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휘옹주(貞徽翁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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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3년(선조 26)~1653년(효종 4년) = 61세]. 조선의 제14대 임금인 선조(宣祖)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전생서(典牲署) 주부(主薄)를 지낸 김한우(金漢佑)의 딸인 김인빈(金仁嬪)이다. 친오라버니는 의안군(義安君), 신성군(信城君), 정원군(定遠君), 의창군(義昌君)이며, 친언니는 정신옹주(貞愼翁主), 정혜옹주(貞惠翁主), 정숙옹주(貞淑翁主), 정안옹주(貞安翁主)이다. 부마는 전주 유씨(全州柳氏)로 전창위(全昌尉)유정량(柳廷亮)이다. 인조(仁祖)의 고모이기도 하다.

출생과 혼인생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 선조와 김인빈의 4남 5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난 정휘옹주(貞徽翁主)는 황해도 해주의 행궁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2세가 되던 1604년(선조 37) 정영의정을 지낸 유영경(柳永慶)의 손자이자 유열(柳悅)의 아들인 유정량과 혼인하였는데, 부마 유정량은 전창위에 봉해졌다.(『선조실록』 37년 9월 12일)

정휘옹주의 남편 유정량은 할아버지 유영경이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했기 때문에 광해군(光海君)과 대북파의 탄핵을 받았다. 1609년(광해군 즉위년) 광해군이 즉위하자마자 유영경은 사사되었으며, 4년 후 그 일가가 몰살되다시피 하였다. 정휘옹주의 부마 유정량도 전라도 고부(古阜)로 유배를 갔는데, 토굴 속에서 햇빛을 보지 못하여 실명의 위기에 놓이기도 하였다. 이때 정휘옹주 역시 부마 유정량을 따라 가서 8년간 온갖 고초를 겪었다.(『광해군일기』 4년 7월 20일)

그러다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정휘옹주와 부마 유정량은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1653년(효종 4) 정휘옹주는 61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효종은 정휘옹주 사후 3년 동안 녹봉을 지급하게 하였다.(『효종실록』 4년 윤7월 15일)

묘소 및 후손

정휘옹주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의 도봉산(道峯山)에 마련되었다가, 뒤에 남편 유정량의 묘와 합장되어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산210-1로 옮겼다.

정휘옹주는 부마 유정량과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1남 유심(柳淰)은 아버지 유정량과 함께 유배생활을 하다가 인조반정 때 다시 서울로 돌아왔으며, 2남은 유흡(柳潝)이다. 그리고 1녀는 이중규(李重揆)와 결혼하였고, 2녀는 정화제(鄭華齊)와 혼인하였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계곡집(谿谷集)』
  • 지두환, 『선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