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倭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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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연해안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던 일본의 해적 집단.

개설

왜구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한국의 전통시대 내내 존재하였다. 이 중에서도 일본 전역이 남조와 북조로 나뉘어 내란에 휘말렸던 고려말 조선초에 왜구가 많았다. 왜구의 약탈로 고려 정부는 재정파탄을 겪다가 신흥무장 이성계 장군에게 멸망당하였다. 고려를 뒤이어 등장한 조선은 해군력을 강화하여 왜구를 진압하는 한편 대마도를 정벌하는 등 군사적인 대응을 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아시카가 막부의 장군을 조선 왕의 외교 상대로 공인하고 나아가 부산포·내포·염포 등 삼포를 개방함으로써 일본과의 평화적인 교린 체제를 형성하여 왜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내용 및 특징

왜구는 특히 1350년부터 조선이 건국되는 1392년까지 40여 년 동안에 가장 심하였다. 고려말의 왜구는 많은 경우 400~500척의 대 선단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수는 수만 명이나 되었다. 당시 왜구를 이끌던 지휘관들은 대부분 말을 타고 갑옷까지 갖춘 정규군 장교들이었다.

왜구가 1350년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이유는 일본이 남북조로 분열되어 격심한 전란을 겪었기 때문이다. 당시 왜구의 근거지는 일본의 서해도 일대와 규슈[九州] 지역이었다. 특히 대마도·일기도·송포(松浦) 등 세 곳의 왜구가 심하였다. 이곳의 왜구는 남북조시대의 전란에서 패배한 북 규슈의 무사단과 재지세력인 송포당 등 조직무장집단 그리고 전쟁으로 인하여 곤궁에 빠진 비조직적 영세민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려말의 왜구는 도서 지역과 해안가는 물론 내륙 깊숙한 곳까지도 노략질하였다. 이 결과 고려의 도서 지역과 해안 지역은 거의 무인지경이 되다시피 하였다. 『고려사절요』에는 왜구 때문에 “바다에서 50리, 혹은 30~40리 떨어진 곳이라야 백성들이 겨우 편안히 살 수 있다.”는 증언까지도 있다. 이것은 고려의 도서 지역은 물론 해안에서 내륙으로 50리(약 20㎞) 정도는 거의 왜구에게 약탈되었음을 반증한다. 한반도의 지형적 특성상 논과 밭은 넓은 평지가 발달한 해안가 가까이에 많았다. 그러므로 해안가로부터 50리 정도의 사이에는 비옥한 전답이 많았다. 이처럼 비옥한 해안가의 전답이 왜구 때문에 황폐화됨으로써 고려 정부는 재정파탄을 겪게 되었다. 그 반면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이성계로 대표되는 신흥무장 세력이 등장하였고 이들이 결국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이 건국되던 1392년에 아시카가 막부가 일본의 남북조를 통일시킴으로써 왜구 문제는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일본의 아시카가 막부 장군은 1392년에 남북조를 통일한 후, 1403년에 명나라로부터 ‘일본국왕(日本國王)’에 임명됨으로써 동아시아의 중국적 세계 질서에 편입되었다. 그 직후에 아시카가 막부 장군은 조선에 사신을 보내 국교수립을 요청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조선 태종은 1404년(태종 4) 7월부터 일본의 아시카가 막부 장군을 ‘일본국왕’으로 인정하였다. 태종이 아시카가 막부의 장군을 ‘일본국왕’으로 인정한 것은 동아시아의 중국적 세계질서 속에서 막부 장군이 조선 왕과 대등한 외교 대상자임을 확인한 것이었다. 이로써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이른바 상호 대등한 교린 체제가 성립되었다. 이는 통일신라가 멸망한 이후 끊어졌던 한일 간의 외교 관계가 550여 년 만에 회복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 교린 체제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거의 500년간 지속되었다.

