서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유심이 대신이 될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고 대신이 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으나, 유심은 왕가의 후손이라고 자부하여 오히려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는 강화 유수와 경주 부윤, 경상도 관찰사와 평안도 관찰사 등 중요한 지방을 맡아서 다스리면서, 가장 긴요한 정무(政務)를 간결하고 여유있게 처리하였고, 고을 수령들의 고과(考課)를 공정하고 깨끗하게 시행하였다. 일찍이 아버지 유정량이 부마로서 재물과 여색을 탐한다는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단속하여 풍류와 여색을 멀리하였다. 그는 스스로 깨끗하고 차가운 빙벽(氷壁) 속에 지내는 것을 오히려 편안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그가 지방 장관으로 가는 곳마다 한결같이 백성들이 그를 사모해서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던 것이다.[『설봉유고』 권27 「전평군 유공 묘갈명」]

아버지 유정량이 인조 때 영관(伶官)손모(孫某)의 딸을 첩으로 삼았는데, 그가 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때 대간의 언관으로 있었던 그의 친구 정태화(鄭太和)가 동료들과 함께 아버지 유정량의 비행을 탄핵하였다. 원래 정태화는 유정량의 아들 유심과 어릴 때부터 절친한 친구였는데,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유심은 단짝 친구 정태화와 절연하고 서로 만나는 것도 피하였다. 하루는 정태화가 집으로 찾아왔는데, 아버지 유정량이 아들 유심을 불러서 나가서 만나보도록 권하였으나, 유심은 망설이다가, 몇 번 재촉하는 아버지 명령에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대문 밖으로 나갔다. 그때 유정량이 유심에게 타일러기를, “내가 실제로 법을 범하였으니, 정태화가 나를 논죄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 정태화가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고 나를 중상(中傷)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어찌 유감이 있겠는가? 오늘부터 너희들은 서로 왕래를 전과 같이 하고, 감정을 마음에 품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두 사람이 전날과 같이 서로 죽마고우(竹馬故友)로서 친하게 지냈는데, 사람들은 아버지 유정량의 관대함과 아들 유심의 효성심을 아울러 칭찬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9] 정태화는 유심이 죽고 난 뒤에 현종 때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유심은 서예가로 유명한데, 어릴 때 아버지가 귀양 가고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살 때 오로지 글을 쓰는 데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13세 때 서예가 유수업의 문하에서 서예를 공부하였는데, 중국 원(元)나라 조맹부(趙孟頫)의 서체를 더욱 독실하게 연습하여, 조맹부의 서체인 송설체(松雪體)의 대가(大家)로 소문이 났다. 그는 자기에게 글씨를 잘 쓰는 재주가 있다고 내세우지 않았으나, 친구들은 그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그의 글씨를 모아서 편지틀로 꾸며서 많이 소장하였다. 어머니 정휘옹주가 그의 글씨를 자랑하여, 궁중에서 불경을 금(金)으로 베껴 쓸 때 궁중으로 불려가서, 세종 때 강희안(姜希顔)처럼 궁중 사경(寫經)을 많이 하였고, 나라에서 책봉(冊封) 의식에 행할 때 죽책(竹冊)을 많이 썼다.[『설봉유고』 권27 「전평군 유공 묘갈명」] 효종 · 현종 때 유심은 죽남(竹南)오준(吳埈)과 함께 서예가로 이름을 날렸으나, 지금 남아 있는 그의 글씨는 별로 없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도봉산(道峰山)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설봉(雪峰)강백년(姜栢年)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설봉유고(雪峯遺稿)』 권27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 춘추관성균관홍문관 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좌빈객 행 가의대부 예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전평군 유공 묘갈명(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春秋館成均館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左賓客行嘉義大夫禮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全平君柳公墓碣銘)」]

첫째 부인 영월 엄씨(寧越嚴氏)는 홍문관 응교엄성(嚴惺)의 딸인데, 자녀가 없이 일찍 죽었다. 둘째 부인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현감(縣監)윤경지(尹敬之)의 딸인데, 자녀는 5남 5녀를 낳았다. 장남 유이태(柳以泰)는 판관(判官)이고, 차남 유이겸(柳以謙)은 찰방(察訪)이고, 3남 유이승(柳以升)은 진사로서 부사(府使)이다. 4남 유이정(柳以井)은 생원(生員)으로서 별좌(別坐)이고, 5남 유이복(柳以復)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찰사를 지냈다. 장녀는 수사(水使)강만석(姜萬碩)에게, 차녀는 관찰사박순(朴純)에게, 3녀는 정랑심남(沈枏)에게, 4녀는 생원 정내상(鄭來祥)에게, 5녀는 사인(士人)변일말(邊佾末)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측실(側室)에서 3남 1녀를 두었다.[『설봉유고』 권27 「전평군 유공 묘갈명」] 손자 유술(柳述)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參議)를 지냈고, 손자 유운(柳運)은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 문학(文學)을 지냈고, 손자 유일(柳逸)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를 지냈으며, 증손자 유휘지(柳徽之)는 무과에 급제하여, 목사(牧使)를 지냈다.[『전주 유씨 족보(全州柳氏族譜)』]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전주 유씨 족보(全州柳氏族譜)』
  • 『설봉유고(雪峯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청선고(淸選考)』
  • 『계곡집(谿谷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만기요람(萬機要覽)』
  • 『서계집(西溪集)』
  • 『속잡록(續雜錄)』
  • 『연도기행(燕途紀行)』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죽남당고(竹南堂稿)』
  • 『계곡집(谿谷集)』
  • 『동주집(東州集)』
  • 『양파유고(陽坡遺稿)』
  • 『염헌집(恬軒集)』
  • 『정재집(定齋集)』
  • 『송계집(松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