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덕(崔潤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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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76년(고려 우왕 2)~1445년(조선세종 27) = 70세]. 조선 초기 장상(將相). 조선태종~세종 때 활동한 무신. 행직(行職)은 좌의정이고,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자는 여화(汝和)·백수(伯修), 호는 임곡(霖谷)·호연정(浩然亭)이다. 본관은 통천(通川)이고, 경상도 창원 내곡리(乃谷里)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고려 호군(護軍)최록(崔祿)이고, 아버지는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에 참여한 원종공신(原從功臣)양장공(襄莊公)최운해(崔雲海)이다. 아버지가 변방(邊方)에 종군하여, 어려서 합포(蛤浦: 창원)의 무자리[揚水尺]에게 양육되었다. 서미성(徐彌性)이 합포에서 벼슬할 적에 무술을 가르쳐서 명장이 되었다.

태조~태종 시대의 활동

최윤덕은 태어나자 곧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 최운해는 변방으로 종군하였기 때문에 그를 양육할 수 없었으므로, 이웃에 사는 무자리[楊水尺]의 집에 부탁하여 키우게 되었다. 조금 자라자, 최윤덕은 기운이 남보다 세고 뛰어나서 굳센 활을 당겨서 단단한 물건을 쏘아 맞추었다. 하루는 산중에서 소를 먹이다가, 큰 호랑이가 별안간 숲 속에서 나와서 소들이 놀라 달아나자, 최윤덕이 급히 말을 타고 달려가서 활을 쏘아서 한 발에 죽였다. 최윤덕은 집으로 돌아와서 무자리에게, “어떤 짐승이 무늬가 얼룩지고 그 크기가 엄청난데, 제가 활을 쏘아 죽였습니다.” 하므로, 무자리가 가서 보니, 한 마리의 큰 호랑이었다.

이때 서거정(徐居正)의 아버지 서미성이 합포만호(合浦萬戶)였는데, 무자리가 최윤덕을 데리고 가서 그의 무용담을 자랑하니, 서미성이 말하기를, “내가 한번 시험해 보겠다.” 하고, 같이 사냥하면서 그 재주를 시험하였다. 최윤덕이 좌우로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서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므로, 보는 사람마다 모두 감탄하였다. 서미성은 웃으면서, “이 아이의 솜씨가 비록 빠르기는 하지만, 아직 무예(武藝)의 법을 알지 못한다. 지금 하는 것은 사냥꾼의 기술이고, 무예의 좋은 재주라고는 할 수 없다.” 하였다. 이때부터 서미성이 최윤덕에게 활을 쏘고 말을 타는 법을 가르쳐서 마침내 명장이 되었다.(『필원잡기(筆苑雜記)』 권 1참고.)

아버지 최운해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참여한 원종공신이기 때문에 처음에 음직(蔭職)에 임명되었다. 1396년(태조 5) 최운해가 경상도절제사(慶尙道節制使)로 있을 때 21세의 최윤덕이 아버지를 따라서 영해(寧海)의 반포(磻浦)에서 왜구의 침략을 막았는데, 단기(單騎)로써 달려나가 왜적들을 연달아 쏘아 맞혀 그 목을 베어서, 용맹을 떨쳤다.

1400년(태종 즉위) 태종이 최윤덕의 용맹한 소문을 듣자 일부러 역마(驛馬)로써 불러서 반포에서 왜적을 무찌른 상황을 자세히 물어보고, 훈련관(訓鍊觀) 부사직(副司直)에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최윤덕은 태종의 측근으로 활동하면서 임금의 사랑을 받았다. 1402년(태종 2) 낭장(郞將)으로 승진하여 호군에 임명되었다. 그 해 4월에 무과 복시(覆試)를 시행할 적에 최윤덕은 아버지를 따라서 평안도 이성(泥城)을 수비하고 있었다. 최윤덕은 이미 회시(會試)에 합격하고도 전시(殿試)에 응하지 못하자, 태종이 안타깝게 여겨 그 이름을 방(牓)의 말미에 넣게 하였다. 1403년(태종 3) 대호군(大護軍)에 승진하였다. 1404년(태종 4) 7월 아버지 최운해의 상을 당하여 상중(喪中)에 있었으나, 태종이 29세의 최윤덕을 기복(起復)시켜서 측근에서 벼슬하게 하였다.

1406년(태종 6) 외직으로 나가서 태안군지사(泰安郡知事)가 되고, 이듬해 태종이 불러서 대호군에 임명하였다. 1410년(태종 10) 35세 때 무과(武科)에 정식으로 합격하고, 이때부터 동북면(東北面)과 서북면(西北面)의 변방에 파견되어 일선에서 오랑캐의 방어를 맡았다. 그해 5월 상호군(上護軍)으로 동북면 조전 지병마사(東北面助戰知兵馬使)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나자, 태종이 그에게 궁시(弓矢)를 하사하였다. 이어 6월 태종이 하경복(河敬復)을 경원 병마사(慶源兵馬使)에, 최윤덕을 경성 병마사(鏡城兵馬使)에 각각 임명하였는데, 두 사람은 모두 태종이 아끼는 젊은 무장이었다.

1411년(태종 11) 8월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에 임명되었고, 동북면으로 나가서 경성 등지의 절제사가 되었다. 당시 동여진의 오도리족 대추장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 등이 그의 인품과 사어(射御)를 보고 탄복하여 진심으로 복종하였다. 그해 11월 태종은 최윤덕이 풍토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의약을 보내주었다. 1412년(태종 12) 4월 경성 절제사의 임기를 마친 최윤덕이 복명(復命)하고 태종에게 매 1련(連)을 바쳤다.

