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동정(己亥東征)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419년 조선이 이종무를 보내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토벌한 사건.

개설

고려말기부터 조선초기까지 대일 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는 왜구(倭寇)의 위협이었다. 따라서 대일 교섭의 일차적인 목적은 왜구의 금압을 통한 남쪽 변경의 평화였고, 그 방법은 왜구를 평화적인 통교자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조선초기의 왜구 대책은 고려말기의 정책을 계승하면서도 정치·경제·군사적인 측면을 교묘하게 배합해 대응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태조의 정책은 그대로 계승되어 태종대에 이르면 왜구가 거의 종식되었다.

조선초기의 성공적인 대책으로 왜구가 격감하였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잔존한 왜구들에 대한 최후의 군사적 대응이 1419년(세종 1) 대마도 정벌이었다. 조선에서는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응영(應永)의 외구(外寇)’라고 부르는데, 조선초기 조일 관계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역사적 배경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왜구의 진압을 위하여 대일 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태조는 즉위 직후 실정막부(室町幕府)에 승려 각추(覺鎚)를 보내 왜구의 금압, 피로인의 쇄환을 요구함과 동시에 수호(修好)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실정막부의 3대 장군 족리의만(足利義滿)은 회답사(回答使)를 통하여 피로인 100명을 송환하면서 조선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왜구는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 활동한 ‘일본인의 해적집단’을 총칭하는 말이었다. 왜구는 활동 시기와 성격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3~15세기에 활동한 왜구를 전기 왜구라고 하는데, 무역 외적인 측면이 많았고 침략 지역은 한반도와 중국 연안이 주된 대상이었다. 둘째,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말까지, 즉 일본의 응인(應仁)의 난(1467~1477년) 이후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왜구를 후기 왜구라고 하는데, 이들은 주로 중국 및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무역적인 요소가 강해 일본에서는 이들을 ‘무장 상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왜구의 근거지는 대마도·일기도(壹岐島)·송포(松浦)로 요컨대 일본 서부 지역의 도서를 중심으로 한 지방이었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총칭하여 ‘삼도왜(三島倭)’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남북조시대의 혼란기에 지방 영주들의 보호와 묵인 아래 조직적으로 해적 행위를 하였다. 조선초기의 왜구 대책은 고려말기의 정책을 계승하면서도 정치·경제·군사적인 측면을 교묘하게 배합해서 대응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태조는 고려말 왜구 진압에 공을 세운 것을 계기로 권력을 잡아 조선 왕조를 건국한 인물이었던 만큼 당시 일본의 상황과 왜구 문제에 관하여 제일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태조의 왜구 대책은 첫째, 해방 대책(海防對策)의 충실화였다. 태조는 수군을 정비하고 병선을 개량하였으며, 연해 요처에 성을 쌓고 봉화를 설치하여 침입해 오는 왜구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조선초기의 수군 강화책은 태종대에 더욱 진전되어 1408년(태종 8)에는 병선 613척, 수군 병력 55,000명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군사적 대책에 의하여 왜구의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둘째, 외교적 노력이었다. 태조는 즉위 초 실정막부 장군에게 왜구 금지를 요청한 것을 비롯하여 왜구 세력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진 서부 지방의 호족들에 대해서도 왜구 진압을 요구하였다. 이에 막부와 서부 지역의 호족들도 왜구 진압과 피로인의 송환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셋째, 회유책이었다. 태조는 왜구 진압과 피로인 송환에 적극적인 호족들에 대해서는 통교상 특혜를 주고, 조선 관직을 하사하는 수직제도(授職制度)를 활용하였다.

조선초기의 성공적인 왜구 대책으로 태종대에 이르면 왜구들은 격감하였으며, 대부분 평화적인 통교자로 변해 갔다. 그러나 왜구가 완전히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연안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왜구들은 땔감과 물을 공급받을 중간 기착지가 필요하였고, 약탈한 물자를 판매해야 하는 등 조선과 절연된 것이 아니었다. 또한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지 조선 연안을 침략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왜구의 본거지인 ‘삼도(三島)’ 중에서도 대마도를 가장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말기에도 박위(朴葳)에 의한 왜구 토벌이 시도되었고, 태조 대에도 대마도 정벌을 기획한 적이 있었다. 잔존한 왜구들에 대한 최후의 일격을 가한 시도가 1419년에 이루어진 기해동정이었다.

