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行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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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와 함경도 연변의 요충지를 따라 여진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한 방어물.

개설

행성은 평안도의 4군과 함경도의 6진을 거점으로 연변을 따라 석성, 목책, 녹각성 등을 축조한 것이다. 1440년(세종 22)부터 1450년(세종 32)까지 10년간 이루어진 행성 축조는 평안·함길도도체찰사(平安·咸吉道都體察使)황보인(皇甫仁)이 전담했다(『세종실록』 22년 8월 26일). 황보인은 작은 규모의 군사시설인 구자(口子) 사이의 거리가 먼 경우, 구자를 증설하여 가까운 거리마다 목책을 설치하고, 견고하지 못한 목책을 석보(石堡)로 개축하였으며, 중국식의 관방제를 도입하여 벽돌재로의 축성을 시도함으로써 장성(長城)에 비길 수 있는 행성 축조를 구체적으로 이루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평안도의 행성은 강을 따라 쌓았다. 세종대 행성 축조에는 황보인이 활약했다. 황보인은 1440년에 평안·함길도도체찰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김종서가 1433년(세종 15) 이래 함길도의 관찰사와 도절제사로서 사군 육진으로 대표되는 북방 개척을 대강 마무리 지은 후 세종은 그를 거점으로 평안도와 함길도 국방선을 따라 행성을 축조하여 해당 지역의 내실을 기하고자 한 것이다. 이후 황보인은 1440년부터 1450년까지 1년 평균 두 차례씩 약 10년간 평안·함길도도체찰사로서 매번 1~3개월 동안 체찰 활동을 통해 행성을 축조했다. 1441년 3월 평안도 조명간행성(趙明干行城)을 쌓게 하였는데, 본도의 정부(丁夫) 8,390명을 사역하여 석축(石築)의 길이 5만 947척(약 15㎞), 녹각성의 길이 5,807척 7촌(약 2㎞)을 쌓았고, 종사관정이한(鄭而漢)을 보내어 벽단행성(碧團行城)을 쌓게 하였는데, 본도의 정부 8,263명을 사역하여 석축의 길이 3만 795척 6촌(약 9㎞), 녹각성의 길이 5,218척 4촌(약 1.6㎞)을 쌓았다. 9월에는 함길도 온성부(穩城府)의 행성을 쌓았다. 본도의 정부 1만 5천 명과 강원도의 정부 8천 명을 역사시켰다. 석축의 길이가 8만 5,205척(약 26㎞)이요, 녹각성의 길이가 4만 6,717척(약 14㎞)이었다. 1442년에는 평안도 정부 1만 명을 징발하여 조명간행성의 허물어진 곳 2만 4,110여 척(약 7㎞)을 수축하고, 또 석보(石堡를 쌓았는데 둘레가 4,400척(약 1㎞)이었다. 또 정부 4,200명을 내어 우예구자(虞芮口子) 행성을 쌓았는데 길이가 1만 590여 척(약 3㎞)이며, 석보를 쌓았는데 둘레가 1,980여 척(약 600m)이고, 또 정부 3백 명을 내어 자성군(慈城郡) 지영괴구자(池寧怪口子) 행성을 쌓았는데 길이가 3,090여 척(약 1㎞)이며, 또 정부 9천 명을 내어 강계부(江界府) 만포구자(滿浦口子) 행성을 쌓았는데 길이가 1만 5,675척(약 5㎞)이요, 석보를 쌓았는데 둘레가 6,644척(약 2㎞)이요, 또 본도 정부 3백 명과 황해도 정부 2천 명을 내어 강계부 고산리구자(高山里口子) 행성을 쌓았는데 길이가 1만 2,619척이었다. 또한 함길도 정부 5,300명을 내어 온성행성(穩城行城) 1만 6,970척(약 5㎞)을 쌓고 험한 곳의 흙 1만 4,460여 척(약 4㎞)을 깎아 내렸다. 또 종성행성(鍾城行城) 2,370여 척(약 720m)을 쌓고 흙 2,630척(약 800m)을 깎아 내렸다. 이는 모두 2월 초10일에 시작하여 3월 초10일에 역사를 파하였다.