1413년(태종 13) 8월 우군 절제사에 임명되었다가. 1415년(태종 15) 40세 때 영길도 도순문찰리사(永吉道都巡問察理使)로 승진하고, 조금 뒤에 우군 총제(右軍摠制)로 옮겼다. 1416년(태종 16) 6월 상호군이순몽(李順蒙)이 술에 취하여 최윤덕을 욕하고 꾸짖었기 때문에 태종이 노하여 이순몽을 의금부(義禁府)에 하옥하였다. 이순몽은 최윤덕과 경쟁 관계에 있었다. 그 뒤에 대마도(對馬島)의 왜구 정벌과 파저강(婆猪江)의 오랑캐 정벌에서도 이순몽은 항상 최윤덕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

1417년(태종 17) 3월 도진무(都鎭撫)에 승진되었고, 총제이순몽과 함께 무과 시험을 관장하였다. 1418년(태종 18)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6월 태종이 맏아들 양녕대군(讓寧大君)을 세자에서 폐출하고 셋째 충녕대군(忠寧大君)을 왕세자로 삼을 때 최윤덕은 영의정유정현(柳廷顯)의 의견에 따라 왕자 가운데 어진 사람을 고르자고 주장하여 태종을 지지하였다.

세종 시대의 활동

세종이 즉위한 뒤에 태종은 상왕으로서 군사와 인사에 관한 권한만을 행사하고, 나머지 일반 업무는 젊은 세종에게 맡겼다. 1418년(세종 즉위) 8월 병조 참판강상인(姜尙仁)이 군사에 관한 업무를 젊은 임금에게만 보고하고 상왕(태종)에게 보고하지 않다가, 태종이 노여움을 사서 이른바 <강상인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때 도진무(都鎭撫)최윤덕은 우부대언(右副代言)원숙(元肅)과 함께 태종의 명령을 받들어 옥사를 일일이 심문하였다. 태종은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을 그 배후의 인물로 지목하여, 영의정심온을 죽이고 세종의 장모 안씨(安氏)를 노비로 만들어, 세종의 처가 청송심씨(靑松沈氏)가 멸문의 화를 당하게 하였다. 이것은 태종이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하여 취한 특단의 조처였다. 그 달에 최윤덕은 중군 도총제에 임명되었다. 11월 태종이 오매패(烏梅牌: 궁중 통행을 허가하는 패)를 11명의 최측근에게 내려주어 비상시에 대비하였는데, 최윤덕은 효령대군(孝寧大君)과 영의정유정현·좌의정박은(朴誾) 등과 함께 이것을 받았다.

1419년(세종 1) 4월 의정부 참찬(參贊)에 임명되었다. 그해 5월 태종이 참찬최윤덕을 삼군 도절제사(三軍都節制使)에 임명하여, 왜구의 소굴 대마도 정벌을 준비하게 하였다. 7월 이종무(李從茂)가 전선 227척에 1만 7천 2백 85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거제(巨濟)의 마산포(馬山浦)를 출발하여 대마도를 정벌하고 돌아왔다. 1421년(세종 3) 7월 최윤덕은 공조 판서에 임명되어, 성곽(城郭) 수리를 건의하였다. 이때부터 최윤덕은 하3도의 연변(沿邊) 고을의 성보(城堡)를 수리하는 일을 도맡아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세종의 명을 받들고 강화도의 성곽과 목장(牧場)을 옮길 터를 찾아서 여러 번 강화도를 순찰 조사하였다.

1421년(세종 3) 10월 정조사(正朝使)에 임명되어, 부사(副使)황자후(黃子厚)와 함께 중국 북경(北京)에 가서 정단(正旦)을 하례하고, 태종의 병환에 좋은 약재를 구하여,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그러나 1422년 5월 10일 태종은 56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그해 8월 ‘태종’의 시호를 종묘에 올릴 적에 최윤덕이 그 시책(諡冊)시보(諡寶)를 받들었다.

1423년(세종 5) 1월 평안도 병마 도절제사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하경복이 함길도 병마 도절제사로 있었다. 세종은 당시 명장으로 이름난 최윤덕과 하경복에게 북쪽 변방의 방어를 맡겨서 국방을 튼튼하게 하였다. 12월 최윤덕과 하경복을 우군 도총제(右軍都摠制)로 삼고, 그대로 병마사로서 북방에 남아있도록 하였다. 1424년(세종 6) 12월 세종이 최윤덕에게 전지하기를, “경이 변방에 간 것이 거의 두 돌이 되었으니, 당연히 교대해야 하나, 장수 가운데 적임자를 구하기가 정말 어렵다. 또 지금 북쪽 국경에 오랑캐의 약탈이 잦으니, 경을 더 변방에 머물러 있게 하여 변방의 안정을 기대하려고 한다.” 하였다.

1425년(세종 7) 7월 다시 참찬으로 소환(召還)되었다가, 1426년(세종 8) 1월 좌군 도총제부(左軍都摠制府) 판사(判事)로 승진하였고 1428년(세종 10) 윤4월 병조 판서로 옮겼다. 1429년(세종 11) 2월 세종은 병조 판서최윤덕을 충청·전라·경상도의 하3도 도순무사(下三道都巡撫使)를 삼아서, 부관 첨총제박곤(朴坤)과 함께 하3도 연변 고을의 성터를 살펴보게 하였다. 1430년(세종 12) 1월 최윤덕은 세종의 스승 이수(李隨)에게 병조 판서를 물려주고, 중군 도총제부 판사가 되었다. 1432년(세종 14) 3월 세종은 판부사(判府事)최윤덕과 예조 판서신상(申商)에게 강화도의 성터와 목장을 살펴보게 하였다. 최윤덕은 강화도에서 돌아와서 복명하자, 바로 하경복과 함께 중추원(中樞院) 판사에 임명되었다.

