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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총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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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5년(우왕 1) 여름에 전법사(典法司) 총랑(摠郞)으로 옮겼으며, 1377년(우왕 3)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상제(喪制)를 끝마쳤다. 1383년(우왕 9) 공주목사(公州牧使)가 되었는데, 그때 [[왜구(倭寇)]] 1천여 명이 옥주(沃州)·보령(報令) 등의 고을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공주 계룡산에 웅거하였다. 공주 목사최유경이 판관송자호(宋子浩)와 함께 구점(仇岾)에서 왜구와 싸워서 물리쳤다.(『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32 참고.) | 1375년(우왕 1) 여름에 전법사(典法司) 총랑(摠郞)으로 옮겼으며, 1377년(우왕 3)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상제(喪制)를 끝마쳤다. 1383년(우왕 9) 공주목사(公州牧使)가 되었는데, 그때 [[왜구(倭寇)]] 1천여 명이 옥주(沃州)·보령(報令) 등의 고을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공주 계룡산에 웅거하였다. 공주 목사최유경이 판관송자호(宋子浩)와 함께 구점(仇岾)에서 왜구와 싸워서 물리쳤다.(『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32 참고.) | ||
− | 1388년(우왕 14) 정월 최영(崔瑩)과 이성계( | + | 1388년(우왕 14) 정월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가 권신(權臣) 임견미(林堅味)·이인임(李仁任) 등을 주살(誅殺)할 때 이성계가 최유경을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로 보내어 [[전민(田民)]]의 동요를 막게 하였다. 5월 우왕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최유경을 서북면전운사(西北面轉運使)에 임명하여 [[찰방(察訪)]]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자, 조정의 관리들이 모두 이성계에게 붙었으나, 오로지 최유경만은 성주(成州)로 달려가서 우왕에게 변란을 고하고, 우왕을 수종하여 개경(開京)으로 돌아왔다. 이성계와 친구사이였던 최유경은 이성계를 도와야 하지만, 고려에 충성한다는 일념으로 우왕을 도왔던 것이다. |
이성계가 최영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았을 때, 이성계가 특별히 그를 보호하여 주었는데, 이성계는 최유경의 충직함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해 8월 여러 도(道)의 [[안렴사(按廉使)]]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士)라고 바꾸고 [[교서(敎書)]]와 부월(鈇鉞)을 가지고 지방에 가서 민심을 달랬는데, 최유경은 전라도에 파견되었다.(『고려사절요』 권33 참고.) 1389년(공양왕 1) 최유경을 발탁하여 밀직사(密直司) 부사(副使)에 임명하였다. | 이성계가 최영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았을 때, 이성계가 특별히 그를 보호하여 주었는데, 이성계는 최유경의 충직함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해 8월 여러 도(道)의 [[안렴사(按廉使)]]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士)라고 바꾸고 [[교서(敎書)]]와 부월(鈇鉞)을 가지고 지방에 가서 민심을 달랬는데, 최유경은 전라도에 파견되었다.(『고려사절요』 권33 참고.) 1389년(공양왕 1) 최유경을 발탁하여 밀직사(密直司) 부사(副使)에 임명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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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년(태조 7) 봄에 태조이성계가 장차 평주(平州: 평산) 온정(溫井)에 거둥하려고 개성유후사에서 머물렀는데, 유후사의 정령(政令)이 해이한 것을 보고 즉시 최유경을 유후에 임명하였다. 그때 최유경이 나아가서 아뢰기를, “신(臣)이 일찍이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에 봉향(奉香)하였는데, 수릉인(守陵人)과 [[제기(祭器)]]가 모두 미비하였습니다. 신의왕후가 첫 번째 왕비인데, 어찌 오로지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에만 후하게 하십니까?” 