변천

1404년에 성립된 교린 체제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일본의 무역선 또는 사행선들이 합법적으로 조선의 모든 포구에 기항하게 됨으로써 생기는 문제였다. 또 하나는 여전히 왜구가 준동한다는 문제였다. 첫 번째 문제와 두 번째 문제는 상호 연계되어 조선에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왜냐하면 무역선과 왜구가 구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역선을 가장한 왜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본의 막부 체제상 막부 장군이 지방의 영주들을 조선 왕처럼 중앙집권적으로 지배·통제하지 못함으로써 더욱 악화되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태종은 1407년7월에 왜선의 기항지를 내이포와 부산포로 한정시켰다. 그러나 태종의 조치에 불만을 품은 대마도 사람들은 다시 왜구로 돌변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1419년(세종 1) 6월, 당시 상왕으로 있던 태종은 이종무 장군을 보내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천명하였다. “만일 물리치지 못하고 항상 침략만 받는다면, 한(漢)나라가 흉노에게 욕을 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허술한 틈을 타서 쳐부수는 것만 같지 못하다(『세종실록』 1년 5월 14일).”

대마도 정벌은 227척의 병선과 17,285명의 병력이 동원된 조선시대 최대의 군사정벌이었다. 결과도 매우 성공적이었다. 정벌군은 100여 척의 적선을 소각하고 1,939채의 가옥을 불태웠으며 114명의 왜적을 참수하고 131명의 중국인 포로를 색출해 오는 전과를 올렸다. 대마도 정벌은 명실상부 조선시대 최대의 군사작전이며 가장 성공한 군사작전이기도 하였다.

세종대의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의 노략질은 거의 소멸되었다. 그것은 조선의 군사력을 대마도 사람들을 비롯한 일본인들이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노략질을 하다가는 그 이상의 보복 공격을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대마도 사람들을 비롯하여 노략질로 생활하던 일본인들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교린 체제 속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 기왕의 노략질이나 불법적인 어업, 밀무역 대신에 명실상부하게 합법적인 어업, 무역을 통하여 살 길을 찾아야 했다.

대마도 사람들은 세종을 상대로 수많은 요구를 해왔다. 기왕의 내이포와 부산포 이외에 더 많은 포구를 개항해 달라 요구한 것은 물론 거제도의 땅을 달라고 요구하기도 하고, 남해안 전체 어장을 개방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처음에는 모두 거절하였지만 생활고에 찌든 대마도 사람들의 요구가 거세지자 어느 정도 양보하여 타협안을 냈다. 세종이 울산 염포에서의 무역을 허락함으로써 대마도 사람들은 내이포·부산포 그리고 염포에서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세종은 대마도 사람들에게 전라도의 고초도(孤草島) 어장을 개방하였다. 고초도는 현재의 거문도로 추정된다. 이곳의 어장에서 좋은 물고기들이 대량 어획되었기에 대마도 사람들은 고초도 어장 개방을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당시 대마도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세종은 대마도 사람들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세종은 일찍이 “대마도 사람들이 만약 내가 쌀을 내린 것에 감사하여 변경을 소란하게 하지 않는다면 비록 해마다 1,000석이라도 줄 수 있다([세종실록] 10년 2월 17일 2번째기사).”고 한 적이 있었다. 세종은 일방적인 무력과 위협만으로는 대마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일정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던 셈이다. 세종은 대마도와의 군사적 충돌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조선의 영토와 영해를 지키면서 동시에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고초도 어장을 개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다만 개방하더라도 그곳이 조선의 영해와 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아울러 노략질의 위험을 없애기 위하여 세금 부담 및 통행증 발급 등 만반의 대책을 세웠다.

1441년(세종 23) 11월 22일에 고초도 어장을 개방하기로 한 지 2년 후인 1443년에 조선과 대마도 사이에 이른바 계해약조가 체결되었다. 계해약조는 조선 정부가 대마도 도주에게 매년 200석의 쌀과 콩을 무상으로 원조하고, 대마도 도주는 매년 50척의 세견선을 보낸다는 약조로서, 이 약조는 조선초기 대일통교 체제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이로써 대마도·일기도·송포 등 3도의 왜인들은 기왕의 약탈자 왜구에서 어부 또는 교역자로 바뀌게 되었다.

이처럼 조선은 해군력을 강화하여 왜구를 진압하는 한편 대마도를 정벌하는 등 군사적인 대응을 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아시카가 막부의 장군을 조선 왕의 외교 상대로 공인하고 나아가 부산포·내포·염포 등 삼포를 개방함으로써 일본과의 평화적인 교린 체제를 형성하였고 그 결과 왜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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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사(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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