1432년(세종 14) 겨울에 파저강(婆猪江: 동가강) 여진족 대추장 이만주(李滿住)가 여연(閭延)에 침입하여 인마를 크게 노략질하자, 세종은 영변도호부사(寧邊都護府使)문귀(文貴)를 파면하고, 1433년(세종 15) 1월 최윤덕을 평안도 도절제사에 임명하였다. 4월 최윤덕은 평안도 군사 1만 명과 황해도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파저강 오랑캐의 본거지를 소탕하였다. 이때 최윤덕의 맏아들 최숙손(崔叔孫)과 셋째아들 최광손(崔廣孫)도 아버지를 따라 여진족 정벌에 참여하였다.

1433년(세종 15) 5월에 세종은 최윤덕을 우의정(右議政)에 임명하였으나, 조정의 문신들이 무신을 정승에 임명한다고 불평하였다. 1434년(세종 16) 2월 최윤덕은 스스로 무장(武將)이라 하여 전문(箋文)을 올려 우의정을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세종은 윤허하지 않고, 1435년(세종 17) 2월 최윤덕을 좌의정(左議政)에 승진시켰다. 이때 최윤덕의 나이가 60세였다. 그 사이 세종은 최윤덕을 평안도 도안무찰리사(都安撫察理使)에 임명하여 조정에서 벗어나서 평안도 현지에 있으면서 군무(軍務)를 관장하게 하였다. 최윤덕은 강계(江界)·여연 등 10여 고을은 전토가 많으므로 타도의 사람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자고 사민(徙民)을 주장하였다.

1434년(세종 16) 7월 우의정최윤덕이 세종에게 사냥하는 매 1련을 바치자, 정부의 대신들이 정승이 임금에게 놀이갯감을 바친다고 비난하였다. 또 이듬해에 사헌부에서 좌의정최윤덕이 북방에 있으면서 제 마음대로 군무를 처리하다가 잘못 조치(措置)한 것이 많다고 탄핵하였다. 1436년(세종 18) 4월 영의정황희·좌의정최윤덕, 좌의정으로 치사(致仕)한 맹사성(孟思誠)에게 내구마(內廐馬) 1필씩을 하사하고, 7월 세종이 특별히 중추원 영사(領事)라는 벼슬자리를 새로 마련하여 최윤덕에게 제수(除授)하였다. 이때부터 최윤덕은 말많은 정승 자리에서 물러나서 중추원 영사의 한직에 머물면서, 연변 고을에 성을 쌓고 외적을 방어할 대책 등을 헌의(獻議)하였다.

1440년(세종 22) 계모(繼母)의 상을 당하여 고향 합포에 내려가서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는데, 상기(喪期)가 끝나자, 다시 중추원 영사에 임명되었다. 1444년(세종 26) 69세 때 최윤덕은 “신이 노둔하여 매사를 잘 잊어버립니다.” 하고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세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1445년(세종 27) 11월 6일 최윤덕의 나이가 70세가 되자, 세종은 최윤덕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으나, 이때 이미 최윤덕은 병환이 매우 위독한 상태였다. 최윤덕이 일어나서 왕명을 받으려고 하자, 자제(子弟)들이 말리며, “병환이 위태하니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그러나 최윤덕은 정색하고, “나는 평생토록 동료를 접대하더라도 오히려 병 때문에 예절을 폐지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임금이 궤장을 주시는데 어찌 예절을 폐지하겠는가.” 하고, 아픔을 참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관대(冠帶)를 매고 당하(堂下)에 내려가서 맞이하였다. 그로부터 달포가 지나, 1445년(세종 27) 12월 5일 서울의 사저(私邸)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70세였다.

대마도 왜구 정벌

고려가 왜구의 침입 때문에 멸망하였다고 말할 정도로 그 피해가 막심하였는데, 고려 말엽 이성계가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전라도를 점령한 왜구를 운봉(雲峰)에서 격퇴하여 나라를 구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었으므로, 조선은 일본의 아시카카막부[足利幕府]에게 왜구의 발호를 막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막부는 영주(領主)들을 통제하여 왜구를 막을 힘이 없었고, 특히 대마도 등 삼도(三島)의 왜구들이 영주들의 비호 아래 조직적으로 선단을 만들어 조선과 중국의 연안을 약탈하였다. 특히 대마도 도주(島主) 소오 사타모리[宗貞盛]가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무역을 중개하면서, 몰래 왜구를 비호하여, 대마도가 왜구의 소굴이 되었다.

