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린(成石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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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38년(충숙왕복위7)∼1423년(세종5) = 86세]. 여말선초 고려 공민왕~조선세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자수(自修), 자호는 독곡(獨谷)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아버지는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이고, 어머니 나씨(羅氏)는 밀직사(密直司) 지신사(知申事)나천부(羅天富)의 딸이다. 대제학성석용(成石瑢) · 예조 판서성석인(成石因)의 형이다.

고려 시대의 활동

1357년(공민왕6) 나이 20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국자감 학유(學諭)에 보임되었다가, 직사관(直史官)으로 옮겼는데, 이때 국사(國史)를 편수하던 익재(益齋)이제현(李齊賢)은 그의 글재주를 인정하여 그로 하여금 사초(史草)를 요약 정리하게 하였다. 그 뒤에 예문관(藝文館) 공봉(供奉)을 거쳐, 삼사(三司)도사(都事), 전의시(典儀寺) 주부(注簿) 등을 역임하였다. 공민왕(恭愍王)이 그를 중용하여, 차자방(箚子房: 상서원)의 필도치(閟闍赤: 서기)로 발탁하였는데, 필도치는 몽고와 외교적 업무를 수발하던 중요한 자리였다. 전교시(典校寺) 부령(副令)으로 옮겼다가, 지인(知印) 상서(尙書) · 예부(禮部) 총랑(摠郞) 등을 역임하였는데, 실권자 신돈(辛旽)의 미움을 받아서 해주목사(海州牧使)로 좌천되었지만, 3개월만에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고, 삼사 좌윤(左尹)을 거쳐 · 밀직사(密直司)에 들어가서 좌부대언(左副代言)에 발탁되어 지신사(知申事: 도승지)로 영전되었고, 그 뒤에 밀직사 제학(提學)에 임명되었다. 그가 공민왕 때 지신사를 지낸 인물로서 이성계(李成桂)와 가까워서 조선조의 개국에 협력하였기 때문에 조선 시대 내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1380년(우왕6) 여름에 왜적이 승천부(升天府)에 침입하여 서울 개성(開城)이 거의 함락될 뻔 하였는데, 이때 그가 원수(元帥)에 임명되어, 양백연(楊伯淵)을 편장(褊將)으로 삼아 종군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적의 선봉이 매우 날랜 것을 보고 다리를 건너서 후퇴하려고 하였다. 이때 성석린이 계책을 내기를, “만약 이 다리를 지나간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이반될 것이니, 다리를 등지고 한번 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그의 말에 따라 모든 장병들을 독려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그해 가을에 양백연의 옥사에 연루되어 경상도 함안(咸安)에 유배되었다가, 소환되어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지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었다. 외직으로 양광도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使)로 나가서 주(州) · 군(郡)에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는데, 국가에서 그 제도를 채택하여 여러 도에 시행하였다. 내직으로 문하부 평리(評理)에 임명되어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을 겸임하였다. 이성계 일파가 창왕(昌王)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울 때 그 계책에 협찬하였으므로, 단성 보절 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의 녹권을 받고, 창성군 충의군(昌城郡忠義君)에 봉해졌으며, 삼사 우사(右使)에 임명되었다.

