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牧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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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소 등의 가축을 기르기 위해 인공적으로 일정한 설비를 갖춘 곳.

개설

목장(牧場)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국마목장(國馬牧場)과 민간에서 운영하는 사마목장(私馬牧場)이 있었다. 조선전기까지는 국마목장에서 말을 관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사마목장에서 국가에 말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변천

1) 국마목장

조선시대의 국마목장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되면서 정비되었다. 각 도의 목장은 관찰사 아래에 감목관(監牧官)을 두어, 실무를 담당하는 군두(群頭)와 군부(群副) 및 목자(牧子)를 관할하도록 조직되었다. 즉 암말 100필과 수말 15필을 1군(群)으로 삼고, 군마다 군두 1명, 군부 2명, 목자 4명을 배치하여 말을 돌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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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설치된 목장의 수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59개소, 중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87개소, 현종 때 편찬된 『목장지도(牧場地圖)』에는 폐목장 62개소를 포함해 138개소, 영조 연간에 간행된 『반계수록(磻溪隨錄)』에는 123개소, 철종 때 편찬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114개소, 순종 때 간행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지방 목장만 172개소로 기록되어 있다.

(1) 중앙의 국마목장

도성 인근에는 한양 동쪽 근교에 위치한 살곶이목장(箭串牧場)과, 양주도호부 녹양벌 일대에 자리한 녹양목장(綠楊牧場)이 있었다. 그러나 녹양목장은 호랑이 등 맹수가 출몰하는 바람에 가축을 기르기가 어려워 조선중기 이후에 폐장되었다.

왕실 목장인 살곶이목장은 태조 때 설치되었으며, 사복시(司僕寺)에서 관할하였다. 어승마를 비롯해 왕실에서 사용하는 내구마(內廐馬)와 관마, 군사용으로 쓸 전마(戰馬), 중국에 보낼 진헌마(進獻馬) 등을 공급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또한 매년 지방 목장에서 바치는 세공마를 기르고, 양마를 전국 목장 및 관아에 분양하는 일도 담당하였다.

살곶이목장에는 마조단(馬祖壇)·선목단(先牧壇)·마보단(馬步壇)·마사단(馬社壇)을 설치하여 말의 무병과 번식을 기원하였다. 또한 살곶이목장은 말을 조습(調習)하고, 왕이 친히 수렵과 열무(閱武)강무(講武)를 검열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런 까닭에 조선 조정에서는 "다른 목장과 비교할 수 없다."거나 "조종(祖宗)께서 나라를 위하는 지극한 헤아림으로 설치하였다."(『성종실록』 23년 6월 18일)고 강조하며, 그 관리에 전념하였다.

목장의 경계는 석책(石柵)을 축조해 표시하였는데, 『사복시 살곶이 목장도』에 따르면 아차산 마루에서 망우동, 중량포, 답십리를 거쳐 살곶이에 이르고, 살곶이에서 한강을 경계로 동쪽으로 이어지다가 광나루에서 다시 능선을 따라 아차산에 이르고 있다. 이 경계가 포함하는 영역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성동구·광진구·중랑구와 동대문구 일부에 해당한다. 총 둘레는 약 30~40리로, 1,000필의 말을 사육하며 10,000필의 새끼를 기를 수 있는 넓은 면적이었다. 한편 살곶이다리 부근에 위치한 미요문(尾窯門) 앞에서부터 광나루까지는 버드나무를 심어, 총 길이 2,210보의 수책(樹柵)으로 바람을 막고 한강의 범람에 대비하였다.