1419년(세종 1) 5월 왜구의 배 50여 척이 중국으로 가다가 식량이 모자라자, 충청도 비인현(庇仁縣) 도두음곶이[都豆音串]에 침입하여, 우리 병선을 에워싸 배를 불사르고 식량을 약탈하였다. 이 보고를 듣고 태종과 세종은 중신들을 불러서 상의하였는데, 병조 판서조말생(趙末生)의 주장대로 왜구의 빈틈을 타서 그 소굴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결정하였다. 태종은 젊은 세종에게 적의 허(虛)를 찔러서 본거지를 공격하고 군사를 포치(布置)하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의도적으로 정벌을 결정하였던 면도 있었다. 후일 세종은 최윤덕을 보내어 오랑캐를 정벌할 적에 이때의 전략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나, 김종서(金宗瑞)가 6진을 개척할 때에는 이와 전혀 다른 방법을 사용하였다.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기 위해, 5월 태종은 영의정유정현을 삼도도통사(三道都統使)에, 참찬최윤덕을 삼군 도절제사에 임명하여, 대마도 정벌을 준비하고 감독하게 하였다. 6월 최윤덕은 3포(浦)의 하나인 내이포(乃而浦)로 내려가서 내이포에 있는 왜인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왜관(倭館)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분치(分置)하고, 각 왜관에서 횡포를 부리던 왜인을 처형하였는데, 모두 21명이었다. 그 중에는 조선에 투항한 평도전(平道全)의 아들 평망고(平望古)도 있었다. 최윤덕은 왜구의 정벌을 위하여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3도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중군·좌군·우군의 3군으로 편제를 편성하고, 소나무를 베어서 전함을 만들고, 한편으로 군사의 식량을 준비하였다. 이때 정간(丁艮)과 김윤수(金允壽)가 도절제사의 진무(鎭撫)가 되어, 최윤덕을 도와서 그 실무를 도맡았다.

장천군(長川君)이종무가 삼군 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에 임명되어, 우박(禹博)·유습(柳濕)·이지실(李之實) 등 9명의 절제사를 거느리고 하3도로 내려갔다. 6월 초파일에 각도의 군함이 모두 견내량(見乃梁)에 모였다. 7월 이종무가 9명의 절제사를 거느리고 거제의 마산포에서 대마도로 향하였는데, 배가 227척이고, 군사가 1만 7천 2백 85명이었고, 준비된 식량은 65일치였다. 중군·좌군·우군이 길을 나누어 대마도의 본토를 수색하여 왜적의 배 1백 29척을 찾아내어 그 중에서 쓸 만한 배 20여 척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버렸다. 또 왜적의 집을 1천 9백 39호나 불태우고, 왜적 1백 14명의 머리를 베고, 21명을 사로잡았다. 중국 사람으로 왜적에게 사로잡혀 있던 남녀 1백 31명을 구원하고, 밭에 자라던 곡식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또 훈내곶이(訓乃串)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왜적의 오가는 길목을 막고, 동정(東征) 군사가 오랫동안 머무를 뜻을 보였다.

다만 이로군(尼老郡)에서 좌군 절제사박실(朴實)이 군사를 거느리고 수색하다가, 험한 낭떠러지에서 적의 복병을 만나 떨어져 죽은 자가 1백 수십 명이나 되었다. 박초(朴礎)가 나머지 군사를 거두어 돌아와 배에 오르자, 적이 추격하므로 우군 절제사이순몽과 병마사김효성(金孝誠)이 군사를 거느리고 힘써 싸워서 적을 물리쳤다. 또 대마도 도주 소오 사타모리가 군사를 돌이키도록 간청하고, 조선에 복속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유정현이 사람을 보내어 승첩을 보고하자, 3품 이상의 당상관들이 수강궁(壽康宮)에 나아가 태종에게 축하하였다.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하고 수군을 이끌고 거제도로 돌아오자, 태종이 그를 찬성에 임명하였다. 그해 8월 <대마도 정벌>의 뒷바라지를 담당하던 최윤덕이 전라도에서, 유정현이 경상도에서 상경하자, 태종과 세종이 낙천정(樂天亭)에서 이들을 맞이하여 위로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또 대마도를 경상도 계림부(鷄林府)에 소속시켰다.

<대마도 정벌>을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 하는데, 일본학자들은 <기해동정>이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지만, 일본의 왜구들이 <대마도 정벌> 이후에 조선의 정벌을 무서워하여, 중국 명나라의 해안선을 침입하였으나 조선의 연안을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말하자면, <대마도 정벌>은 왜구의 침략 루트를 조선쪽에서 중국쪽으로 바꾸어 놓았으므로, 그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파저강 오랑캐 정벌

여진족은 만주의 목단강(牧丹江)을 사이에 두고 금(金)나라의 후예인 오도리족과 잡종 오랑캐로 나누어진다. 그 북쪽의 타이가(taiga) 지대에는 숲속에서 수렵 생활을 하는 우디캐족이 살고 있었다. 이에 비하여 오도리족과 오랑캐는 남쪽의 강가에 살면서 반농(半農) 반목(半牧) 생활을 하였다. 오도리족은 고려 때 동여진으로 두만강 유역에 주로 많이 거주하였는데, 그 대추장 동맹가첩목아는 오음회(吾音會: 회령)에 자리잡고 조선의 태조 때 이성계의 건국을 도왔고, 태종 때에 조선에 입조하여 ‘오음회 만호부(吾音會萬戶府)’의 도만호에 임명되었다. 잡종 오랑캐는 압록강 유역과 요동(遼東) 반도에 널리 거주하였는데, 그 대추장 이만주는 압록강의 지류 파저강 유역 우라산성(兀刺山城)에 자리잡았다. 이만주는 중국 명나라에 복속하여 영락제(永樂帝) 때 건주위 지휘사(建州衛指揮使)에 임명되어, 만주의 제종(諸種) 여진족을 통솔하였다.