하니, 태조가 “내가 박(薄)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유사(有司)에서 청하지 않기 때문이다.”하였다. | 1398년(태조 7) 봄에 태조이성계가 장차 평주(平州: 평산) 온정(溫井)에 거둥하려고 개성유후사에서 머물렀는데, 유후사의 정령(政令)이 해이한 것을 보고 즉시 최유경을 유후에 임명하였다. 그때 최유경이 나아가서 아뢰기를, “신(臣)이 일찍이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에 봉향(奉香)하였는데, 수릉인(守陵人)과 [[제기(祭器)]]가 모두 미비하였습니다. 신의왕후가 첫 번째 왕비인데, 어찌 오로지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에만 후하게 하십니까?” 하니, 태조가 “내가 박(薄)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유사(有司)에서 청하지 않기 때문이다.”하였다. | ||
− | 신덕왕후 강씨(康氏)는 1396년(태조 5)에 승하하자 정릉에 장사지냈는데, 태조가 오로지 신덕왕후를 못 잊어 하여 한 달에도 몇 번씩 정릉에 행차하였다. 최유경은 또 이 일을 도당(都堂)에도 건의하였으나,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은 이 건의를 묵살하였다. 후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서 신덕왕후 한씨(韓氏) 소생인 이방원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세자 이방석( | + | 신덕왕후 강씨(康氏)는 1396년(태조 5)에 승하하자 정릉에 장사지냈는데, 태조가 오로지 신덕왕후를 못 잊어 하여 한 달에도 몇 번씩 정릉에 행차하였다. 최유경은 또 이 일을 도당(都堂)에도 건의하였으나,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은 이 건의를 묵살하였다. 후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서 신덕왕후 한씨(韓氏) 소생인 이방원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세자 이방석(李芳碩) 형제와 정도전·남은 일당을 모조리 살해하였다. 여기서 최유경은 한씨 소생의 이방원 형제를 지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1402년(태종 2) 3월 하성절사(賀聖節使)최유경이 명나라 서울 남경에서 돌아와서, 중국 명나라에서 연왕(燕王)주체(朱棣)가 조카 건문제(建文帝)와 싸우고 있는 상황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최유경은 전망하기를, “연왕의 병력은 기세가 강하여, 이기는 기세를 타서 먼 곳까지 달려와서 싸우는데, 황제 건문제의 군대는 비록 숫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기세가 약하니, 장차 싸우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하였다. | 1402년(태종 2) 3월 하성절사(賀聖節使)최유경이 명나라 서울 남경에서 돌아와서, 중국 명나라에서 연왕(燕王)주체(朱棣)가 조카 건문제(建文帝)와 싸우고 있는 상황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최유경은 전망하기를, “연왕의 병력은 기세가 강하여, 이기는 기세를 타서 먼 곳까지 달려와서 싸우는데, 황제 건문제의 군대는 비록 숫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기세가 약하니, 장차 싸우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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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경 사후 1413년(태종 12) 11월에 각 품(各品)의 농사(農舍)의 울타리 둘레 보수(步數)를 정하였다. 최유경의 아내 이씨(李氏)가 정부에 고소하기를, “죽은 남편의 장지(葬地)를 용구현(龍駒縣: 용인현)의 전 장군(將軍)김소남(金召南)의 농사(農舍) 곁에 복택(卜宅)하였는데, 남편의 영구(靈柩)가 이르자, 김소남이 이를 저지하였습니다.” 하였다. 김소남이 마음대로 산을 점유하여, 복택한 묘소가 자기 농사의 울타리 안에 있다고 방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부에서 1품의 농사의 울타리 둘레를 사방 1백 보로 정하고, 매 품(品)마다 10보씩을 줄이기로 하여, [[서인(庶人)]]은 사방 10보로 정하였다.(『태종실록』 참고.) | 최유경 사후 1413년(태종 12) 11월에 각 품(各品)의 농사(農舍)의 울타리 둘레 보수(步數)를 정하였다. 최유경의 아내 이씨(李氏)가 정부에 고소하기를, “죽은 남편의 장지(葬地)를 용구현(龍駒縣: 용인현)의 전 장군(將軍)김소남(金召南)의 농사(農舍) 곁에 복택(卜宅)하였는데, 남편의 영구(靈柩)가 이르자, 김소남이 이를 저지하였습니다.” 하였다. 김소남이 마음대로 산을 점유하여, 복택한 묘소가 자기 농사의 울타리 안에 있다고 방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부에서 1품의 농사의 울타리 둘레를 사방 1백 보로 정하고, 매 품(品)마다 10보씩을 줄이기로 하여, [[서인(庶人)]]은 사방 10보로 정하였다.(『태종실록』 참고.) | ||