1443년 3월에는 평안도에서 인부 3천 명과 황해도에서 6천 명을 징발하여 창성군(昌城郡) 창주구자(昌州口子)의 석보와 행성을 쌓게 하였는데, 석보는 둘레가 4,533척(약 1㎞)이고, 행성은 길이가 2만 1,573척(약 6.5㎞) 내에 석축이 1만 8,804척(약 5.6㎞)이고, 녹각성이 2,769척(약 800m)이다(『세종실록』 25년 3월 10일). 또한 회령, 온성군(穩城郡)에도 쌓았는데, 돌로 쌓은 것이 380척(약 115m)이고, 또 종성군(鍾城郡)의 행성을 쌓았는데 돌로 쌓은 것이 1만 9,917척(약 6㎞)이요, 내[川] 가운데에 녹각성을 세운 것이 175척(약 53m)이요, 흙을 깎은 것이 2,219척(약 672m)인데, 본도 군사 8천 명을 역사시켜 8월 20일에 시작하여 9월 20일에 끝났다. 1445년 7월에는 종성부의 남북에 걸친 석축과 갑산군 혜산의 석보를 수축했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거의 동시에 추진된 역사였다(『세종실록』 27년 7월 7일). 먼저 갑산군 혜산의 석보 수축이 8월 5일에 시작되었고, 종성부의 석축 공사가 그보다 열흘 늦은 8월 15일에 시작되었다. 모두 한 달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각각 9월 4일과 9월 15일에 완료되었다. 온성으로부터 종성 동관(童關)에 이르기까지는 5진(鎭)의 요충에 행성을 축조함으로써 막고 지키기가 수월하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석보를 축조할 때는 석보마다 만호를 시켜서 지키도록 했다. 석보의 좌우에 행성을 쌓는 이유는 석보 안의 인민들이 안전하게 농사짓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행성이 없다면 밭갈이할 즈음인데도 적변(賊變)이 두려워 인민들이 늦게 나가고 일찍 돌아오게 됨으로써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행성의 구조는 조명간성(趙明干城)의 경우 외면에는 단지 돌로써 포개어 쌓았고, 그 내면은 모두 모래와 흙으로 메웠다. 그래도 석보보다는 행성의 역사가 수월했다. 평안도와 함길도의 행성은 군인 한 사람이 3, 4척을 쌓아야 하여 그 노역이 너무 무거웠다. 게다가 행성을 축조하기 위해 위남도에서 동원되는 군사들은 가지고 가는 식량의 부담이 컸다. 1442년(세종 24) 11월 평안도의 연변(沿邊) 행성을 축조하기 위해 충청상도(忠淸上道)의 8천 인과 황해도의 8천 인을 뽑았는데, 이들은 왕래하는 동안 소용될 식량을 가져가야 했는데 그 부담이 매우 컸다. 그러므로 해당자의 아들은 식량을 지고 가는 대신 화포(貨布)를 가지고 무역하여 양식에 보충했다.

변천

세종대 북방의 행성 축조가 일단락된 후 세조대의 소강상태를 지나 예종대 들어 다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때 명(明)의 여진에 대한 방비시설인 요동 장성이 조선의 벽동(碧潼) 강변까지 이르게 되었던 국경지역에서의 대외적 변화와 관련하여, 명의 사신들이 왕래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축성이 이루어져야 했던 것이다. 이에 성종대에 다시 평안·함길도의 장성 축조 역사가 재개되었다. 특히 1481년(성종 12) 명이 동팔참(東八站) 지역을 점거하면서 북방의 방비를 위한 축성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했는데, 이에 따라 평안도 행성 축조를 둘러싼 논의가 다시 분분해졌다. 이때에는 세종대 축조한 행성 중 무너진 것을 보수하고 그때 쌓지 않은 곳에 행성을 신축하는 방향으로 역사가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평안도 의주성이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김순남, 「世宗代 體察使制의 運用」, 『한국사학보』14, 2003.
  • 김순남, 「成宗代 體察使의 變化와 築城司의 설치」,『사학연구』71, 200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