태종 말년에 이만주가 동맹가첩목아를 회유하여 명나라에 입조하자, 영락제가 동맹가첩목아를 건주좌위 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로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오도리족과 오랑캐 잡종을 “건주(建州) 여진”이라고 부르고, 북쪽의 삼림 지역에서 살던 우디캐족을 “야인(野人) 여진”이라고 일컬었다. 그 중에서 목단강 중류 닝구타(寧古塔) 지역에 살던 홀라온(忽剌溫) 우디캐가 7성(姓) 부족이 연합하여 가장 강성하였는데, 오랑캐와 오도리족을 침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변경을 자주 약탈하였다. 한편 요동의 요하(遼河) 일대에 살던 여진을 “해서(海西) 여진”이라고 부르는데, 조선과는 거의 왕래가 없었다.

1432년(세종 14) 12월 21일 홀라온 우디캐가 군사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여연·강계 지방에 침입하여 남녀 64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갔는데, 오랑캐 대추장 이만주가 6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가로막아 남녀 7명을 빼앗아 조선에 돌려보냈다. 그러나 조선은 오랑캐의 이만주가 내지의 우디캐족을 인도하여 조선의 변경을 약탈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파저강의 이만주의 본거지를 정벌하기로 결정하였다. 세종은 여연·강계 방어의 책임을 맡은 영변도호부사 문귀를 파면하고 중신들에게 묻기를, “문귀를 대신해서 영변을 맡길 사람은 누가 좋은가?” 하니, 황희는 최윤덕·하경복·이순몽을 추천하고, 하경복은 최윤덕·이순몽을 추천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최윤덕을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1433년(세종 15) 1월 최윤덕은 다시 평안도 도절제사에 임명되어, 그해 4월 평안도 군사 1만 명과 황해도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건주 여진의 본거지를 완전히 소탕하고, 개선하였다. 이때 세종은 의정부·육조에게 파저강 야인을 토벌할 계책을 묻고, 그 의견을 빠짐없이 진술하게 하였는데, 세종은 그 의견을 수렴하여 오랑캐 정벌 계획과 방어 대책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 권59 참고.)

1433년 5월 평안도 절제사최윤덕이 박호문을 보내어 보고하기를, “1433년 3월 17일 평안도정군(正軍) 1만 명을 징발하고, 황해도 군마(軍馬) 5천 명을 거느리고 4월 초10일에 일제히 강계부에 모여서 군사의 편제를 나누었는데, 중군 절제사이순몽은 군사 2천 5백 15명을 거느리고 이만주의 채리(寨里)로 향하고, 좌군 절제사최해산(崔海山)은 2천 70명을 거느리고 차여(車餘) 등지로 향하고, 우군 절제사이각(李恪)은 1천 7백 70명을 거느리고 마천(馬遷) 등지로 향하고, 조전 절제사(助戰節制使)이징석(李澄石)은 군사 3천 10명을 거느리고 우라 등지로 향하고, 김효성은 군사 1천 8백 88명을 거느리고 임하라(林哈剌) 부모의 채리로 향하고, 홍사석(洪師錫)은 군사 1천 1백 10명을 거느리고 팔리수(八里水) 등지로 향하고, 신은 군사 2천 5백 99명을 거느리고 임하라의 채리로 향하여, 4월 19일에 여러 장수들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을 마쳤습니다.” 하였다. 전과는 포로가 2백 36명, 사살이 1백 83명이고, 사로잡은 말이 67필, 소가 1백 10두였다. 그러나 대추장 이만주 부자는 놓치고 말았다. 이때 최윤덕의 맏아들 상호군최숙손도 아버지를 따라서 파저강 정벌에 출전하여, 홍사석과 함께 팔리수 등지를 공략하였다.

세종은 그 공적을 포상하여, 그 달에 최윤덕을 의정부 우의정으로 삼고, 이순몽을 중추원 판사로, 이각과 이징석을 중추원 사로 삼았다. 5월 25일 우의정최윤덕이 평안도에서 돌아오니, 세종이 사정전(思政殿)에서 최윤덕을 인견하고 술자리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그 다음날 세종이 근정전(勤政殿)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출정한 장수들을 위로하였다. 우의정최윤덕·중추원 판사이순몽·중추원 사이징석·중추원 부사김효성·홍사석 등이 연회에 입시하였다. 상호군서침(徐忱)·최숙손 등 62명은 동쪽 월랑[廊]에 앉고, 전 판사김재(金滓)·최광손 등 66명은 서쪽 월랑에 앉아서 잔치를 받았다.

하 3도의 성보의 축성

1421년(세종 3) 7월 최윤덕이 공조 판서에 임명되자 8월에 성곽(城郭) 수리를 건의하였다. 최윤덕은 세종에게 아뢰기를, “예로부터 안위(安危)란 때에 따라 서로 바뀌는 법입니다. 오늘은 비록 편안하다 하더라도 내일은 위태로울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성의 해자(垓字)를 깊이 파고 성곽을 높이 쌓아서 방어를 견고히 하면, 만대가 지나더라도 뜻밖의 변고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세종은 최윤덕에게 경상도·전라도·충청도 하3도의 연변 고을에 허물어진 성곽을 수리하고, 성터가 좁은 곳은 새로 성곽을 수축하게 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침입에 대비한 비변책(備邊策)의 하나였다. 세종은 일본의 상인들에게 3포(三浦)를 개항하고 교역을 허락하여 공무역을 장려하였으나, 일본의 상인들은 잠상(潛商)들과 밀무역을 하였다. 조선에서 이것을 금지하면, 왜구로 돌변하여 연해안을 약탈하기가 일수였다. 하3도의 연변의 성보는 일본의 침략에 대비한 것이다.