− | 첫째부인 일선김씨( | + | 첫째부인 일선김씨(一善金氏)는 고려 밀직사(密直司) [[지사(知事)]]김달상(金達祥)의 딸인데, 그녀가 낳은 아들 최사위(崔士威)는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냈다. 둘째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상락공(上洛公)김앙(金昻)의 딸인데, 그녀가 낳은 아들 최사의(崔士儀)는 [[돈녕부(敦寧府)]] 판사를 지냈다. 셋째부인 고성이씨(固城李氏)는 고려 시중(侍中)이숭(李崇)의 딸인데, 그녀가 낳은 아들은 넷이다. 최사규(崔士規)는 [[지평(持平)]]을 지냈고, 다음 [[최사강(崔士康)]]은 우찬성(右贊成)을 지냈고, 다음 최사용(崔士庸)은 중추부 [[첨지사(僉知事)]]를 지냈고, 막내 최사흥(崔士興)은 유복자(遺腹子)로서 현감(縣監)을 지냈다.(「최유경 묘표」 참고.)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2018년 1월 9일 (화) 22:57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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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최유경 |
한글표제 | 최유경 |
한자표제 | 崔有慶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고려~조선 |
왕대 | 우왕~태종 |
집필자 | 최양규 |
자 | 경지(慶之) |
호 | 죽정(竹亭) |
시호 | 평도(平度)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343년(충혜왕복위 4) 4월 29일(甲子日) |
사망 | 1413년(태종 13) 6월 24일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충청도 청주(淸州),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용인현(龍仁縣) 자봉산(紫鳳山) |
조부 | 최득평(崔得枰) |
부 | 최재(崔宰) |
모_외조 | 박씨(朴氏): 박윤류(朴允槱)의 딸 |
형제 | 최후상(崔後尙) |
처_장인 | (첫째부인)일선김씨(一善金氏): 김달상(金達祥)의 딸 →(자녀) 1남 (둘째부인)안동김씨(安東金氏): 김앙(金昻)의 딸 →(자녀)1남 1녀 (세째부인)고성이씨(固城李氏): 이숭(李崇)의 딸 →(자녀)4남 |
자녀 | (1자)최사위(崔士威) (2자)최사의(崔士儀) (3자)최사규(崔士規) (4자)최사강(崔士康) (5자)최사용(崔士庸) (6자)최사흥(崔士興) (1녀)이좌(李佐)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최유경(崔有慶) |
총론
[1343년(충혜왕 복위 4)∼1413년(태종 13) = 71세]. 여말 선초 고려 공민왕~조선태종 때의 문신. 행직은 의정부 참찬(參贊)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자는 경지(慶之), 호는 죽정(竹亭)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인데, 청주(淸州) 출신으로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고려 감찰대부(監察大夫)최재(崔宰)이며, 어머니 박씨(朴氏)는 고려 군부정랑(軍簿正郞)박윤류(朴允槱)의 딸이다. 고려 선부전서(選部典書)최득평(崔得枰)의 손자이고, 세종 때 명신 최사강(崔士康)의 아버지다.
고려 말엽의 활동
1372년(공민왕 21) 판도사(版圖司)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각도의 의염(義鹽)의 염분(鹽盆)이 모두 지방의 유력한 호족(豪族)들에게 점령당하였으므로, 최유경이 자세히 상서(上書)하여 모두 나라의 염창(鹽倉)에 속하게 하였다. 최유경이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으로 옮겨서 일을 보던 처음에 환관(宦官)윤충좌(尹忠佐)를 탄핵하였다. 윤충좌가 공민왕의 총애(寵愛)를 믿고 교만 방종하여 불법한 짓을 많이 행하였으므로, 헌사(憲司)에서 그를 심문하고자 하였으나, 그 힘을 두려워하여 능히 실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375년(우왕 1) 여름에 전법사(典法司) 총랑(摠郞)으로 옮겼으며, 1377년(우왕 3)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상제(喪制)를 끝마쳤다. 1383년(우왕 9) 공주목사(公州牧使)가 되었는데, 그때 왜구(倭寇) 1천여 명이 옥주(沃州)·보령(報令) 등의 고을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공주 계룡산에 웅거하였다. 공주 목사최유경이 판관송자호(宋子浩)와 함께 구점(仇岾)에서 왜구와 싸워서 물리쳤다.(『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32 참고.)
