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赦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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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의 고유한 특권으로써 범죄자에 대하여 집행하고 있는 법률상의 효력을 전반적으로 해소하거나, 재판의 결과 확정된 형의 일부를 감형시키는 것.

개설

전통 사회에서의 사유(赦宥)는 오늘날 사면(赦免)과 같은 것으로 최고 통치권자인 왕의 권한이다. 왕의 즉위나 세자의 탄생을 비롯한 경사가 있을 때 이를 축하하기 위해 사유를 단행하였고, 홍수나 가뭄·천변과 같은 재이(災異)가 나타날 때 이를 민심을 반영한 하늘의 견책으로 보아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고자 사유를 단행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유교 정치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사유의 대상이 되는 범죄 행위는 각 시대별 범죄 양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정쟁이 격화되고, 경제범죄가 늘어나게 되자 이를 반영하는 변화가 나타나서 사유가 있기 이전의 일이라 하여 용서하지 말라는 ‘물간사전(勿揀赦前)’의 조항이 크게 늘어났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사유(赦宥)는 대체로 일반사유와 특별사유로 나눌 수 있고, 일반사유는 그 범위에 따라 대사(大赦), 상사(常赦), 곡사(曲赦)로 나누기도 한다. 특별사유는 사면권자인 왕이 특정인만을 대상으로 사면하는 것이다.

사유의 실시 계기는 크게 국가적인 경사(慶事)와 재이(災異)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왕이 즉위하거나 세자가 탄생하였을 때, 왕이나 세자의 혼례, 생일, 세자의 입학례나 관례(冠禮)를 치를 때, 왕이나 왕실 가족이 병에 걸려 낫기를 기원할 때나 병이 나았을 때,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삼년상이 끝나고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제(祔廟祭)를 시행할 때, 친경(親耕)이나 선종단 제사를 지낼 때 등 국가와 왕실의 축하할 만한 일이 있을 때 범죄자들의 벌을 경감하여 그 은혜를 널리 펴기 위해 사유를 실시하였다.

일식, 월식, 혜성의 출현, 한해, 수해, 상서, 괴사 등과 같은 재이가 발생하였을 때에도 사유가 실시되었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고 하늘이 만물을 주재하며 하늘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존재가 왕이라는 천명(天命) 사상에 입각하여 자연의 이상 현상을 하늘의 경고인 천견(天譴)으로 인식하고, 천견의 원인 중에 하나로 인식되던 억울한 죄수들의 죄를 경감하여 주기 위해 사유를 실시하였다. 기타 중국에서 사유를 실시하고 그 내용을 담은 조서나 칙서가 오면 이에 따라 사유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사유에서 제외되는 대상은 조선시대 형률의 기본으로 쓰였던 『대명률직해』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0악, 살인, 관물을 훔치거나, 강도질을 하거나, 절도를 하거나, 방화를 하거나, 남의 무덤을 파헤치거나, 법을 굽히든 굽히지 않든 장물을 받거나, 허위로 일을 조작하거나, 간음하거나, 양인을 모략하여 꾀어내거나, 꾀어내어 팔아버리거나, 간악한 자들과 결당하거나, 참언으로 다른 사람을 사지(死地)로 몰아넣거나, 법을 어기고 살인하거나, 일부러 남의 죄를 가볍게 하거나 무겁게 하거나, 사정을 알면서도 일부러 죄인을 방송하거나, 범인을 은닉하거나 도피를 돕거나, 죄인을 대신하여 관원에게 뇌물을 전달하거나, 모두 진범에 대하여 유지(宥旨)가 있더라도 사면하지 않는다."

다만, 이 경우에도 고의로 죄를 범한 경우에는 면죄할 수 없고, 실수로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하였거나, 관물을 실수로 훼손하거나 잃어버린 경우, 다른 사람에 연루되어 죄를 짓게 된 경우, 관리가 공사로 인하여 죄를 짓거나 실수로 다른 사람의 죄를 증감하거나 문서 처리를 지체한 경우 등은 예외로 하여 모두 죄를 면해 주게 하였다. 또 특사로 인해 면죄해 주는 경우나 죄를 감등하여 가볍게 해주는 경우도 사유 대상이 되었다.