1430년(세종 12) 5월 세종은 판부사최윤덕을 불러서, “전라도·충청도·경상도 하3도의 각 고을의 성 가운데 예전 터에 그대로 수축할 만한 곳과 새로 성을 쌓을 만한 곳을 조사하여 보고하라.” 하고, 이어서 부탁하기를, “하3도의 성보를 수축하는 방법을 오로지 경에게 맡기니, 경은 정성을 다하여 미비한 점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세종은 최윤덕에게 충청·전라·경상 하3도 연해안에 성보를 쌓을 만한 곳을 순찰 조사하게 하였는데, 병조 판서최윤덕은 하3도 각 고을의 성 중에서 그 방어가 가장 긴요한 연변의 고을들은 산성(山城)을 없애고 모두 평지성 읍성(邑城)을 쌓기를 주장하였고, 또 각 고을에 쓸 만한 옛 성이 있으면 그대로 수축하고, 쓸 만한 옛 성이 없으면 가까운 곳에 새로운 터를 골라서 새로 성을 쌓도록 건의하였다.

1430년(세종 12) 9월 세종은 판부사최윤덕과 호조참의박곤을 충청·전라·경상 하3도에 파견하여 성보를 조사하게 하였다. 그해 12월 도순문사(都巡問使)최윤덕이 경상도의 연일(延日)·곤남(昆南)·합포와 전라도의 임피(臨陂)·무안(務安)·순천(順天)과 충청도의 비인·보령(保寧) 등의 성을 새로 쌓았다. 성을 쌓는 일에 동원된 농민들은 최윤덕을 원망하였다. 또 하3도에 흉년이 들자, 대간(臺諫)에서 최윤덕의 순찰 조사마저 민폐가 많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성을 쌓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최윤덕에게 순찰 조사와 축성을 계속하게 하였다.

1431년(세종 13) 7월 판부사최윤덕이 아뢰기를, “하3도 각 고을의 성터를 돌아보니, 한 고을 성 안에 5, 6군데나 고쳐야 할 곳이 있으므로, 모두 고쳐 쌓을 것입니다. 성곽(城郭)은 반드시 일이 없을 때에 쌓아야만 하므로, 지금 한가한 때를 당하여 모두 고쳐 쌓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어찌 반드시 빨리 성을 쌓으려고만 하는가. 10년을 기한하고 농사 틈을 타서 쌓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최윤덕이 세종 때 하3도와 평안도에 보수한 성보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왜적과 오랑캐를 막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해 11월 최윤덕이 건의하기를, “경상도의 남해와 동래는 대마도와 서로 바라보고 있으므로, 왜적이 가장 먼저 침입하는 땅이니 마땅히 빨리 성을 쌓아서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합니다.” 하니, 세종이 남해성과 동래성을 새로 쌓게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적이 제일 먼저 침공하자, 동래부사송상현(宋象賢)이 성의 초루(譙樓)에서 끝까지 왜적과 싸우다가 죽은 동래성이 바로 세종 때 최윤덕이 쌓은 성이다.

세종은 서울과 가까운 강화성이 서울의 도성(都城)이 위급할 때 산성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강화성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겨서 새로 튼튼하게 구축하려고 계획하였다. 세종은 최윤덕에게 여러 차례 강화도에 가서 성터와 목장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최윤덕은, “강화성은 옛터 그대로 두는 것이 편리할 것 같습니다.” 하므로, 세종은 안전한 성터를 찾아서 옮기는 작업을 중지하고, 고려 때의 옛날 성을 그대로 보수하게 하였다. 그러나 강화성은 바로 강가의 언덕에 세워져서 적이 강을 건너면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오랑캐 군사가 강을 건너자마자 바로 함락되었는데, 그때 강화도에 미리 피란한 궁궐의 왕비와 궁녀들이 포로가 되었고, 수많은 서울의 사대부 부녀자들이 처참한 비극을 맞았다.

압록강 연안 목책 설치

1436년(세종 18) 3월 최윤덕은 세종에게 보고하기를, “여연에서 의주(義州)까지 7고을의 연변에는 이미 목책을 설치하였으므로, 오랑캐를 방어하는 데에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의주에서 4군 지역에 이르기까지 7고을에 읍성을 쌓고 압록강을 따라서 목책을 설치하여, 오랑캐의 침입을 방어하였는데, 이때 4군 지역에도 성보를 쌓고 목책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목책은 행성(行城)에 비하여 견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의정신개(申槪)가 압록강과 두만강에 행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자, 세종이 체찰사황보인(皇甫仁)에게 명하여 각 고을의 성보를 중심으로 행성을 쌓도록 명하였다. 이리하여 최윤덕이 설치한 목책을 황보인이 행성으로 바꾸었다. 황보인은 매년 봄철에는 평안도의 압록강 유역에 행성을 쌓고, 가을철에는 함길도의 두만강 유역에 행성을 쌓았다.

행성을 쌓는 작업은 1440년(세종 22)부터 1450년(문종 즉위)까지 만10년 동안 계속되었으나, 1450년(세종 32) 세종이 승하하기 전에 준공하지 못하였다. 압록강에 행성을 쌓은 것을 보면, 하류에는 의주·정녕(定寧)·벽동(碧潼)·벽단구자(碧團口子)에, 중류에는 창성구자(昌城口子)·이산(理山)·위원(渭源)·강계의 만포구자(滿浦口子)·고산리구자(高山里口子)에, 상류 4군 지역에는 자성(慈城)의 지령괴(池寧怪)·우예구자(虞芮口子)·여연의 조명간구자(趙明干口子)에 쌓았다.(『세종실록 지리지』 권154 참고.) 하류의 4행성은 길이가 55리 240보이고, 중류의 5행성은 36리 103보이고, 상류의 3행성은 50리 294보인데, 상류 4군 지역도 하류 의주 지역에 못지않게 행성을 많이 쌓았다.