(2) 지방의 국마목장

지방 목장의 실태는 『증보문헌비고』「병고(兵考)」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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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목장 중에서는 제주도 목장을 비롯해 강화도 목장, 진도 목장, 도련포 목장, 마응도 목장, 두원태 목장 등이 유명하였다. 제주도는 말의 명산지로 특히 중시되었다. 영조는 제주도를 "국마의 부고(府庫)"라고 일컬었으며, 숙종 때 이조 판서를 지낸 이인엽(李寅燁)은 제주도를 중국의 말 명산지 기북(冀北)에 비유하면서 "국초에는 흔히 이 말을 중국에 조공하기도 했으며 어승마로 삼았다."고 하였다. 또 철종 때 의금부 도사를 역임한 오명환(吳明煥)은 "우리나라 말은 전적으로 제주도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숙종 연간에 제주목사를 지낸 이형상(李衡祥)은 "섬(제주도)의 일은 마정(馬政)보다 큰 것이 없다."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 또한 "제주에서 말이 새끼를 치는 것은 진(晉)나라의 굴(屈)에서 나는 것과 같아서, 다른 지역에서 나는 것에 비길 바가 아니다."라고 하는가 하면, "제주의 용종(龍種)은 왕의 마구간[御乘馬廐]에 들어간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제주도에는 국마목장과 사마목장이 모두 설치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김만일(金萬鎰)의 사마목장과 관민이 합동으로 운영한 산마장(山馬場)이 설치되어 우리나라 최대의 말 공급지로서 기능하였으며, 그 운영 사례는 전국 목장의 기준이 되었다. 그밖에도 제주도에는 특별 목장인 별둔장(別屯場)과 공마(貢馬)를 사육 및 생산하기 위한 서산장(西山場)을 비롯해 청마장(淸馬場)·좌가장(左可場)·고마장(雇馬場)·양달장(楊達場)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제주도의 목장에서는 많을 때는 2만~3만 필, 적을 때는 1만~2만 필의 말이 목양되었다. 생산된 말은 공마로 진상했는데, 평년에는 세공마(歲貢馬) 300필을, 3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식년(式年)에는 300필을 추가로 진상하였다. 그 외에도 체임마(遞任馬)·봉진마(封進馬)와 중국에 보낼 진헌마(進獻馬)·교역마 등으로 해마다 수천 필의 말이 반출되었다.

공마를 수송하는 일은 1척당 30~40필의 말을 실을 수 있는 공마선을 갖추어야 할 뿐 아니라, 험난한 바다에서 표류하거나 익사하는 일이 잦아 큰 부담이 되었다. 한양까지 공마를 수송하는 데는 2~3개월이 소요되었다. 제주 조천포(朝天浦)에서 바다로 전라도 해남·강진까지 가는 데는 순풍일 경우 1~3일, 그렇지 못할 때는 4~8일이 걸렸으며, 때로는 10일 이상 소요되거나 유구국(琉球國), 일본의 대마도 및 일기도, 중국 해안 등으로 표류하는 일도 있었다. 한편 공마의 수송은 제주목사와 제주 삼읍(三邑)의 감목감(監牧監)의 책임 아래 이루어졌는데, 도중에 말이 죽거나 말을 잃어버리면 처벌을 받았다. 따라서 공마 수송의 부수적인 결과로 조선술과 항해술 등이 발달하게 되었다.

2) 사마목장

사마목장은 임진왜란 이후에 발달하였는데, 특히 제주도의 김만일(金萬鎰) 목장과 영조 때 김하정(金夏鼎) 목장이 유명하였다.

3) 목장의 관리

조선의 목장 관리 규정은 『경국대전』「병전(兵典)구목(廐牧) 조가 제정되면서 정립되었다. 그리고 이때 확립된 규정은 이후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속대전(續大典)』 및 『대전통편(大典通編)』 등으로 계승되어, 조선후기까지 큰 변화 없이 적용되었다.

조선시대 말의 수는 초기에는 약 6만~7만 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종 연간에는 약 40,000필이었고, 그 뒤 1502년(연산군 8)에는 30,000필, 1522년(중종 17)에는 20,000필, 1678년(숙종 4)에는 20,213필이었다. 이후 점차 감소하여 1805년(순조 5)에는 8,377필, 1858년(철종 9)에는 10,137필이었다가, 1870년(고종 7)에는 4,646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참고문헌

  • 남도영, 『濟州島牧場史』, 한국마사회 한국마사박물관, 2003.
  • 남도영, 『韓國馬政史』, 한국마사회 한국마사박물관, 1997.
  • 남도영 해제, 『목장지도해제』, 국립중앙도서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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