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倭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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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일 외교와 통상을 위하여 부산포 등에 설치한 객관(客館), 상관(商館), 일본 공관(公館) 및 일본인 거주 지역.

개설

왜관은 조선시대 한국과 일본의 교류 장소로 1407년(태종 7) 설치되했다가 삼포왜란, 임진왜란 등의 전란을 겪으면서 몇 차례의 치폐를 거듭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세 곳의 포구를 열어 일본인들이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본 사절은 이곳을 통해 입국하였다. 삼포왜관에 도착한 일본 사절들은 서울로 가서 동평관에서 머물면서, 조선 국왕을 알현하고 외교 업무를 보았다. 동평관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조선후기 일본 사절의 상경이 금지되면서 함께 폐쇄되었는데, 이때부터 왜관의 중요성은 더해졌다.

1547년(명종 2) 양국이 체결한 정사약조(丁巳約條)에 따라 왜관은 부산포 한 곳에만 설치하였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1876년(고종 13) 근대 개항까지 이어졌다. 특히 17세기 이후 조선과 일본은 자국인이 해외에 나가 거주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하였다. 물론 외국인이 자국에 들어와 일정 기간 거주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이런 정책을 해금(海禁), 쇄국정책이라 부른다. 이러한 정세 속에 최소한의 외교와 통상의 필요에 따라, 일정한 지역에 ‘특별한 장소’인 왜관을 만들었다. 조선후기 동래부 부산포에 있었기 때문에 동래관, 내관, 부산관, 부관이라 불렀다. 일본에서는 왜관을 화관(和館)이라 불렀다.

왜관은 외국인 곧 일본인이 머무는 공간이고, 일본과의 외교·무역은 물론 양국민의 접촉과 교류가 이루어져 양국의 문화가 교류되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 일본 사절은 왜관의 서관(西館)에 머물렀다. 왜관 밖 객사(客舍)에 가서 조선 국왕에 대한 숙배례(肅拜禮)를 하고 가지고 온 예물을 바쳤다. 공식 의례 절차를 마치면 연향대청(宴享大廳)에서 동래부사가 주관하는 연회가 베풀어졌다. 또한 외교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왜관에서는 매월 3·8일에 조·일무역시장인 개시(開市)가 있었다. 중요 거래 물품은 중국산 비단·비단실[生絲, 白絲]과 조선산 자연삼, 산삼 같은 인삼이었다. 이를 수입하기 위해 일본은 막대한 은(銀)을 지출하였다. 왜관을 통해 수출된 중국산 비단실은 일본 열도의 비단 생산지까지 운송되었으며, 왜관을 통해 수입된 일본산 은은 조선 사절단이 중국무역을 위해 다시 중국 북경까지 가지고 갔다. 이로써 왜관과 왜관이 소재한 동래부는 중국에서 일본에 이르는 실크로드와 일본에서 중국에 이르는 실버로드가 교차하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건국 후 태조는 국내 안정을 위해 무엇보다 약탈을 일삼는 왜구를 근절해야 했다. 왜구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한편, 일본인들이 약탈 대신 무역을 통해 물자를 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위해 왜구 본거지의 호족들을 회유하고, 막부 장군에게 사절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1404년(태종 4) 일본국왕사가 조선에 파견되고 이를 인정하고 접대함으로써 조일양국의 국교가 성립하였다. 왜구가 평화적 통교자로 변하고, 무역을 하러 온 일본 상선 곧 흥리왜선, 일본 사절, 귀화하는 일본인이 늘어났지만 아무런 규제가 없었다. 수천 명의 일본인이 조선의 포구에 머무르는 상황이 되자 이들을 통제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407년(태종 7) 흥리왜선이 정박할 수 있는 곳을 진해의 제포, 부산의 부산포 두 곳으로 제한하고 이곳에서만 무역을 하도록 하였다. 이후 염포에도 추가로 왜관을 두었다. 조선전기에는 삼포왜란, 사량진왜변, 을묘왜변으로 왜관 존치(存置)의 변화를 많이 겪었다. 결국 임진왜란으로 폐쇄되었다가 국교를 회복하면서 다시 왜관을 두게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일본군의 재침에 대한 우려와 함께 일본에서 들여오는 군수물품 수입 등 양국 무역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왜관을 다시 설치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왜관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 조직, 직무가 제도화된 것은 조선후기 두모포왜관이 성립된 이후였다. 조선 측에서 왜관 업무를 전관한 것은 동래부사, 부산첨사였다. 동래부사는 밤낮으로 일본인을 접하고 중앙 조정을 대신하여 왜관 업무를 총괄한다는 역할에서 그 임명에서부터 신중을 기하였다. 일본 사절이 상경하지 못하므로 왜관에서 외교 업무를 진행하는데 이들을 응대하는 조선 측 외교관이 동래부사였다. 또한 매월 왜관에서 진행한 무역품, 무역량, 무역상인의 현황을 보고하고, 왜관 운영에 필요한 절목(節目), 사목(事目)을 입안하기도 하였다. 동래부에서는 왜관과 관련 건물을 초량공해(草梁公廨)로 별도로 구분하고 관리하여 왜관 업무를 특화하였다.

