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義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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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무이자로 민간에 곡물을 대여하거나,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에게 무상으로 곡물을 나누어 주던 구호기관.

개설

조선초기에 소규모 자영농의 몰락을 막기 위한 대책의 하나로 의창을 설치하였다. 의창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충분한 양의 곡식을 확보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1423년(세종 5)에 군자곡(軍資穀)을 의창으로 관할을 옮겨서 그 규모가 약 1,070,000석에 이르자 의창의 운영이 본격화되었다(『세종실록』 5년 9월 16일).

의창곡은 무이자로 봄에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에 회수하는 환곡으로 운영되기도 하였고,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에게 무상으로 곡물을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운영되기도 하였다. 환곡 분급의 대상은 중·소규모의 토지 소유 농민이었고, 무상 분급의 대상은 땅이 없는 농민이나 떠돌아다니는 굶주린 사람들이었다.

의창곡은 환곡으로 분급한 양이 무상 분급한 양보다 훨씬 많았다. 나누어 준 환곡을 거두어들일 때 이자를 받지는 않았지만, 가난한 농민들은 평상시에도 환곡을 갚는 것이 쉽지 않았고, 흉년에는 더욱 어려워서 갚지 못하는 곡물이 많았다. 창고에 남아 있는 곡식이 감소하면 군자곡을 의창에 옮겨 보충하곤 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이에 1461년(세조 7)에 사창(社倉)을 설치하여 의창을 대체하려 하였다(『세조실록』 7년 6월 25일). 의창곡을 덜어 내어 사창의 원본(元本)으로 삼았으므로 의창곡은 줄어들었고, 사창도 징수가 원활하지 못하여 결국은 1470년(성종 1)에 폐지되었다(『성종실록』 1년 2월 24일).

사창의 설립을 계기로 의창의 규모가 축소되었고, 또한 의창이 군자창에 속하는 진대(賑貸) 기구로 바뀌면서 그 명칭도 별창(別倉)으로 바뀌었다. 이후 별창에서 환곡을 거두어들일 때 다양한 방법으로 잉여곡을 징수하여 지방 재정에 충당하기 시작하였다. 사창을 폐지한 이후 별창의 규모는 갈수록 축소되었고, 16세기에 들어서 환곡은 군자곡을 활용하게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농민의 재생산과 생활보호를 위하여 봄에 곡식을 분급하고 가을에 회수하는 의창제도는 중국수나라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에서 194년(고국천왕 16)에 진대법(賑貸法)을 처음 시행하였다. 고려에서는 태조가 흑창(黑倉)을 설치하여 가난한 농민을 진대하는 법을 마련하였다. 986년(성종 5)에 이름을 의창으로 바꾸고 지방 고을에도 의창을 설치하였으며, 1023년(현종 14)에는 의창곡을 확보하기 위하여 연호미(煙戶米)를 거두었다. 그 후 무신 집권기와 몽골 침략기 등 혼란기를 겪는 동안 의창제도는 폐지되었다.

고려말의 가난한 농민들은 농사를 위해서는 사채(私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채권자들은 사채로 이자를 거두는 것에 그치지 않고 채무자의 토지를 빼앗거나 그들을 인신적(人身的)으로 지배하기도 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공양왕대에 관료 기구에 포함된 국가적 진대 기구로서의 의창이 설립되었다. 의창은 이후 조선건국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어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진대 기구로서 역할을 하였다.

내용

1. 의창곡의 보충

조선은 개국한 해인 1392년(태조 1) 의창을 통하여 가난한 사람에게 관곡(官穀)을 무이자로 빌려주었다(『태조실록』 1년 9월 24일). 의창에서는 풍흉에 상관없이 해마다 농사철이 되면 가난한 농민에게 종자와 식량을 빌려주었다. 흉년이 들었을 때는 굶주린 백성에게 무상으로 지급되었다. 의창 설립에 따라 평상시에도 국가가 진대를 함으로써 농민 경제의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의창이 설치된 이후에도 의창곡이 부족할 경우에는 군자곡과 같은 국가 보유 곡물로 진대하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인 진휼 기구는 의창이었다.

