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정막부(室町幕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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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6년부터 1573년까지 240년간 존속하였던 일본의 무가(武家) 정권.

개설

실정막부(室町幕府, [무로마치 바쿠후])는 족리존씨(足利尊氏,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의하여 1336년에 개설된 이후 1573년까지 존속하였다. 세 시기로 나누어 남북조가 통합되기까지를 남북조시대, 1392년 남북조 통합부터 응인(應仁, [오닌])의 난이 일어난 1467년까지를 무로마치시대, 응인의 난부터 직전신장(織田信長, [오다 노부나가])가 15대 쇼군 족리의소(足利義昭,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모시고 입경한 1568년까지를 전국(戰國, [센코쿠])시대라고도 하였다. 실정막부는 의소(義昭, [요시아키])가 직전신장(織田信長)에 의하여 추방됨으로써 멸망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통치 기구

실정막부는 3대 장군 족리의만(足利義滿, [아시카가 요시미쓰]) 시기에 통치 기구를 정비하여 국가 기구로서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중앙에는 막부의 최고 책임자로서 관령(管領, [간레이])을 두었다. 이는 막부 체제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면서 족리(足利)가 장군을 보좌하는 역할도 겸하는 것이었다. 관령은 유력한 수호 가문인 세천(細川, [호소카와]), 사파(斯波, [시바]), 전산(畠山, [하타케야마]) 세 집안에서 교대로 선출하였다(3관).

장군은 3관령과의 회의를 통하여 시정의 주요 방침을 결정하였다. 관령 밑에는 시소(侍所, [사무라이도코로]), 정소(政所, [만도코로]), 문주소(問注所, [몬추조]), 평정중(評定衆, [효조슈]), 인부중(引付衆, [히키스케슈]) 등이 있었다. 그중 중요한 것은 시소로서 교토 내외의 행정과 사법을 총괄하였고, 나머지 기관들은 사무 기관에 불과하였다. 시소의 장관인 소사(所司, [쇼시])는 산명(山名, [야마나]), 일색(一色, [잇시키]), 경극(京極, [교고쿠]), 적송(赤松, [아카마쓰])의 네 집안에서 교대로 선출하는 것이 관례였다(4직). 따라서 실제의 정치는 장군과 관령, 시소에 임명되는 3관 4직이 담당하였다.

한편 실정막부의 장군은 직속군인 봉공중(奉公衆, [호코슈])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은 교토에 상주하면서 장군을 호위하거나 막부의 경비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막부는 수호들이 전국의 경작지와 주요 도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재정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재정원 중의 하나는 어료소(御料所, [고료쇼])에서 얻는 수입이었다. 어료소는 내란을 거치면서 몰수한 토지를 직할지로 설정한 것이었는데, 장군은 전국에 산재되어 있었던 어료소에서 연공(年貢)을 징수하였다. 또한 족리의만은 정소에 징세 기관을 설치하고 양조업이나 술집의 영업 활동을 보장하는 대신 세금을 징수하였다. 그 외에 전답과 가옥에 부과하는 단전(段錢)·동별전(棟別錢), 명과 무역을 할 때 발생하는 이윤과 기타의 임시 과세에 의하여 재정을 보충하였다.

지방에 대한 통치 기구로는 겸창(鎌倉, [가마쿠라])에 겸창부(鎌倉府, [가마쿠라부])를, 오주(奧州)·우주(羽州)·구주(九州) 지역에는 군사와 민정을 담당하는 탐제(探題, [ 탄다이])를 설치하였다. 그 외의 지역에는 각 구니에 수호와 지두(地頭, [지토])를 두었다.

2. 명·조선과의 관계

1402년 족리의만(足利義滿)이 막부의 장군으로서 명의 책봉(冊封)을 받았다. 그로 인한 조공 관계는 족리의만의 아들인 족리의지(足利義持,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거부하여 1411년 이후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1432년 족리의교(足利義敎, [아시카가 요시노리])에 의하여 재개된 이후 16세기 중기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족리의만은 명과의 책봉 관계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조선과의 통교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에 조선과는 1404년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다. 당시 족리의만은 ‘일본국왕 원도의(源道義)’라고 칭하며 조선에 사신을 보냈고, 조선이 이를 접수함으로써 양국 중앙정부 간에 정식으로 국교가 체결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실정 정권은 일본 전역을 통괄하는 위치에 있지 못하였으므로, 이 외교 관계를 국가 단위의 공식 외교 체제였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조선은 실정 정권 외에도 서부 일본이나 구주 지방의 실권자들과도 독자적인 통교 관계를 갖는 다원적인 통교 체제를 취하고 있었다. 조선은 실정 정권과의 관계를 일본 각 지방의 제장(諸將)과의 관계보다 한 단계 격이 높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해동제국기』에 의하면 조선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오는 사신들을 일본국왕사, 거추사(巨酋使), 구주탐제사(九州探題使) 및 대마도주특송사, 제추사(諸酋使)의 4등급으로 나누어 접대하였다.

변천

1. 성립과 남북조 내란

실정막부는 1336년 11월에 족리존씨가 시정 방침인 건무식목(建武式目, [겐무시키모쿠])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족리존씨(足利尊氏)는 겸창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나, 후제호(後醍醐, [고다이고]) 천황이 무사 세력을 배제하자 광명(光明, [고묘]) 천황을 옹립하고 막부를 세웠다. 그리고 1338년에 광명 천황으로부터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세이이타이쇼군])직에 임명되었다. 한편 고다이고 천황은 길야(吉野)에서 남조(南朝)를 세우고 족리존씨가 세운 북조(北朝)와 대립하였다. 이후 일본에서는 약 60여 년에 걸쳐 남조와 북조가 서로 양립하여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는 남북조시대가 전개되었다.