발단

기해동정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 사건은 1419년 5월 대마도인의 침략이었다. 이 사건 이전까지 10년 동안 왜구가 거의 없이 평화로웠다. 그런데 1408년 실정막부의 3대 장군인 족리의만이 죽고, 1418년에는 대마도주 소 종정무(宗貞茂)가 사망하였다. 조선과의 통교 및 왜구 통제에 앞장섰던 두 사람이 죽자 상황이 일변하였다. 대마도에서는 소 종정무의 아들 소 종정성(宗貞盛)이 어린 나이에 도주가 되자 해적의 두령이었던 좌위문태랑(左衛門太郞)이 실권을 쥐게 되면서 내분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행정적 통제가 무너지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대마도인들은 다시 왜구로 변하였다. 그들은 1418년 32척의 선단을 구성해 명(明)의 변경을 침략하였다가, 귀로에 충청도 비인현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는 등 노략질을 하고 이어 황해도 연평도를 재차 침입한 후 요동반도로 진출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 특히 대일 강경책을 취하였던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결심하게 되었다. 출병에 앞서 내린 조정의 교서(敎書)에는 대마도가 본래 계림에 속하였으며 조선의 영토였다는 역사적 연원, 국초 이래 조선 조정의 후의(厚意)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대마도인에 대한 징벌, 충청도와 황해도를 침략한 일에 대한 문책, 왜구 근거지를 토벌하여 우환의 뿌리를 뽑겠다는 의지 등이 잘 나타나 있었다. 전술적으로는 왜구의 주력 부대가 요동반도를 향한 기회를 이용하여 왜구 본거지인 대마도를 치면 왜구를 근절할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경과

1419년 6월 19일 삼군도체찰사이종무(李從茂)는 병선 227척에 병력 17,285명을 싣고 65일분의 식량을 준비해 거제도를 출발해 대마도로 향하였다. 조선군은 20일 대마도의 천모만(淺茅灣)을 공격하여 적선 130여 척을 나포하고 민가 1,939채를 태우고 114명을 참하는 등 대승을 거둔 뒤 두지포(豆知浦: 대마도 지명으로는 토기기(土寄崎))에 정박하였다. 이어 이종무는 대마도주에게 유서(諭書)를 보냈으나 회답이 없자 26일 상륙한 후 병력을 좌우 양군으로 나누어 각지를 토벌하였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는 기도(岐島)의 원병과 함께 매복한 대마도군에게 박실(朴實)이 이끈 좌군이 패배하여 백수십 명이 전사하였다. 이후 이종무가 장기전 태세에 들어가려고 하자 대마도주 소 종정성(宗貞盛: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都都熊丸’은 그의 유명(幼名)이다)가 서계(書契)를 올려 군사를 철수해 줄 것과 수호를 간청하였다. 서계를 본 이종무는 태풍에 대한 우려도 고려하여 제재를 중단하고 7월 3일 거제도로 돌아왔다(『세종실록』 1년 7월 3일).

기해동정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쌍방이 3,8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격렬한 전투였다. 조선 측은 이를 통하여 왜구 본거지에 큰 타격을 가하는 한편, 많은 피로인을 쇄환하는 전과를 얻었다. 그러나 왜구의 주력 부대가 도내에 없었던 만큼 왜구 섬멸이라는 당초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한 셈이었다. 그래서 재차 정벌에 대한 논의도 나왔다. 태풍에 대한 우려 등 찬반 논의가 조정에서 진행되는 가운데 7월 12일 김해에서 도독(都督) 유강(劉江)이 요동반도에서 돌아오던 왜구를 대파하였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태종도 재차 정벌의 뜻을 거두었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재차 정벌의 논의가 수그러들면서 조선 조정은 7월 17일 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의 명의로 대마도주에게 유서를 보내 ‘땅을 바치고 항복하든지[卷土來降], 아니면 일본 본주로 돌아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강경한 입장을 전달하였다(『세종실록』 1년 7월 17일). 이에 대하여 대마도주는 9월 25일 항복을 청함과 동시에 인신(印信)을 하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대마도를 완전히 비우라는 조선 정부의 요구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후 반년에 걸친 교섭 결과 이듬해인 1420년 정월 ①대마도는 조선의 속주(屬州)로서 경상도의 관할 하에 두며 경상관찰사를 통하여 서계를 올릴 것 ②요청한 인신을 하사하되 ③앞으로 대마도로부터 오는 사절은 반드시 도주의 서계를 지참할 것 등으로 결말지어졌다. 이로써 대마도주는 조선의 수도서인(受圖書人)이 되었고 대마도는 경상도의 속주로 되었다. 대마도주에 의한 서계 발행권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대마도의 경상도 속주화 문제는 조일 간에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으며, 조선 정부와 실정막부 사이에 긴장 상태가 조성되었다. 대마도 정벌 소식이 전해지자 실정막부에서는 조선과 명나라가 연합하여 일본을 침공한다는 유언이 나도는 등 긴장하였고, 조선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의심하였던 것이다. 대마도와의 사이에 전후 처리 교섭이 진행되던 1419년 11월 막부의 4대 장군 족리의지(足利義持)가 보낸 사승(使僧) 양예(亮倪)와 구주탐제(九州探提)의 사절이 조정에 도착하였다. 표면적으로는 대장경을 구청(求請)하는 것이었지만, 대마도 정벌의 진상과 조선 정세를 탐지하려는 목적에서 파견된 사절이었다.

