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北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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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삼전도에서 오랑캐인 청에게 항복한 굴욕을 씻고 춘추의리(春秋義理)를 회복하자는 취지로 17세기 후반 조선의 조정과 재야에서 청의 요동 지방을 공격하자고 한 논의.

개설

병자호란 당시 청(淸)에게 항복한 일은 조선 조정뿐 아니라 재야 인사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명과 맺고 있던 군신과 부자의 의리를 저버렸을 뿐 아니라 그동안 천시하던 이적(夷狄), 곧 오랑캐에게 신하라 칭하게 된 굴욕 때문이었다. 이런 이념적·정신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조선에서는 나라의 힘을 길러 청을 쳐서 삼전도의 굴욕을 씻고 중화를 회복해 군부인 명의 원수를 갚자는 논의가 크게 일었다. 이런 분위기는 효종대 가장 왕성해서, 군사력을 강화하는 등 일부 실천으로 옮겨지기도 하였다. 현종과 숙종대에도 비슷한 논의가 있었으나, 대부분의 조정 신료들은 조선의 국력으로 청을 치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는 북벌 논의가 실제로 북벌을 실행에 옮기자는 것보다는 국내에서 춘추의리를 강조함으로써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도로 전개되었음을 말해 주었다.

내용 및 특징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걸어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고두례(叩頭禮)를 올리면서 항복하였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조선 전체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전까지 조선왕조의 정통성은 내부적으로는 양반사대부의 지지와 외부적으로는 명 황제 곧 천자로부터 받는 책봉에 그 뿌리가 닿아 있었다. 특히 주자학의 화이(華夷)의식을 내면화시킨 조선의 양반지식인들은 조선을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라 자부하면서 명·조선 관계의 성격을 군부(君父)와 신자(臣子) 사이의 절대적인 의리로 이념화해 받아들였다. 그런데 신자(조선)가 위기에 처한 군부(명)를 저버리고 군부의 원수(청)에게 항복한 일은 유교의 어떤 이론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패륜 그 자체였다. 특히 모든 일에 솔선수범해야 할 핵심 지배층인 왕과 신료들이 스스로 유교의 기본 가치를 범한 일로 인하여 조선의 충격은 거의 공황상태에 가까웠다.

조선왕조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이런 이념적 위기를 타개해야만 했다. 그 대책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청을 쳐서 군부의 원수를 갚고 삼전도의 수치를 씻자는 복수설치(復讐雪恥)였고, 그 실천 방안으로 부상한 것이 북벌 논의였다. 이런 반청(反淸) 움직임은 삼전도 항복 직후에는 청의 내정간섭과 감시가 심해 불가능하였으나, 1644년에 청이 중원을 정복한 후로 조선에 대한 통제가 다소 이완된 효종대부터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효종은 1649년에 즉위하자마자 북벌 의지를 천명하고 그 실천을 위한 국력 증강에 은밀히 착수하였다. 원두표(元斗杓)와 이완(李浣) 등 북벌논의에 동조하는 인물들을 요직에 임명하고, 군사력 강화에도 힘을 기울여 어영청·수어청·훈련도감의 군사를 증강하고, 대동법의 시행이나 노비추쇄사업 등 물자와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개혁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북벌의 실현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매우 희박한 탓에 신료들의 반응은 대체로 싸늘하였다. 양대 전란으로 이미 피폐해진 백성들의 정서와도 맞지 않아, 오히려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결국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붕어하자, 북벌 논의는 수그러들었다.

당시 북벌 논의에 가장 동조한 정치세력은 송시열(宋時烈)계의 노론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이 말한 북벌 논의는 직접 군사행동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며 내실을 기하자는 수신론(修身論)으로, 사실상 북벌을 하지 말자는 것과 다름없었다. 대신, 춘추의리와 복수설치와 같은 정신을 고양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하고 유교적 명분과 이념을 튼튼히 하자는 대내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는 효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북벌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하였으나, 효종대 증강된 병력은 괄목할 만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효종이 증강한 군사력은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이었다. 효종이 유사시에 보장처(保障處)가 될 강화도에 수비용 진지를 구축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점도 그런 의도에서였다. 또한 요동 일대에 청의 군사력이 거의 배치되지 않았으므로 조선이 쳐들어가기만 하면 쉽게 승리할 수 있다는 그의 판단도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점들로 볼 때 효종의 북벌론도 정치적 의도로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변천

중국 남방에서 삼번(三藩)의 난(1673~1681년)이 일어나고 정성공(鄭成功)·정금(鄭錦) 부자가 대만을 근거로 명조(明朝) 부흥운동을 진행한다는 소식이 1673년(현종 14)에 조선에 전해지면서 일각에서 북벌 논의가 다시 일어났다. 이때는 주로 남인계열의 윤휴(尹鑴)가 적극 앞장섰는데, 그의 정세 판단도 현실적인 첩보를 냉철히 분석한 결과가 아니라 추상적인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남인 내부에서조차 윤휴의 북벌론에 반대하는 자가 많았다. 그나마 이런 북벌 논의조차도 1678년(숙종 4)에 중국 내 모든 반란이 청군에 의하여 진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완전히 사라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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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서습유(宋書拾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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