한편, 도형이나 유형에 처해진 사람들이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인 경우에 대해 실록에서는 구체적인 언급 없이 배소에 도착했거나 안했거나 모두 용서한다 했다. 그렇지만 『대명률직해』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여, 도형이나 유형에 처해진 사람이 가는 길에 사유를 만나게 되면 하루에 50리를 기준으로 간 거리를 계산하여 기한이 넘었거나 중도에 도망을 했으면 석방하지 못하게 했다. 다만, 중도에 병이 나거나, 바람을 만나거나, 도적을 당하게 될 경우 증빙 서류가 있을 때에는 석방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 실시된 사유(赦宥)의 절차를 보자. 먼저 사유의 조건이 갖춰지면 왕은 중신들의 논의를 거쳐 사유의 범위를 결정하고 승정원이나 예조 또는 특정인에 명하여 사문(赦文)을 작성하게 한다. 사문이 완성되면 정해진 날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엄숙하게 사령(赦令)을 반포하고, 반포된 사문은 3일 내에 필사를 완료하여 신속하고 비밀스럽게 지방으로 전파한다. 이후의 절차에 대해서는 『속대전(續大典)』과 『대전통편(大典通編)』 등에 사령(赦令)조로 규정되어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령(赦令)이 반포되면 형조와 의금부, 관찰사가 사유 대상자의 등급을 나누어 석방 대상자의 명단을 작성하여 보고한다. 이때 아직 배소(配所)에 도착하지 못하였거나 현재 수금된 자와 도류안(徒流案)에 있으나 기록되지 않은 자는 해당 관사에서 별도의 명단을 작성하여 보고한다. 사형수로서 감형된 사람을 방면 대상으로 보고하면 형조에서 바로잡는다. 일반적으로 유지(宥旨)가 내리기 전의 사건을 아뢰서 왕의 결재를 받는데 사령이 내리기 6개월 전의 사건은 모두 거론하지 않는다. 영구히 관직에서 제명된 자는 10년이 지나서, 영구히 서용하지 않도록 된 자는 3년이 지나서야 석방 대상자 명단에 포함하여 왕의 결재를 받도록 한다. 같은 죄로 유배되었던 사람들 중 생존자가 사령으로 방면되고 서용되었으면 이미 죽은 자에 대해서는 의금부에서 죄목을 갖춘 별도의 명단을 만들어 보고하여 왕의 결재를 받는다.

이렇게 사유가 실시되면 해당자들은 감형되거나 석방되고, 관원이었던 사람들은 별도의 조치에 따라 고신을 돌려받고 다시 서용될 수 있었다.

변천

사유가 범죄인의 벌을 경감해주어 혹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고 왕의 은혜를 베풀어준다는 의미가 있지만, 반대로 사유의 실시에도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규정하여 해당 범죄의 예방에 노력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유의 명이 내려도 죄를 분간하여 용서하지 않는다."는 ‘물간사전(勿揀赦前)’의 규정이다. 조선시대의 법전의 근간을 이루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1년 내에 질병으로 쉬는 것이 30일인 자와 의친과 공신으로 10악을 제외한 5차례 죄를 범한 자는 모두 물간사전한다."는 규정만 있었지만, 이후 『각사수교(各司受敎)』, 『수교집록(受敎輯錄)』,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등의 집록류 법전과 『속대전(續大典)』에는 ‘물간사전’ 규정이 크게 증가하였다. 조선후기 사회 변동을 반영한 법규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사유(赦宥)의 의미도 그 만큼 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6세기 방납의 폐단이 극심해지자 공납을 제때 바치지 않는 관리, 조운을 제때 마치지 못한 봉상차사원(捧上差使員), 전가사변이 시행되면서 변방에 입거한 사람들이 도망하거나 고향에 다니러 갔다가 복귀하지 않는 일이 많아지자 감독 책임이 있는 수령·아전·권농관·이정, 인신(印信)을 위조한 자(뒤에는 호장의 인신 위조자도 포함), 왕릉 수리를 소홀히 해서 3~4년 내에 무너지게 한 공사 감독 참봉을 물간사전하도록 하였다. 또한 16세기 말에는 군역의 폐단과 관련하여 노제(老除)를 제대로 하지 않은 관찰사와 수령, 살아 있는 군병(軍兵)을 죽었다고 하고, 있는데도 도망했다 하거나, 거짓으로 독질(篤疾)이나 폐질(廢疾)이 있다고 칭하여 불법으로 군역을 피하고, 한정(閑丁)을 은폐하는 경우에는 비록 1명이라도 수령은 파직하고 감고와 색리는 전가사변(全家徙邊)하되 모두 물간사전(勿揀赦前)하도록 하였다.

17세기 초에는 과거 부정이 심해지자 과장(科場)에서 녹명(錄名)할 때에 외람되이 들어가는 자가 있으면 그 보거주(保擧主)에 대해 물간사전(勿揀赦前)하도록 했고, 무과에서 활을 대신 쏘게 한 사람과 대신 쏜 사람, 조예·나장·조군·역일수, 서얼·공사천으로 허통되지 않은 채 불법으로 과거에 응시한 자, 문과의 부정과 관련하여 과장(科場)에서 남의 것을 빌어 답안을 작성한 자[借述者], 남의 답안을 대신 작성해준 자[代述者], 수종(隨從)을 거느리고 들어간 자, 녹명(錄名)하지 않고 함부로 들어간 자, 서로 짜고서 역서(易書)하여 간사한 짓을 행한 자, 앞장서서 난동을 부려 과장을 파(罷)하게 한 자는 조관(朝官)이나 생원·진사일 경우 모두 물간사전(勿揀赦前)하며 영구히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하였다.