이에 세종은 실정막부가 요청한 7,000 축(軸)의 대장경을 하사함과 동시에 회례사 송희경(宋希璟)을 막부 장군 앞으로 파견하였다. 송희경은 막부 장군에게 대마도 정벌이 왜구 금압을 위한 것이었을 뿐 일본의 본주(本州)를 침략할 의도가 아니었음을 밝혔다. 또 그 후 양국 간에 긴장의 핵심 사안이었던 대마도의 경상도 예속 문제도 세종이 고집하지 않고 철회하였다. 이로써 역사적으로 큰 전기가 될 뻔하였던 대마도 속주화 조치는 1년 3개월 만에 원점으로 회귀하였다.

의의

기해동정의 가장 큰 의의는 왜구 근절과 함께 통교 체제 확립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비록 이 전투로 대마도의 왜구를 완전 토벌하지는 못하였지만 왜구 본거지였던 대마도에 대한 직접적인 무력행사의 의지를 과시함으로써 왜구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기해동정 이후로 왜구는 더 이상 군사적 위협 대상이 아니었으며 완전히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른바 전기왜구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 기해동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조정은 기해동정을 통하여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하였으며, 그 바탕 위에서 다양한 통제 정책을 시행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이 무제한으로 접근하였던 것을 막기 위하여 1426년(세종 8) 포소(浦所)를 3곳으로 제한하였다. 이것은 일본 선박의 항해를 제한하는 조처로서,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해금 정책(海禁政策)이며 제해권의 선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치는 군사적 우월성과 제해권의 확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해동정을 통하여 대마도가 조선의 요구에 순응해 옴으로써 세종대의 각종 통교 제한 정책의 시행이 가능해졌고, 조선이 외교적 주도권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의의는 기해동정 이후 대마도가 왜구 근거지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였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은 대마도를 매개자로 하여 일본의 모든 통교자들을 통제하려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조정은 일본의 통교자가 모두 대마도를 경유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대마도를 통교 체제의 정비에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다. 기해동정 이후 일본의 정세를 파악한 세종은 조선 조정에 순응하는 대마도주의 정치적 입장을 옹호해 주면서 도항하는 일본인에 대한 관리자로서의 구실과 독점적인 여러 권익을 보장해 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통해 대마도주는 도내의 통치권을 확립하였고, 조일 외교상 중심적인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기해동정 이후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간의 ‘양속 관계(兩屬關係)’로서 일종의 중립화 정책을 취하였다. 조일 교역의 중계 보급 기지로서 무역 이익을 취하면서 양국 외교의 안전판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속무정보감(續武定寶鑑)』
  • 『조선통교대기(朝鮮通交大紀)』
  • 손승철, 『조선시대 한일관계사 연구』, 지성의 샘, 1994.
  • 이현종, 『조선 전기 대일교섭사 연구』, 국학연구원, 1964.
  • 하우봉, 『강좌 한일관계사』, 현음사, 1994.
  • 한문종, 「조선초기의 왜구대책과 대마도정벌」, 『한일관계사연구』 5, 1996.
  • 長節子, 『中世日朝關係と對馬』, 吉川弘文館, 1987.
  • 佐伯弘次, 『對馬と海峽の中世史』, 山川出版社,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