세종 시대 전반기에 세종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 하3도의 성곽 수리와 평안도의 성보 수축을 최윤덕에게 도맡겨서 왜적과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하게 하였다. 세종 후반기에 김종서가 6진(鎭)을 개척할 때 황보인이 함길도의 성보를 수축하는 일을 도맡아서 6진의 성곽을 수축하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따라서 성보와 행성을 수축하였다. 최윤덕은 일찍이 압록강 유역에 목책을 설치하고, 상류의 4군을 개척하여 우리 국토로 만들었다. 뒤에 김종서·황보인이 6진을 개척하고 성보를 수축하고,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을 따라 행성을 설치하자, 마침내 양강을 경계로 하는 우리 국토가 획정되었다. 최윤덕의 업적은 4군을 개척하고 압록강 유역에 목책을 세워서 우리 국토를 획정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던 점이라 할 수 있다.

성품과 일화 - 역사적 평가

1432년(세종 14) 6월 세종이 최측근 좌대언(左代言)김종서를 불러서 묻기를, “그대는 최윤덕을 아는가?” 하니, 김종서가 대답하기를, “비록 학식은 없으나, 마음가짐이 정직하고, 군사를 쓰는 재략(才略)이 뛰어납니다.” 하였다. 세종이 말하기를, “그는 곧고 착실하여 거짓이 없으며, 근신(謹愼)하여 직무를 봉행(奉行)하므로 태종이 인재라고 생각하여 정부에 등용하였다. 그가 비록 수상(首相)이 되더라도 좋을 것이지만, 다만 말이 절실하지 못한 점이 많다.” 하였다.『세종실록』 권56 참고.) 이것은 최윤덕 장군이 건주위 오랑캐를 정벌하기 1년 전의 기사인데, 세종이 이미 최윤덕을 정승의 재목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446년(세종 28) 1월 17일 세종은 죽은 최윤덕에게 제사를 내렸는데, 그 제문에서, “경은 타고난 자질이 영민(英敏)하고 굳세었으며, 마음가짐은 충성하고 정직하였다. 외방에서나 조정에서나, 그대 혼자 노고하여 나라의 정간(楨幹)이 되었도다. 동쪽으로 바다의 도적을 정토(征討)하고, 북쪽으로 야인 오랑캐를 쳐서 국경을 소탕해서 평정하니,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편안하게 되었도다. 갑자기 동량(棟樑)이 꺾어지고 간성(干城)이 무너졌으니, 나의 슬픔이 어찌 그치겠는가.” 하였다.

세종은 최윤덕의 인품과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김종서와 황보인은 그의 졸기(卒記)에서 그를 평범한 무인으로 보아 평가 절하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세종 27년 12월 5일 참고.) 문종 때 영의정황보인과 좌의정김종서가 『세종실록』을 편찬하는 총재관이 되어서 최윤덕의 사초(史草)를 검토하다가 말하기를, “이는 행장(行狀)을 지은 자가 지나치게 칭찬한 말이다.” 하고, 모두 삭제하여버렸다.

당시 삭제된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버지 최운해가 경상도 절제사가 되었을 때 21세의 최윤덕도 따라가서, 경상도 영해의 반포에서 왜적과 싸웠다. 군사 1기(騎)로서 왜적을 길목에서 기다리는데 적기(賊騎)가 갑자기 나타났다. 최윤덕이 눈을 부릅뜨고 활을 한껏 당기고 쏘지 않고 기다리니, 왜적이 놀라서 선뜻 앞으로 달려오지 못하였다. 최윤덕이 이 틈을 타서 활을 연달아 쏘면서 말을 달려가서 왜적의 목을 몇이나 베었다. 이 소문을 들은 태종이 그를 불러보고 당장 훈련관 부사직에 임명하였다.

아버지 최운해가 왜적과 싸우다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탄핵당하여 함경도 북청(北靑)으로 폄출(貶黜)되었는데, 최윤덕이 벼슬을 버리고 아버지를 따라가서 좌우에서 모시면서 봉양하였다. 그때 최윤덕은 아버지가 글을 잘 하지 못해서 억울함을 하소연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얼마 뒤에 아버지가 조정으로 소환되자, 최윤덕은 스스로 결심하기를, “무예만으로 공명(功名)을 세우기는 부족하다.” 하고, 이때부터 활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글을 읽었다. 이리하여 그는 경서(經書)를 읽고, 문무(文武)를 겸전한 무장이 되었다.

태종이 해주(海州)에서 사냥을 할 때, 하루는 태종이 큰 냇물을 황급히 건너고자 하니, 최윤덕이 말하기를, “신이 먼저 가서 보겠습니다.” 하고, 급히 말을 타고 물에 들어가서 일부러 짐짓 말의 몸을 기울여 안장을 물속에 담그고 나와서 아뢰기를, “내가 깊어서 건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선현(先賢)의 ‘길은 지름길로 가지 않는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니, 태종이 깨닫고 그 충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뒤에 최윤덕이 공조 판서가 되었을 때 태종이 퇴위하여 수강궁(壽康宮)에 머물고 있다가 갑자기 한밤중에 최윤덕을 불러서 말하기를, “그대가 해주에서 나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던 일이 마침 떠올라서 한번 불렀을 뿐이다.” 하였다.