18세기에는 환자[還上]를 허록(虛錄)한 수령이나, 이를 제대로 적발하지 못한 후임관도 물간사전하도록 했고, 창고의 곡식을 잘못 관리한 자, 산성의 군량미를 훔친 자, 궁궐의 방목(防木)을 훔친 자 등을 물간사전하도록 하였다. 특히 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잠상이나 규정 이상의 물품을 가져간 역관들도 물간사전하도록 했다.

이상의 내용들은 수교(受敎)의 형태로 시행되고 있었으나, 18세기 중반 반포된 『속대전(續大典)』에 정리되어 실림으로써 완전한 법전 규정으로 시행되었다. 『속대전』에서는 우선 양전과 관련된 범죄인, 강화도와 남·북한산성 군량미를 허록한 관원과 이를 묵인한 관원, 창고의 곡물을 관리하는 관원·창고지기·아전 중 정배 이상의 벌에 해당하는 자, 문과 과장에서 답안을 차술한 자, 대술한 자, 수종을 데리고 들어간 자, 녹명하지 않고 난입한 자, 부동하여 역서한 자, 앞장 서 소란을 피우고 파장하게 한 자, 무과 시험에 법을 어기고 응시한 천인(나장, 조졸, 일수, 공사천), 쉬운 역을 찾아 투속한 목자(牧子)를 쇄환하지 않은 감목관과 색리, 지방 관문(官門)에서 소란을 피운 자, 창고를 태운 아전과 창고지기, 호장의 인신을 위조한 자, 사행(使行)에 부탁하여 부당 무역을 하는 상인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서장관과 의주부윤, 공사천이 공사천을 용은(容隱)하고 부리는 것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면임·이임·이웃이나 제대로 검거하지 못한 수령들은 모두 물간사전하도록 하였다.

한편 사령(赦令)에 대한 규정에도 변화가 반영되었다. 먼저 선조 말에는 사령이 내려질 때 아직 발각되지 않았던 자도 사령 이전의 일이라면 면죄하도록 했으나,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으나 벌이 유형이나 도형으로 감해진 사람은 방면 대상이 될 수 없게 하였다. 현종대에는 전가사변된 죄인은 석방하지 않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숙종대에 이르러서는 사유 대상이 확대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사령에 따라 석방 대상을 보고할 때 이미 유배지[配所]에 도착한 자와 아직 유배지에 도착하지 않은 자, 아직 옥에 갇히지 않은 자도 모두 석방 논의 대상으로 삼았고, 아직 유배지에 도착하지 않은 자들은 별도의 단자[別單]로 보고하게 하였다. 또 범죄 행위는 사령을 내리기 전에 발각되었지만 사령을 내린 뒤에 죄에 대한 감정이 이루어진 경우에는 유지(宥旨)가 내리기 전의 일로써 논하여 용서해준다. 단, 행위가 사령을 내린 후에 발각되면 사면 대상으로 논하지 않게 했다. 영구히 관직에 제수되지 못하는 처벌을 받은 자[永不除職者]가 10년이 지난 뒤 사령을 받으면 특명으로 서용하게 했고, 죄를 입은 사람들 중 죽은 사람도 모두 석방 대상이 되었다. 특별히 세자 책봉을 경축하기 위한 사령을 내리면서 잡범으로 사형에 해당되는 자,전가사변된 자,노비가 된 자,유배된 자,물간사전된 부류들까지 모두 석방하게 하였다. 단, 사령을 내리기 6개월 이내에 범한 일을 대상으로 삼았다. 예외적으로 수령이나 변장 중 탐욕을 부려 탐장[貪贓]이 현저한 경우에는 비록 대사령[大赦]이 내려도 석방 대상으로 보고하지 않게 하였다.

참고문헌

  •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 『대전속록(大典續錄)』
  • 『각사수교(各司受敎)』
  • 『수교집록(受敎輯錄)』
  •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金世培, 『朝鮮王朝 赦免制度의 硏究』, 휘문출판사, 1970.
  • 兪成國, 「儒敎的 傳統社會의 赦免制度에 관한 硏究」,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7.
  • 李鐘吉, 「朝鮮初 赦免制度에 관한 一考察」, 『법사학연구』9, 1988.
  • 趙允旋, 「조선시대 赦免·疏決의 운영과 法制的·政治的 의의」, 『朝鮮時代史學報』3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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