1388년(우왕 14) 정월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가 권신(權臣) 임견미(林堅味)·이인임(李仁任) 등을 주살(誅殺)할 때 이성계가 최유경을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로 보내어 전민(田民)의 동요를 막게 하였다. 5월 우왕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최유경을 서북면전운사(西北面轉運使)에 임명하여 찰방(察訪)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자, 조정의 관리들이 모두 이성계에게 붙었으나, 오로지 최유경만은 성주(成州)로 달려가서 우왕에게 변란을 고하고, 우왕을 수종하여 개경(開京)으로 돌아왔다. 이성계와 친구사이였던 최유경은 이성계를 도와야 하지만, 고려에 충성한다는 일념으로 우왕을 도왔던 것이다.
이성계가 최영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았을 때, 이성계가 특별히 그를 보호하여 주었는데, 이성계는 최유경의 충직함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해 8월 여러 도(道)의 안렴사(按廉使)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士)라고 바꾸고 교서(敎書)와 부월(鈇鉞)을 가지고 지방에 가서 민심을 달랬는데, 최유경은 전라도에 파견되었다.(『고려사절요』 권33 참고.) 1389년(공양왕 1) 최유경을 발탁하여 밀직사(密直司) 부사(副使)에 임명하였다.
태조 시대 활동
1392년(태조 1)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 즉위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책훈할 때, 최유경은 <위화도 회군> 때 우왕에게 고변(告變)하였다고 하여 원종공신에 책훈되는 것을 반대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나 태조이성계가 그의 충의(忠義)를 칭찬하여, 겨우 원종공신에 서훈되었다. 1394년(태조 3) 6월 대간(臺諫)에서 천거한 사람을 각도의 도관찰출척사에 임명하였는데, 최유경을 경상도 도관찰출척사에 임명하였다.(『태조실록(太祖實錄)』 참고.) 1395년(태조 4) 3월 태조가 경상도 도관찰사최유경에게 특별히 술을 하사하였다. 이어 중추원(中樞院)지사(知事)가 되었다가, 1397년(태조 6) 7월 경기도·충청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었다. 1398년(태조 7) 3월 태조가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에서 수창궁(壽昌宮)과 성(城)을 수리하지 않았다고 하여, 개성 유후사 유후(留後)이원굉(李元紘)을 파면하고, 중추원사(中樞院使)최유경을 개성 유후사 유후에 임명하였다.(『태조실록』 참고.) 그해 7월 각도에 도관찰출척사를 파견하였는데, 이때 최유경은 경기우도 도관찰출척사로 나갔다. 최유경은 태조이성계의 두터운 신임과 사랑을 받았다.
정종~태종 시대 활동
1398년 9월 태조가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상왕이 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 소생의 두 아들과 사위를 잃은 태조는 이방원에게 몹시 분노하고 있었다. 평소 최유경을 꺼려하던 자들이 이때 그를 헐뜯었는데, 정종이 이를 제지하였다. 1399년(정종 1) 1월 정종이 하정(賀正)을 마치고,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때 경기우도 관찰사최유경이 무일도(無逸圖)를 바치니, 정종이 가납(嘉納)하였다. 그해 경기우도 관찰사의 임기를 마치고 중추원사가 되었다. 이듬해 1400년(정종 2) 1월 흥국사(興國寺)의 금인(金人)이 땀을 흘렸으므로, 중추원사최유경을 보내어 7일 도량(七日道場)을 베풀고 기양(祈禳)하였다.(『정종실록(定宗實錄)』 참고.) 그해 7월 삼사(三司) 우사(右使)가 되었다.
1400년 11월 정종이 선위(禪位)하여, 태종이 즉위하였다. 1401년(태종 1) 9월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중국 명(明)나라 수도 남경(南京)에 가서, 정삭(正朔)을 하례(賀禮)하고 이듬해 3월 돌아왔다. 사신으로 갔던 그 해 12월에 도목정사(都目政事)에서 태종이 각사로 하여금 노성(老成)한 자로서 정부(政府)를 맡을 만한 자를 추천하라고 하니, 육조와 대간에서 함께 최유경을 천거하므로, 의정부 참찬에 임명하였다.