부산첨사는 종3품의 관리로 동래부사와 품계상 차이가 없었다. 또한 일본 사절이 예조에 보내오는 외교문서를 동래부사와 함께 공람하는 지위에 있었다. 부산첨사의 업무는 왜관 통제였다. 양국인의 왜관 출입을 통제하고, 왜관 경계의 업무, 일본인과 일본 선박의 조선 출입국 조사를 담당하였다. 또한 왜관에 체류하는 일본인에게 지급하는 왜공(倭供) 공급을 주관하였다.

동래부사와 부산첨사 아래에 서울에서 파견된 왜학역관(倭學譯官)이 있었다. 역관은 왜관 밖의 집무소와 숙소에 머물면서 동래부와 왜관의 의사소통과 문서 전달을 담당하였다. 또한 조일무역에 참여하여 공무역을 주도하고 스스로 무역상인이 되어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이 외 일본에서 차왜가 파견되었을 때, 조선 측에서 접위관을 파견하여 외교 현안을 함께 담당하도록 하였다. 또한 왜관에서 개시가 있을 때 호조에서 파견된 수세산원(收稅算員)이 무역세를 징수하고 무역 현황을 점검하였다.

왜관에는 500명 정도의 일본인이 거주하였다. 관수(館守)·재판(裁判)·대관(代官)·동향사승(東向寺僧)·통사(通詞)·횡목(橫目)·목부(目付)·의사·응장(鷹匠)·도공(陶工)·상인·뱃사공 등과 외교 사절인 연례송사(年例送使)와 별차왜(別差倭)가 있었다. 이 가운데 관수·재판·대관·동향사승은 조일 외교 및 무역의 중심적인 실무자로 왜관 사역(四役)이라고 불렀다.

관수는 왜관 일본인을 통수하고, 외교·무역 업무를 총괄하는 일본 측 관리였다. 왜관이 처음 설립되었을 때에는 관수가 파견되지 않아 일본 사절로 온 첨관(僉官)이나 대관이 그 일을 담당하였다. 1637년(인조 15) 관수가 파견된 후 왜관의 규칙 및 법령이 정비되고, 왜관의 업무가 안정되었다.

재판은 재판차왜(裁判差倭)의 줄인 말로 조일 양국 간의 외교 업무나 교섭을 주관하기 위해 파견된 일본 사절이란 의미이다. 관수와는 별도로 외교적 현안을 해결해 나갈 일본 측 관리가 필요하였고, 이에 1650년대에 재판차왜가 본격적으로 파견되었다.

대관은 조선 측 사료에 1635년(인조 13) 대마도주가 공·사무역을 담당하는 24명을 처음 파견하였다고 기록되었다. 하지만 관수가 파견되기 전에 왜관 업무를 담당한 것을 보면 그 기원은 거슬러 올라간다. 왜관의 공무역, 개시무역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대관은 1·2·3대관, 별대관(別代官)으로 구분되어 업무를 담당하였다.

동향사승은 왜관 안에 있던 동향사라는 절에 상주한 일본 승려였다. 동향사는 종교적 역할 외 대마도와 동래부를 왕복하는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조선전기 삼포왜관에서도 사찰은 많이 볼 수 있는데, 조선후기 부산왜관에는 동향사가 존속하였다. 동향사의 승려가 기록한 『양국왕복서등(兩國往復書謄)』이나 관수가 작성한 『매일기(每日記)』 등을 보면 동향사의 창설은 적어도 1634년 이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7세기 중엽 이후 왜관 업무를 담당하는 일본인 관리, 조직, 업무의 제도화가 이루어져 초량왜관까지 이어졌다.

변천

1404년(태종 4)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성립하자 조선에 입국하는 일본인이 크게 늘었다. 호전적인 일본인이 임의로 한반도에 머무는 것이 우려된 조선에서는 일본인이 입항할 수 있는 포구를 지정하고 그곳에 왜관을 설치하였다.

