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별전(南別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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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숙종대에 태조, 세조, 원종의 어진(御眞)을 봉안한 진전(眞殿).

개설

임진왜란으로 선원전(璿源殿)에 있던 어진이 모두 소실되고, 외방에 있던 태조 영정과 세조 영정 중 일부만 보존되었다. 광해군대에 각지의 진전을 복구한 후 임진왜란 중에 보존된 경기전(京畿田)의 태조 영정, 봉선전(奉先殿)의 세조 영정 및 예안에 옮겨져 있던 경주 집경전(集慶殿)의 태조 영정을 옮기려 했다. 1614년(광해군 6) 전주 경기전을 중건하여 묘향산에 있던 태조 영정을 옮겨 봉안했고, 1619년(광해군 11)에는 태조 영정과 세조 영정을 임시로 한양의 봉자전(奉慈殿)으로 옮긴 후 남별전(南別殿)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성립 경위

임진왜란이 끝난 후 보전된 어진들을 원래 있던 진전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진행되었다. 1614년에는 전주 경기전을 중건하고, 묘향산에 있던 태조 영정을 옮겨 봉안했다(『광해군일기』 6년 6월 8일). 1617년(광해 9)에는 전주 경기전에 관원을 파견하여 태조 영정을 모사한 후 평양 영숭전(永崇殿)에 봉안하고자 했고 봉선전에 있던 세조 어진도 원래의 자리로 옮기려 했다. 1618년(광해 10) 영숭전과 봉선전에 각각 봉안될 태조와 세조의 어진을 옮겨 1619년 9월에 도성의 옛 봉자전에 임시로 봉안하면서 남별전으로 고쳐 부르도록 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조정이 남쪽으로 피난할 때 남별전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와 세조의 영정도 옮겼다가, 강화부에 영숭전이 건립된 후 이안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강화부 영숭전의 태조 영정이 소실되었고, 세조의 영정은 성 밖에서 찾아 원종의 영정을 봉안해 둔 한양의 숭은전(崇恩殿)에 함께 봉안하였다. 남별전을 중수한 후에 원종 영정과 함께 옮겼다.

변천

1677년(숙종 3)에는 한양의 남별전을 중건하였다. 본래 이곳에 있던 세조와 원종의 영정을 생각하면 2실만이 필요했으나 3실로 중건하였다(『숙종실록』 3년 7월 11일). 1688년(숙종 14)에 남별전의 남은 한 칸에 태조 어진을 봉안하였다(『숙종실록』 14년 3월 3일). 1688년 당시 태조 영정은 영흥의 준원전과 전주의 경기전 2곳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그중에 경기전의 영정을 옮겨서 모사한 후 남별전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남별전에 태조 어진을 모신 후 정기적인 전알 의식이 확립되었다. 1690년(숙종 16) 외방에 있는 태조 진전은 모두 전호(殿號)가 있는데 한양의 태조 진전만 전호가 없다 하여 새로 진전의 이름을 의논한 후 영희전(永禧殿)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참고문헌

  • 『남별전중건청의궤(南別殿重建廳儀軌)』
  • 『춘관통고(春官通考)』
  • 『(태조)영정모사도감의궤((太祖)影幀模寫都監儀軌)』
  • 김지영, 「숙종·영조 대 어진도사와 봉안처소 확대에 대한 고찰」, 『규장각』27,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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