1402년(태종 2) 11월 태종이 서울을 출발하여 금교역(金郊驛) 북교(北郊)에 머물면서 사냥하였는데, 최유경으로 하여금 민제(閔霽)·성석린(成石璘)·우인렬(禹仁烈) 등과 함께 서울을 유수(留守)하게 하였다.(『태종실록(太宗實錄)』 참고.) 임금이 도성을 비운 사이에 도성에 남아서 지키는 자는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임명하는 것이 보통이다. 민제는 태종의 장인이고, 성석린과 우인렬은 모두 태조의 막역한 친구인 것을 감안하면, 최유경도 태조와 태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403년(태종 3) 5월 태종이 태상전(太上殿: 이성계의 궁)에 나아가 태조에게 헌수(獻壽)하였는데, 사평부(司平府) 참판(參判)최유경도 잔치에 참여하여, 연귀(聯句)를 지어 창화(唱和)하면서 태조이성계를 위로하였다.(『태종실록』 참고.) 그해 8월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다가, 그해 윤11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404년(태종 4) 3월 사간원에서 대사헌최유경을 탄핵하였는데, 최유경이 형님의 복중(服中)에 있으면서 대궐에 나와서 헌사의 수가(隨駕)를 청하였기 때문이다.(『태종실록』 참고.) 그리하여 5월 태종은 사헌부 대사헌최유경을 파면하였다. 1406년(태종 6) 윤7월 다시 의정부 참찬에 임명하였다.
1412년(태종 12) 나이 70세가 되었다고 하여 치사(致仕)하고, 낙향(落鄕)하였다. 1413년(태종 13) 6월 24일 노병으로 충청도 청주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71세였다.<비문>
성품과 일화
최유경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시호를 ‘평도(平度)’라고 하였는데, 대범하여 남에게 용감히 말하고 남에게 굽히거나 아첨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는 두루 중외에 이름을 드날렸으나, 사람들이 청렴하고 정직하다고 칭찬하였다. 태조이성계도 그의 충직(忠直)함을 항상 칭찬하였다.
1398년(태조 7) 봄에 태조이성계가 장차 평주(平州: 평산) 온정(溫井)에 거둥하려고 개성유후사에서 머물렀는데, 유후사의 정령(政令)이 해이한 것을 보고 즉시 최유경을 유후에 임명하였다. 그때 최유경이 나아가서 아뢰기를, “신(臣)이 일찍이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에 봉향(奉香)하였는데, 수릉인(守陵人)과 제기(祭器)가 모두 미비하였습니다. 신의왕후가 첫 번째 왕비인데, 어찌 오로지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에만 후하게 하십니까?” 하니, 태조가 “내가 박(薄)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유사(有司)에서 청하지 않기 때문이다.”하였다.
신덕왕후 강씨(康氏)는 1396년(태조 5)에 승하하자 정릉에 장사지냈는데, 태조가 오로지 신덕왕후를 못 잊어 하여 한 달에도 몇 번씩 정릉에 행차하였다. 최유경은 또 이 일을 도당(都堂)에도 건의하였으나,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은 이 건의를 묵살하였다. 후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서 신덕왕후 한씨(韓氏) 소생인 이방원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세자 이방석(李芳碩) 형제와 정도전·남은 일당을 모조리 살해하였다. 여기서 최유경은 한씨 소생의 이방원 형제를 지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402년(태종 2) 3월 하성절사(賀聖節使)최유경이 명나라 서울 남경에서 돌아와서, 중국 명나라에서 연왕(燕王)주체(朱棣)가 조카 건문제(建文帝)와 싸우고 있는 상황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최유경은 전망하기를, “연왕의 병력은 기세가 강하여, 이기는 기세를 타서 먼 곳까지 달려와서 싸우는데, 황제 건문제의 군대는 비록 숫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기세가 약하니, 장차 싸우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의 예견대로 이듬해 1403년 연왕의 군사가 건문제의 남경성(南京珹)을 함락하고, 연왕이 즉위하여 성조(成祖)영락제(永樂帝)가 되었다. 이방원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연왕의 본거지 요양(遼陽)에서 연왕을 만났다. 이때 두 사람이 서로 의기투합하여 밤새도록 술을 마시면서 적장자(嫡長子)로 태어나서 왕위를 이어받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두 사람은 실력으로 각각 왕위를 차지하였다.