조선초기의 의창의 규모는 크지 않았기 때문에, 흉년이 들면 군자곡을 비롯한 관곡을 일시적으로 분급하였다. 또한 가난한 농민에게 빌려준 곡식은 제대로 회수하기 어려웠고, 흉년이 들었을 때 무상으로 나누어 준 곡물로 인하여 의창곡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정부는 의창곡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1406년(태종 6)에는 연호미법(烟戶米法)에 의하여 곡식을 거두어들였다(『태종실록』 6년 11월 17일). 풍년을 기준으로 서울에서는 관품에 따라, 지방에서 토지 보유량과 인구수에 따라 상·중·하로 구분하여 일정한 양의 쌀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국초의 다른 부담도 적지 않았으므로 많은 반대에 부딪쳐 1407년(태종 7) 연호미법은 폐지되었다(『태종실록』 7년 6월 28일). 연호미법의 중지로 의창곡의 보충은 없었지만 군자금의 비축이 증가하면서 군자곡을 이용한 진대가 늘어가는 추세였다.

태종 후반기부터는 군자금 비축에 여유가 생겼으므로 흉년에는 점차 많은 군자곡을 진대하여 의창곡의 부족을 보완할 수 있었다. 이 당시 군자곡을 이용한 진휼사업이 활발했던 것은 군자곡의 묵은 곡식을 새 곡식으로 바꾸려는 정책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분급한 군자곡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하여 군자곡 비축에 문제가 발생하자, 1423년(세종 5) 군자곡 1,069,000여 석을 의창곡으로 이관하여 의창의 규모는 약 1,070,000석이 되었다. 이때가 의창이 진대 기구로서 확립된 시기라 할 수 있다.

의창은 비축곡을 확보한 다음에는 보충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흉년에 무상으로 분급하고, 돌려받지 못한 환곡이 증가함에 따라 그 규모는 계속 줄어들었다. 당시 의창곡을 보충하기 위한 여러 방안이 논의되는 가운데 1445년(세종 27) 국가에서 염전을 설치하여 소금을 생산하고 그 소금과 곡물을 교환하는 의염제(義鹽制)가 한 해만 일시적으로 시행되었다. 그 후 1448년(세종 30)에 군자곡 1,257,000여 석을 의창곡으로 하여 의창곡은 약 2,400,000석이 되었다. 이와 함께 어염세(漁鹽稅) 등을 잡곡으로 바꾸어 의창의 기본곡에 충당하였으나 그 양은 많지 않았다.

2. 의창곡의 운영 방식

의창곡은 환곡과 흉년 시의 무상 분급으로 운영되었다. 환곡으로 분급하려면 몇 단계를 거쳐야 했다. 농민이 토지나 친척 등의 보증인을 갖추어 이정(里正)·권농(勸農)에게 요청하면 이들은 지방관에게 보고하고, 지방관은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감사가 호조(戶曹)에 보고하면, 호조는 심사하여 분급량을 결정하고 왕에게 올려 허락을 받으면 감사에게 창고를 열어 분급하도록 지시하였다. 감사는 중앙에서 허락한 범위 내에서 군현별로 할당하고, 지방관은 그 양만큼 환곡을 분급하였다. 환곡은 종자곡과 식량으로 구분되었는데 식량보다는 종자곡으로 지급되는 양이 많았다. 조선초기에 전체 분급량에서 종자곡의 비율은 60%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흉년 시의 무상 분급은 관에서 굶주린 사람의 숫자를 파악하여 진휼의 시행을 정부에 요청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진휼의 시행을 허락받으면 군현 내에 몇 군데의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여 굶주린 사람들이 받아먹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에는 나이에 따라 1명당 정해진 양의 곡물을 분급하거나 죽을 제공하였다.

3. 의창곡의 부가 징수

환곡은 무이자 대출로 출발하였다. 이자에 해당하는 모곡(耗穀)이 처음으로 징수된 것은 1424년(세종 6)으로, 1석에 3승(升)을 추가로 징수하는 것이었으나 이는 일시적인 조치에 그쳤다. 모곡은 본래 환곡 운영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 감소분을 보충하는 것을 의미하였으나, 실제는 이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

1448년(세종 30) 대구에서 시험적으로 실시한 사창제에서는 1석에 3두(斗)를 징수하는 2할의 이자율을 제시하였다. 1457년(세조 3)에는 의창곡의 부족으로 군자곡의 대출이 불가피해지자 군자곡에서 4할의 이자를 더 받기로 결정하였다가, 1459년(세조 5) 2할로 줄였다. 군자곡의 이자 징수는 이후 곧 폐지되었으나 16세기에는 1할을 부가 징수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그것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었다.