최윤덕은 관홍간정(寬弘簡靜)하고, 솔직하여 거짓이 없었다. 여러 번 정벌(征伐)을 전담하였으나, 추호도 법을 범하는 일이 없었고, 사졸들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여 시대의 명장(名將)이 되었다. 그는 경사(經史)를 섭렵하고 언제나 양장(良將)이 되려고 노력하였다.

이상은 그의 용맹과 효성과 충성을 담은 일화와 총평이었다. 단종 때 정인지(鄭麟趾)·정창손(鄭昌孫) 등이 『단종실록(端宗實錄)』을 편찬하다가, 황보인·김종서가 최윤덕의 사초에서 그 훌륭한 일화를 삭제한 것을 발견하고, 그 삭제한 일화를 다시 기록하고, 비난하기를, “그들이 「최윤덕 졸기」에서 그 좋은 일화를 모두 깎아버리고, 다만 벼슬 지낸 관력(官歷)만을 차례대로 써서 보통 평범한 사람들과 구별이 없게 하였다. 그들이 남의 좋은 업적을 왜곡하고 엄폐함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단종실록』 권7 참고.) 다만 이때가 <계유정난(癸酉靖難)> 직후이므로 당시 황보인과 김종서 일파는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수양대군 일파가 정권을 잡았던 정황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통천최씨 족보 을미보(1775년)』를 보면, 최윤덕 장군의 무덤은 경상도 창원부 북쪽 무릉산(武陵山) 아래 내곡리(內谷里)에 있었다. 묘소는 지금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대산리 산8에 있는데, 아버지 양장공최운해의 무덤과 함께 있다. 정조 때 창원의 토호들이 이곳을 명당이라고 하여 두 무덤을 손상하고 함부로 자기들의 가족묘를 쓰면서, 범장(犯葬)하는 것도 부족하여 심지어 장군의 묘갈(墓碣)을 뽑아 내버리고 묘도(墓道)를 부수는 짓을 하였다. 1785년(정조 9) 9월 정조는 크게 노하여 “창원의 토호 김가·하가·장가 등이 농간을 부린 내막을 추핵(推覈)하여 보고하라. 정렬공 양대(兩代)의 분묘를 지방관이 직접 수리하고 부수어진 묘비(墓碑)와 묘갈도 세우도록 하라.” 하였다.(『승정원일기』정조9년 9월 8일(갑인)조 참고.) 이때 황경원(黃景源)이 지은 「최윤덕 장군의 묘표(墓表)」는 그의 『강한집(江漢集)』에 남아 있다. 문종 때 최윤덕·황희·허조(許稠) 등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명신 5인을 뽑아서 세종의 종묘(宗廟)에 배향(配享)하였다. 이리하여 최윤덕 장군은 죽은 뒤에도 세종을 모시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숙종 때 충청도 아산(牙山)의 현충사(顯忠祠)에 충무공(忠武公)이순신(李舜臣)과 합사(合祀)하였다.

최윤덕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자, 어린 이복동생 최윤복(崔閏福)·최윤온(崔閏溫)·최윤례(崔閏禮) 3형제를 서울의 자기 집에 데려다가 기르고 가르쳐서, 모두 혼수를 마련하여 혼인시키고, 토지와 노비를 나누어 주었다. 최윤덕은 재상이 되어서 계모의 상을 당하자, 고향으로 내려가서 3년 동안 계모의 상복을 입었다. 최윤덕은 자녀를 4남 2녀 두었는데, 아들은 최숙손·최경손(崔敬孫)·최광손·최영손(崔泳孫)이고,(『세종실록』「최윤덕 졸기」 참고.) 사위는 주세구(周世龜)·이효검(李孝儉)이다.

맏아들 최숙손은 중추원 동지사·경상도 도절제사를 지냈는데, 모재(慕齋)김안국(金安國)의 누이와 혼인하여 최맹한(崔孟漢)·최중한(崔仲漢)을 낳았다. 최숙손은 세조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李塏)와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화를 당하였다. 둘째 아들 최경손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오랫동안 경기도 진위(振威)에 갇혀 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당하였다. 셋째 아들 최광손(崔廣孫)은 문종 때 용천군사(龍川郡事)를 지냈는데, 최계한(崔季漢)·최종한(崔終漢)을 낳았고,(『통천최씨 족보 을미보(1775년)』 참고.) 최계한의 사위는 병조 참판이순생(李順生)이다. 막내아들 최영손은 용맹하기로 이름났는데, 행호군(行護軍)을 지냈다. 최영손은 세종의 제 6왕자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또 다른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참혹한 형벌을 받고 죽었다. 최윤덕의 아들이 모두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하다가 화를 당하여, 그 후손들이 번창하지 못하였다.

창원문화원과 통천최씨 대종회가 2010년 11월 12일 최윤덕 장군의 기마 동상을 창원시청 중앙로에 건립하였고, 또 창원시에서 생가 복원 사업도 진행 중이다. 만주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려고 애썼던 세종의 뜻을 받들어, 오랑캐를 정벌하고 4군을 개척한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주여진 정벌비(정벌도)”를 반드시 세워야 한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정조편)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필원잡기(筆苑雜記)』
  • 『춘정집(春亭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해동잡록(海東雜錄)』
  • 『해동야언(海東野言)』
  • 『국조보감(國朝寶鑑)』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강한집(江漢集)』
  • 『지봉유설(芝峯遺說)』
  • 『성호사설(星湖僿說)』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