한편 실정막부의 출범 당시 족리존씨는 군사 통솔권을 장악하였고, 동생 족리직의(足利直義, [아시카가 타다요시])는 영지의 보증이나 재판을 관할하는 행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이원 정치는 곧 내분을 초래하여 1350∼1352년에는 대규모 내란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 시기 일본 정국은 막부의 내분과 남북조 내란이 겹쳐 매우 혼미한 상태로 전개되어 나갔다.

2. 막부의 발전

1367년 3대 장군에 오른 족리의만(足利義滿)은 안으로는 내란 수습 등의 정치 안정을 도모하면서, 장군의 관위(官位)를 높여 권위를 세웠다. 남조와 북조의 통합에도 힘을 기울인 결과, 1392년 남조의 후귀산(後龜山, [고카메야마]) 천황이 교토에 가서 북조의 후소송(後小松, [고코마쓰]) 천황에게 양위하는 형식으로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또한 족리의만은 조정의 권한이었던 교토의 행정과 재판권을 장악하였으며, 막부의 지배 기구도 정비하였다. 그리고 수호(守護, [슈고])들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막부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된 유력한 수호들을 제거해 나갔다. 한편 족리의만은 명의 책봉을 받아들여 일본국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명과의 무역을 추진하는 등 대외적인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주력하였다. 이때는 실정막부의 최전성기였다.

그러나 막부는 군사나 재정 면에서 수호를 압도할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하였다. 천황·조정·사원(寺院)·신사(神社)의 권한을 흡수하면서도 그 권위를 그대로 두고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실정막부가 내란 동안 권력이 강화된 유력한 수호들의 연합 정권이라는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6대 장군 족리의교(足利義敎,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중신들을 억누르고 관료 집단인 봉행인(奉行人, [부교닌])을 중용하여 장군의 권력 강화를 시도하였으며,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였던 수호대명(守護大名, [슈고다이묘])들을 처벌하였다. 하지만 수호대명들의 장군에 대한 반감이 커진 결과, 족리의교는 1441년 수호대명 적송만우(赤松滿祐, [아카마쓰 미쓰스케])에 의하여 암살되고 말았다(가길의 난).

이후 실정막부는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게다가 수호대명과 영지 소유주인 귀족, 종교 단체에 의하여 이중으로 수탈받던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각지에서는 토일규(土一揆, [쓰치이키]) 등의 투쟁과 폭동이 발생하였다. 이를 통해 농민들은 막부로부터 채무를 무효화시키는 법령인 덕정령(德政令, [도쿠세이레이])을 획득하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하극상의 기운은 막부 권력에 더욱 충격을 주었다.

3. 응인의 난과 전국시대

15세기 중반 막부의 정치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전산(畠山)·사파(斯波) 등의 유력한 수호대명 집안에서 상속권 다툼이 일어났다. 이 내분은 막부 내에서 8대 장군 족리의정(足利義政,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자를 둘러싼 세천승원(細川勝元,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산명지풍(山名持豊, [야마나 모치토요]) 사이의 갈등과 얽혀 1467년 응인의 난으로 발전하였다.

응인의 난이 11년간 지속되면서 실정막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장군의 권위는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추락하였고, 장군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도 겨우 교토 일대에 불과하였다. 또 장원제의 붕괴가 촉진되면서 각 지역의 무사 세력이 강해져서 독자적인 영지 지배를 목표로 하는 전국대명(戰國大名, [센코쿠다이묘])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실정막부는 붕괴의 길로 접어들고, 지방의 무사 집단이 각지에서 할거하는 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

9대 장군 족리의상(足利義尙, [아시카가 요시히사])과 그를 이은 10대 장군 족리의직(足利義稙, [아시카가 요시타네])은 막부의 권위 회복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1493년에 기내(畿內, [기나이]) 지방에서 세력을 떨친 세천정원(細川政元,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8대 장군 족리의정(足利義政)의 양자인 족리의징(足利義澄, [아시카가 요시즈미])을 11대 장군으로 옹립하고 족리의직을 추방하였다. 이후 장군은 세천(細川)씨와 대내(大內, [오우치])씨에 의하여 결정될 정도로 매우 약화되었다. 막부의 실력자들도 가신들에 의하여 실권을 빼앗기는 등, 무력으로 주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탈취하는 하극상의 풍조가 전국을 휩쓸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전국시대의 사회상은 16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4. 막부의 멸망

1568년 족리의소(足利義昭,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직전신장(織田信長)의 지원을 받아 15대 장군에 취임하였다. 직전신장은 전국대명의 하나로서 기동성이 뛰어난 족경(足輕, [아시가루])을 주체로 하는 군사력을 조직해서 천하통일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장군 족리의소를 받들고 입경(入京)하여 그 권위를 빌려 경기 지역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족리의소는 장군이 된 뒤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함으로써 직전신장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직전신장은 족리의소의 행동을 제한하기 위하여, 1570년 자신과 상담하지 않고는 막부의 명령을 내리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족리의소와 직전신장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족리의소는 오미의 천정(淺井, [아사이])씨나 에치젠의 조창(朝倉, [아사쿠라])씨, 연력사(延曆寺, [엔랴쿠지]) 등과 결합하여 직전신장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직전신장은 이들을 모두 격파한 뒤 1573년 족리의소를 교토에서 추방하였다. 이로 인하여 240년간의 실정막부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참고문헌

  • 구태훈, 『일본고대·중세사』, 재팬리서치 21, 2008.
  • 박경희,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일본사』, 일빛, 199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