모곡은 관아 경비와 수령의 사적 용도로 사용되었으므로 지방 재정의 주요 재원으로 기능하였다.

변천

1. 사창제의 시행과 의창의 변화

의창제도는 지속적으로 곡물을 보충해야 하기 때문에 의창을 대신할 새로운 진대 기구로 사창제가 주목되었다. 사창제는 1448년에 경상도 10개 고을에서 시험적으로 실시된 적이 있었다. 세조대에 다시금 의창곡의 부족이 문제가 되자, 1461년(세조 7)에 전국의 모든 지방에서 한꺼번에 사창을 설치하도록 하고 의창곡을 가져다가 원본(元本)으로 삼았다. 사창제의 운영은 민간에서 주도하도록 하고 2할의 이자를 징수하도록 하였다. 이 방안은 이자를 징수할 수 있어서 곡물의 감축을 방지할 수 있었고, 그 운영은 민간에서 한다는 점이 의창의 운영과 다른 점이었다.

그러나 사창제 역시 징수 문제에 부딪쳐서 1470년(성종 1)에 폐지되었다. 세조대 사창제의 실시로 의창의 규모는 대폭 축소되었고, 의창이 군자창에 소속되면서 이름도 별창(別倉)으로 바뀌었다. 사창제가 혁파된 다음에도 의창은 여전히 별창으로 불렸다. 그러나 성종대의 별창은 그 운영에서 이전과 차이가 있었다. 지방관은 정부에 보고하지 않고 별창곡을 임의로 분급할 수 있었고, 환곡을 징수할 때 원곡 이상의 부가 징수가 일반화되었다.

성종대에도 징수하지 못한 환곡의 탕감(蕩減)이 몇 차례 이루어졌다. 이로 인하여 별창의 규모는 점차 줄어들었으나, 별창곡을 보충하는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로써 성종대에는 민간에서 5할의 이자를 받는 장리(長利)의 규모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었다.

16세기 들어서 조선왕조는 더 이상 의창제도를 유지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결과 별창이 없어진 고을도 있었으며, 환곡과 무상 분급으로 사용하는 곡물도 군자곡 중심으로 바뀌었다.

2. 17~18세기의 의창 용어

의창이 사라진 16세기 이후에도 ‘의창’이란 용어는 ‘사창’이란 말을 대신하여 사용되는 경우가 있었다. 17세기 전반 양주목사로 부임한 이경석(李景奭)은 사창을 설치하였고, 양주목사에서 물러날 때에 받은 곡식을 ‘의창미’에 충당하도록 부탁하였다. 1652년(효종 3)에 충청도를 둘러본 민정중(閔鼎重)이 올린 보고에서는 옥천(沃川)의 의창이 상당히 단서를 이루고 있는데, 모두 주자의 옛 법을 모방하였다고 하였다. 송시열이 남긴 옥천 사창에 대한 기록도 ‘옥천군 의창기’, ‘옥천군 의창중수기(義倉重修記)’ 등으로 표현되었다. 18세기 전반에도 충청도의 윤광소(尹光紹) 문중에서 사창을 운영하면서 ‘의창사목(義倉事目)’을 남긴 바 있었다.

이처럼 17·18세기에 ‘사창’과 ‘의창’을 동일하게 여긴 것은 중국에서의 경험 때문인 듯하다. 사창은 수나라 때에 처음 설치된 민간 구황 기구였는데, 당나라에서는 의창이라고 하였다. 남송 때에는 주자의 건의로 사창법을 제정하여 관곡을 대여받아 민간에서 운영하였다. 이처럼 중국에서 시행된 사창과 의창은 동일한 제도로 파악할 수 있으나, 조선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의창의 경우 국가 보유 곡물을 지방관이 정부의 지시를 받아 운영한 것과 달리, 사창은 민간에서 수집한 곡물을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한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참고문헌

  • 문용식, 「17·18세기 사창을 통한 지방관의 재정 보용 사례」, 『역사와 현실』 72, 2009.
  • 박광성, 「조선 초기 의창제도에 대하여」, 『사총』 7, 1962.
  • 송찬식, 「이조시대 환상취모보용고」, 『역사학보』 27,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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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제훈, 「조선 초기 전세 재정 연구: 국고곡의 확보와 그 운용」,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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