1406년(태종 6) 9월 태종이 안암동(安巖洞)김식(金軾)의 집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처음에 경기도 도관찰사전백영(全伯英)이 안암동의 이어소(移御所)에다 초가(草家) 31간을 지었는데, 태종이 지신사(知申事)황희(黃喜)를 힐책하기를, “지금 이어소를 수리하라고 한 것은 내가 경기도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으려고 함이다. 오늘날 집을 영조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에게 고하지 않는가?” 하였다. 황희가 대답하기를, “신이 어제 명령을 받들고 수리(修理) 제조관(提調官)최유경 등에게 가서 보았는데, 최유경이 말하기를, ‘집이 협소하여 조금 더 지어야 되겠다.’고 하기에, 신이 ‘그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즉시 아뢰지 못한 것은 실로 신의 죄입니다.” 하였다. 태종이 노하여, “지금 새로 지은 집을 모두 다 헐어버리라. 내일 가서 보고, 만약에 한 간이라도 남아 있으면, 내가 이어하지 않겠다.” 하니, 최유경이 왕명을 듣고 두려워하여 밤을 꼬박 새우면서 모두 헐어버렸다.(『태조실록』 참고.)
묘소와 후손
시호는 평도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현(龍仁縣) 자봉산(紫鳳山)에 있는데, 정수재(靜修齋)최후량(崔後亮)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최유경은 효성이 지극하여 그 집에 정려(旌閭)하였는데, 정문(旌門)은 청주의 고택(故宅)에 세워졌다. 또 태조조(太祖朝)의 청백리에 선록되었다.(「최유경 묘표」 참고.) 충청도 공주의 송천서원(宋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최유경 사후 1413년(태종 12) 11월에 각 품(各品)의 농사(農舍)의 울타리 둘레 보수(步數)를 정하였다. 최유경의 아내 이씨(李氏)가 정부에 고소하기를, “죽은 남편의 장지(葬地)를 용구현(龍駒縣: 용인현)의 전 장군(將軍)김소남(金召南)의 농사(農舍) 곁에 복택(卜宅)하였는데, 남편의 영구(靈柩)가 이르자, 김소남이 이를 저지하였습니다.” 하였다. 김소남이 마음대로 산을 점유하여, 복택한 묘소가 자기 농사의 울타리 안에 있다고 방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부에서 1품의 농사의 울타리 둘레를 사방 1백 보로 정하고, 매 품(品)마다 10보씩을 줄이기로 하여, 서인(庶人)은 사방 10보로 정하였다.(『태종실록』 참고.)
첫째부인 일선김씨(一善金氏)는 고려 밀직사(密直司) 지사(知事)김달상(金達祥)의 딸인데, 그녀가 낳은 아들 최사위(崔士威)는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냈다. 둘째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상락공(上洛公)김앙(金昻)의 딸인데, 그녀가 낳은 아들 최사의(崔士儀)는 돈녕부(敦寧府) 판사를 지냈다. 셋째부인 고성이씨(固城李氏)는 고려 시중(侍中)이숭(李崇)의 딸인데, 그녀가 낳은 아들은 넷이다. 최사규(崔士規)는 지평(持平)을 지냈고, 다음 최사강(崔士康)은 우찬성(右贊成)을 지냈고, 다음 최사용(崔士庸)은 중추부 첨지사(僉知事)를 지냈고, 막내 최사흥(崔士興)은 유복자(遺腹子)로서 현감(縣監)을 지냈다.(「최유경 묘표」 참고.)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태조실록(太祖實錄)』
- 『정종실록(定宗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목은집(牧隱集)』
- 『양촌집(陽村集)』
- 『동문선(東文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국조보감(國朝寶鑑)』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명곡집(明谷集)』
- 『귀록집(歸鹿集)』
- 『서산집(西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