1407년(태종 7) 무역을 하러 온 흥리왜선에 대해 제포와 부산포 두 곳에만 입항하도록 하였다. 1410년(태종 10)에는 일본 사절이 탄 사송선에 대해서도 입항하는 포구를 지정하였다. 두 곳의 왜관에 머무르는 일본인이 점차 증가하자 1418년(태종 18) 울산의 경상좌도 염포와 경상우도 가배량 두 곳에도 왜관을 설치하여 항거왜인을 나누어 머물도록 하였다. 1419년(세종 1) 대마도 정벌로 4곳의 왜관이 잠시 폐쇄되었다. 1423년(세종 5) 제포왜관과 부산포왜관, 1426년(세종 8) 염포왜관을 다시 열었다. 제포, 부산포, 염포를 삼포라고 일컫고 이곳에 설치한 왜관을 삼포왜관이라고 부른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이 발발하여 다시 왜관 운영에 변화를 겪었다. 성종 이후 왜관의 항거왜인에 대한 수세(收稅), 호구조사 등 왜관 거주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고, 연산군 시기 일본 사절에 대한 접대 소홀, 관리의 횡포가 이어지자 삼포에 머물던 일본인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결국 삼포왜란이 발발하였다. 삼포왜관 이후 맺어진 임신약조의 결과로 제포왜관만을 열었으나 1521년(중종 21) 부산포왜관도 다시 열었다. 1544년(중종 39) 사량진왜변으로 모든 왜관을 폐쇄하였고, 1547년(명종 2) 맺은 정미약조의 결과로 부산포왜관 한 곳만 열었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양국의 관계가 단절될 때까지 부산포왜관이 존속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 덕천(德川) 막부는 조선과의 통교를 요청하고, 조선 역시 일본의 재침 등을 우려하고 있었다. 국교 회복을 위한 사절이 오갔고, 1601년(선조 34) 동래부 절영도에 임시왜관을 마련하여 일본 사절의 숙소로 삼았다. 양국 관계가 정상화될 분위기에 놓이자 새로운 왜관 조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조선전기 부산포왜관 터는 종전 후 부산진 군영으로 흡수되어 일본인이 사용할 수 없었다. 1607년(선조 40) 부산진에서 5리 떨어진 곳에 1만 평 규모의 정식 왜관을 설치하였다. 이때의 왜관을 두모포왜관이라고 부른다. 두모포왜관은 오늘날 부산시수정동에 있었다. 두모포왜관이 조성된 지 30여 년이 지나자 공간 협소, 선창 시설 부족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17세기 중엽 이후 증가하는 조일무역량과 늘어나는 일본 사절을 접대하기에는 두모포왜관이 협소하고, 선창 시설도 부족하였다. 이에 1678년(숙종 4) 오늘날 부산시 용두산공원 주변에 10만 평 규모의 초량왜관을 새롭게 조성하였다. 1873년(고종 10) 일본 외무성이 대마도가 담당하던 왜관 업무를 일방적으로 접수하여 초량왜관의 운영이 종결되었지만, 1876년(고종 13) 조일수호조규로 부산포가 근대 개항을 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의의

왜관은 조선시대 남해안에 설치된 유일한 외국인 특구로서 중국과 조선의 문물이 건너가고, 일본과 동남아시아의 문물이 들어오던 교류의 중심지였다. 조선전기에는 일본 사절이 입항하는 장소이자, 일본인이 거주하면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조선후기의 왜관은 그 기능이 크게 확대되었다. 조선의 쇄국정책 아래에서 유일하게 열린 공간으로, 일본 사절의 상경이 금지되어 대일 외교와 무역을 수행한 공간이었다.

조선후기 일본과의 관계를 유지하던 두 개의 축은 통신사(通信使)와 왜관이었다. 통신사 파견은 조선후기 전 시기 동안 회답겸쇄환사 세 차례 파견을 포함하더라도, 모두 열두 차례 있었다. 한시적이고, 명분적인 통신사 파견보다 왜관에서의 교류는 실제적, 구체적, 장기적, 상시적이었다. 그러므로 왜관이 있는 동래부의 지역민들은 일본인과 교류를 일상적으로 할 수 있었다. 절영도왜관, 두모포왜관, 초량왜관으로 왜관은 이전하였지만 동래부에만 왜관이 270년간 존속하였다. 동래(현 부산)는 일본과 외교, 무역, 문화, 생활 등 교류가 이루어졌던 조선 내에서 유일한 도시였다.

1876년 개항 후 일본인 전관거류지가 초량왜관 부지를 그대로 계승함으로써, 왜관은 근대 문물의 창구이자,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발판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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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관지(春官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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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신사등록(通信使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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