조선 시대의 활동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었을 때 그의 나이가 55세였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즉위하자, 그를 문하시랑(門下侍郞) 찬성사(贊成事)에 임명하였다. 1393년(태조2) 개성부(開城府)판사(判事)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 판사로 옮겼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지고 노비(奴婢) 3명, 전지 30결(結)을 하사받았다. 제 1 · 2차의 왕자의 난 때 막내 아들을 잃은 태조는 1398년 9월 왕위를 둘째 아들(정종)에게 물려주고 고향 함흥(咸興)으로 돌아가 버렸다. 정종 시대에 그는 서북면 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 · 서북면 도절제사(西北面都節制使) · 평양부윤(平壤府尹)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문하시랑 찬성사로 전임되었고, 수충 익대공신(輸忠翊戴功臣)에 녹훈되었다. 1399년(정종1) 문하성 우정승(右政丞)으로 승진되어 창녕백(昌寧伯)에 봉해졌으며 1400년(정종2) 좌정승(左政丞)에 임명되었다. 1400년 11월 태종 이방원(李芳遠)이 왕위에 오르자, 그를 ‘함흥차사(咸興差使)’에 임명하여, 태조 이성계를 함흥에서 서울로 모시고 오게 하였다. 태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성석린을 가장 중하게 여겼는데, 태조의 마음에 기쁘지 않은 일이 있더라도, 성석린을 보면 마음이 풀리어 노여움을 그치고, 그가 말하면 반드시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함흥차사로 간 사람들은 모두 태조에게 죽음을 당하였으나, 그는 태조를 설득하여 모시고 돌아왔다. 익대 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의 녹권을 받고,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다. 1403년(태종3) 다시 우정승(右政丞)에 임명되고, 1407년(태종7) 좌정승(左政丞)에 임명되었다. 1411년(태종11) 가을에 전문을 올려 나이가 70세가 넘었다고 사임하기를 원하였으나 태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1414년(태종14) 왕이 부원군(府院君)에 봉하여 집에서 쉬게 하였으며, 1415년(태종15) 다시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다시 부원군으로서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서 쉬도록 하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나이가 80세가 넘어서 집에서 편안히 은거하다가, 1423년(세종5) 1월 12일 잔병으로 죽었는데, 향년이 86세였다.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그가 조선 시대 정승 가운데 첫 번 째로 사궤장(賜几杖)하였고, 다섯 번 째로 장수하였다고 했다. 진서(眞書)와 초서(草書)를 잘 쓰고 시율(詩律)을 잘 지었다.

성품과 일화

성석린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용모가 우람하고 성품이 고매하며 기량이 컸다. 학문은 천인(天人)의 원리를 연구하여, 지식은 고금을 꿰뚫어 보았다. 경근한 자세로 행동하고 언제나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역대 임금을 섬기는 데에 충절을 다 바쳐 국가의 안정에 힘을 쓰고, 어수선하게 개혁하는 것을 싫어하였으므로, 국가의 시귀(蓍龜)가 되고, 조정의 의표(儀表)가 되었다. 집에 있을 적에 검소하게 생활하고 집안 재산을 늘리지 않았다. 늙어서 평상시에 집에서 거처할 적에 태종이 하사한 나무 의자[木几]에 항상 앉아 있었는데, 이를 화기(和氣)를 기르는 ‘양화(養和)’라고 이름 하였다. 1422년 여름부터 병이 있었는데, 이듬해 겨울 양화에 의지하여 앉아 있다가 눈을 감았다.

태종 초에 요동(遼東)의 만산군(漫散軍) 임파라실(林波羅實) 등 많은 무리가 국경에 이르러 입국을 요청하자, 조정의 논의가 모두 그들을 받아들이자 하였으나, 성석린 홀로 불가하다고 고집하면서, 중국과의 외교적 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산군은 고려 때 요동으로 잡혀간 우리나라 사람들인데, 명나라 성조(成祖)영락제(永樂帝)가 어린 조카 건문제(建文帝)를 몰아내고 정권의 안정을 찾자, 바로 조선에게 만산군의 송환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결국 성석린의 말이 들어맞았던 것이다. 조선에서는 변명을 하다가 4차에 걸쳐 2만 여 명을 요동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 대신 조선은 두만강 북쪽 7백리 공험진(公嶮鎭) 이남의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명나라로부터 얻어내었고, 이를 토대로 세종은 공험진 이남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북진(北進) 정책을 추진하여, 6진(鎭)과 4군(郡)을 개척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抱川) 북리(北里) 계류산(溪流山)의 선영에 있은데, 김연지(金連枝)가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독곡집(獨谷集)』「독곡 선생 행장(獨谷先生行狀)」) 부인 안씨(安氏)는 고려 정당문학안원숭(安元崇: 安原崇)의 딸(3녀)이자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성발도(成發道)는 의정부 참찬을 지냈다. 성석린의 동생 성석용의 증손자가 성삼문(成三問)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독곡집(獨谷集)』
  • 『동문선(東文選)』
  • 『삼봉집(三峯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양촌집(陽村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총화(慵齋叢話)』
  • 『춘정집(春亭集)』
  • 『필원잡기(筆苑雜記)』
  • 『임하필기(林下筆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