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미성(徐彌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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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83년(우왕9)∼1431년(세종13) = 49세]. 조선 초기 태종∼세종 때 문신. 자는 자상(子常)이고, 본관은 달성(達成)이다. 아버지는 고려 호조(戶曹) 전서(典書)서의(徐義)이고, 어머니 언양김씨(彦陽金氏)는 고려 개성윤(開城尹)김숙명(金淑明)의 딸이다. 양촌(陽村)권근(權近)의 사위이고, 사가정(四佳亭)서거정(徐居正)의 아버지다.

태종∼세종 시대 활동

1399년(정종1) 식년(式年) 사마시(司馬試)의 생원시(生員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17세였다. 그때 권근이 서미성을 보고 마음에 들어 사위로 삼았는데, 권근의 문하(門下)에서 처남 권제(權踶)와 함께 수학하였다.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나가서 여러 하급 관직을 거쳐 종5품 경기도경력(經歷)에 임명되었다. 1420년(세종2) 경기도 경력으로 있을 때, 세종이 상왕 태종(太宗)과 함께 경기도 지방에 강무(講武)를 나왔다. 경기도관찰사조치(曹致)와 함께 두 임금에게 문안하고 그 지방 특산물을 바치니 상왕이 두 사람에게 사슴 한 마리씩을 하사하였다. 또 상왕과 세종이 돌아갈 때 조치와 서미성이 하직하니 두 임금이 각각 옷을 하사하였다. 1422년(세종4) 내자시 윤을 거쳐,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 그 뒤에 그는 안주목사(安州牧使)로 나갔다가 임기를 채우고 돌아와서, 1431년(세종13) 병으로 갑자기 죽으니, 향년이 49세였다.

성품과 일화

그는 과거를 보는 것도 사양하고, 벼슬길에 진출하는 것에도 별로 뜻이 없었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아가서 일을 할 때에는 맡은 바 직무를 부지런히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1420년(세종2) 세종이 상왕 태종(太宗)을 모시고 경기도 지방에 강무(講武)를 나갔을 때, 경기도 경력으로 있던 서미성은 두 임금에게 문안하고 여러 가지 시중을 들었는데, 상왕은 “서미성이 직무에 부지런하다.”고 칭찬하고, 세종에게 명하여 한 계급을 가자(加資)하게 하였다.

서미성은 문신이었으나, 무재(武才)가 있어서 무관직도 맡았다. 서거정의 『사가집(四佳集)』을 보면, “아버지가 일찍이 경상도 합포(合浦)를 지킬 적에 어떤 양수척이 최윤덕(崔潤德)을 데리고 군영으로 와서 아버지를 뵙고 최윤덕이 활을 잘 쏜다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아버지가, ‘그러면 한번 시험해 보자.’ 하고, 그와 같이 사냥하면서 그 재주를 시험하니, 최윤덕은 좌우로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는데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최윤덕은 아버지 최운해(崔雲海)가 전사한 다음에 4형제가 고아가 되어 한마을에 살던 양수척에게 의탁하여 살고 있었다. 그때 서미성은 최윤덕의 무재를 알아보고 발탁하여 자기 옆에 두고 무술을 연마시켰다. 그 뒤에 최윤덕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가 되어, 1433년(세종15)에 파저강(婆猪江: 동가강) 야인 대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정벌하고, 1435년(세종17) 좌의정에 올랐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장단(長湍) 도라산(都羅山) 서남쪽 언덕에 있고, 그의 10대 후손 영의정서종태(徐宗泰)가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만정당집(晚靜堂集)』 권14)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양촌권근의 딸인데, 자녀는 2남 5녀를 두었다. 장남 서거광(徐居廣)은 현감(縣監)을 지냈고, 2남 서거정(徐居正)찬성(贊成)을 지냈으며 23년간 문형(文衡)을 맡았다. 또 4녀는 영의정최항(崔恒)의 부인인데, 조선 전기 유명한 여류 풍수음양가(風水陰陽家)였다. 세조 때 서거정이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훈(策勳)되었기 때문에 아버지 서미성은 정1품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달천부원군(達川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서거정은 후사가 없고, 서거광의 후손은 크게 영달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사가집(四佳集)』
  • 『만정당집(晚靜堂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필원잡기(筆苑雜記)』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