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산군(漫散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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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홍건적에게 포로로 끌려가서 명나라동녕위(東寧衛)군정(軍丁)으로 편입되었다가 정난(靖難)의 역(役) 때 조선으로 도망쳐 나온 고려인.

개설

만산군은 명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관할하는 동녕위(東寧衛) 소속 고려인들이었다. 이들은 요동의 몽골 세력 호발도(胡拔都)가 1382년(고려 우왕 2)에 고려에 내침하였을 때 포로로 끌려가 요양 지역에 거주하다가 명의 동녕위에 편입되었다. 그중에는 조선에서 도망쳐 스스로 군역에 편입된 자도 있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399년(정종 1) 명에서 연왕(燕王)이 왕위 찬탈을 위하여 일으킨 난인 정난(靖難)의 역(役)이 발생하자 난을 피해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넘어오는 만산군의 수효가 대거 증가하였다. 조선 왕 태종은 이들을 각지에 분산해 거주하도록 조치하였는데, 이후 조선 조정에서 만산군 대책에 관한 활발한 논의가 일어났다. 1402년(태종 3)에 정난의 역이 끝나고 승리한 연왕이 영락제(永樂帝)로 즉위하면서 이들의 쇄환문제가 외교적 현안으로 비화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조선은 명의 요구에 따라 그들을 명나라에 송환시켜 주었다.

조직 및 역할

동녕위 소속 고려인들은 홍무(洪武) 연간(1368∼1398년)에 30,000여 명이었으나, 영락 시기가 되면 만산군만 40,000명에 달하였다. 당시의 요동 인구 가운데 고려인은 대략 30%를 차지할 정도의 규모였다. 그들의 거주지 분포는 서쪽으로 요양(遼陽), 동쪽으로 개주(開州), 남쪽으로 해주(海州)와 개주(蓋州)였다.

변천

1399년에 명나라는 건문제(建文帝)와 그의 숙부 연왕이 제위를 둘러싸고 전쟁에 돌입하였다. ‘정난의 역’이 내전으로 확대되어 요동 지방까지 여파가 미치자, 피난민과 패잔병들이 전란을 피해 조선으로 밀려드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정난의 역 발생 소식을 처음으로 조선에 알려 준 사람이 요동의 동녕위에 속해 있다가 도망쳐 나온 조선 출신의 만산군이었고, 1400년(정종 2) “명 황실이 크게 어지러워졌으며, 연왕이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조선에 알려 준 사람도 도망쳐 나온 12명의 정료위(定遼衛) 소속 만산군이었다.

건문제가 패전을 거듭하며 권위가 약해졌을 때, 조선은 명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만산군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입국을 허용하지 않을 경우에 식량이 떨어진 만산군민이 도적화할 우려, 원래 조선인인 만산군민을 쇄환할 경우의 처형 가능성, 만산군민들이 조선에 정착할 경우의 부족한 노동력 확보 등이 이유였다.

그러나 정난의 역에서 승리를 거둔 연왕이 영락제로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상황이 돌변하였다. 영락제가 요동의 천호(千戶)백호(百戶)를 조선에 파견하였는데, 그 편에 칙서를 내려 동녕위에서 도망한 관원과 군민을 복귀시키라고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만산군의 송환 요구는 이후에도 줄곧 이어졌다. 당시 조선은 중원에 새로 들어선 강력한 영락제 정권과 우호 관계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 조공국 중에서 가장 먼저 축하사절인 하등극사(賀登極使)를 파견하였으며, 그들의 만산군 송환 요구에도 비록 내키지는 않았으나 결국 네 차례에 걸쳐 요동으로 송환시켰다.

참고문헌

  • 박원호, 『명초 조선관계사연구』, 일조각, 2002.
  • 김경록, 「조선 초기 귀화정책(歸化政策)과 조명관계(朝明關係)」, 『역사와현실』 83, 2012.
  • 강성문, 「조선 초기 만산군의 유입과 송환 문제」, 『죽당이현희교수화갑기념한국사학논총』, 1997.
  • 남의현, 「명 전기 요동도사와 요동팔참점거」, 『명청사연구』 21, 2004.
  • 서인범 「명대의 요동도사와 동녕위」, 『명청사연구』 2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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